사람사는 이야기

원광법사와 세속오계

難勝 2009. 11. 24. 07:20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당 속고승전 제 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황륭사)의 석원광의 속성은 박씨다. 본디 삼한(변한. 진한. 마한)에 살았다. 원래는 곧 진한 사람이었다. 대대로 조선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 오래 계승되었는데, 기량은 넓고 크며 문사를 즐겨 연습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널리 읽고, 제자와 역사책을 연구했다.

문명은 삼한에 떨쳤고, 박학은 중국과 손색이 없었다.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해외에 가기로 분발했다.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지금 중국의 남경)에 이르니,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서 문명국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전에 의심했던 것을 질문하고 도를 물어 그 뜻을 해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 장엄사 민공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본디 세간의 전적을 익히고 배웠으므로 신비를 궁구할 만한 이치라 이르더니, 불교의 종지를 듣고 나서는 도리어 세간의 전적을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겼다. 명교를 헛되이 찾은 것이 실로 생애에 있어 두려웠으므로, 이에 진주에게 글을 올려 도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중이 되어 곧 구족계를 받고, 강석을 두루 찾아 좋은 계책을 다 배웠으며, 미묘한 말을 해득하여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실의 열반을 마음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 나중에는 또 오의 호구산에 가니 정념과 정정은 서로 따랐으며 추사와 세사를 경계하여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에 모였다. 아울러 4아함경을 널리 읽어 공효는 팔정에들어 갔으며, 명선 본뜨기를 쉽게 하였고, 통직에 있어도 결점 잡기어려 웠다. 본디 먹었던 마음과 아주 맞았으므로 드디어 평생을 이 곳에서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인사를 아주 끊고 상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여 생각을 세상 밖에 두고 영원히 속세를 멀리 사절하였다.

이 때 어떤 신사가 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원광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끝내 맞이했으므로, 마침내 그 뜻에 따랐다. 처음에 성실론을 진술하고 끝으로 반야겨을 강의했다. 모두 해석이 통철하니 좋은 명예가 빨리 전파되고, 겸하여 아름다운 수사로서 글 뜻을 엮어내니 듣는 이는 매우 기뻐했으며, 그들의 마음에 들어맞았다.

이로부터 예전의 규정에 따라 중생을 개도함으로써 임무를 삼으니 언제나 법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마을 불법으로 쏠리게 했다. 비록 이역에서 이 전교라 하나 도에 젖으면 문득 혐극을 버렸으므로, 명망이 널리 유포 되어 해외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덤불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사람이 서로 닿아 고기비늘 같았다.

때마침 수제가 천하를 통치하니 그 위엄이 남국(진나라)에까지 미쳤다. 그 진나라 역수(曆數)가 끝나 수나라 군사가 양도(진의 수도)에 들어오니 원광은 마침내 난병에게 잡히어 바야흐로 살해되려 했다. 수의 대장이 절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뛰어가 구하려 했더니, 불타는 광경은 조금도 없고 다만 원과 이 탑 앞에 보이는데, 결박되어 바야흐로 죽음을 당하려 했다. 대장은 그 이상함을 괴이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주었다.

원광이 위기에 부닥치자 영감을 나타냄의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월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 진(주. 진. 북쪽 중국)의 문화를 보고자하여 개황 9년[589]에 제도(수나라 서울)로 아서 유학했다. 때마침 불법을 초회(初會)를 당해 섭론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미서를 떨치게 했다. 또 혜해(慧解)를 달리어 명예를 수나라 서울에 폈으며, 공업이 이미 이루어 지자 동방(신라)에 가서 공업을 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본국(신라)에서 멀리 이 소식을 듣고 (황세=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 보내기를 자주 청했다. 황제는 칙명으로 후하게 이로하고 고국으로 돌려 보내어 주었다. 원광이 갔다가 돌아온 것이 수 십년이 되니 늙은이도 어린이도 서로 기뻐했다. 신라왕 김씨(진평왕)는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처럼 높였다. 원광은 천성이 허한(虛閑) 좋아했으며, 정은 박에 함이 많으며, 말할 때는 상시 웃음을 먹음었고 노기는 낯에 드러내지 않았다.

전표. 계서 등 오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심중으로부터 나왔으니 한나라가 쏠려 받들어 모두 정치하는 방법을 그에게 맡겼으며 도법으로 교화하는 일을 물웠다 처지는 금의환향 사람과 달랐으나 실정은 중국의 문물을 보고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호를 타서 훈계를 베풀어 노늘에까지 그 모범을 남기었다. 나이 이미 높아져서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다. 의복과 약물 식물을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해서 좌우 사람이 돕지못하게 함으로써 혼자서만 복을 받고자했으니 그 감복 존경함이 이러 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친히 손을 잡고 위문하며 누누이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것을 부탁하니 그는 상서를 말하며 공덕이 바닷 구석에까지 미치었다.

신라 건복 58년[640]에 몸이 조금 불편함을 느꼈다. 7일을 지나서 계를 남겼는데, 매우 간절했다. 거처하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아 세상를 떠났다. 연세가 99세였으며, 때는 당나라 정관 4년이었다. 임종할 때에 절의 동북의 빈 곳에서 음악 소리가 공중에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안에 가득 차니, 승려와 속인들은 슬퍼하면서 한편으로 경사로 여겼으며 그의 영감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에 장사지내니 나라에서 우의 와 장례 도구를 내리어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뒤에 속인의 아이를 묻으면 후손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했으므로, 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더니, 바로 그 날에 그 사태한 시체를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던져버렸었다. 이일 때문에 그를 공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보게 되었다.

제자 원안 은 정신이 지혜롭고 근기가 총명하며 천성이 유람을 좋아했으며 그윽한 곳에서 도를 구하며 앙모했다. 마침내 북으로 환도로 가고 동으로 불내를 보고 또 서로 연. 위(북쪽 중국)로 가고 후에 제경(장안)에 이르렀다.

각지방의 풀 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러 경론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읽고 섬세한 뜻까지 환히 알게 되었다.

늦게서야 심학에 귀의했는데 세속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도 도술로 이름이 나타나자, 특진 소우가 임금에 청하여 남전에 지은 진량사에 거두하게 했으며 의복 음식 침구 탕약 등의 공급이 6시에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사실을 썼는데 기사는 이렇다. 본국 신라의 왕이 병환이 나서 치료해도 병이 덜어지지 않았으므로, 원광을 청해다 궁중에 들이어 별성에 있게 했다. 밤마다 두 시간이나 심오한 법을 말하며 계를 받게하여 참횡하게 했더니 왕이 크게 심봉 했다.

어느 때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 같은 형상이 그의 몸을 따라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들도 함께 이것을 보았다. 때문에 성심을 거듭 발하여 원광의 병실에 머무르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드디어 나았다. 원광은 진한. 마한의 안에서 정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 강론하여 후학을 향성 했다. 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데 충당하게 했으므로 남은 것은 다만 가사와 바리대 뿐이었다. 달자함에 기재되어 있다.

또 동경(경주) 안일호장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에 원광법사전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며, 왕경(경주)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도를 닥으려 하여 삼기산에서 홀로 거주했다.

그후 4년에 한 중이 와서 멀지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을 사라았다. 그는 사람 된 품이 사납고 주술 배우기를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니 문득 신이 그 이름을 부르고는 말했다.

“잘도 하십니다. 잘도 하십니다. 당신의 수행은! 무슨 수행하는 이가 비록 많지만 법대로 하는 이는 드뭅니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곧잘 닦지만 소득은 없을 것이요, 그 소란한 소리는 남의 정념을 괴롭히며 그 거주한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므로, 언제나 왕래할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입니다. 법사는 나를 위해 그에게 말해서 다른 곳으로 옮아 가도록 해주시오. 만약 오래 머무른 다면 아마 내가 문득 죄업(살인죄)을 저지를 듯합니다.”

이튿날 법사는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되겠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앙화가 있을 것이오”

중은 대답했다.

“수행이 지극한 이도 마귀에게 홀림을 받겠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말을 근심하시니까?

그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말한 일에 대해 중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법사는 신이 노할까 두려웠다.

“결국 아직 말하지 않았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계시면서 내가 하는 것만 보시오.” 마침내 작별하고 가버렸다. 밤중에 무슨 소리가 나는데, 벼락치는 것 같았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산이 무너져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보기에 심히 놀랍습니다.”

“나는 아니 3천년에 가깝고 신술도 가장 잘합니다. 이것은 작은 일인데 무엇이 놀랄거리가 되겠습니까? 특히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법사가 이 곳에만 계시면 비록 자신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있을 것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니 현재고명을 드러내지 않으면 미래에 승과를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해 와서 이 나라의 혼미한 중생을 제도하지 않습니까?”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디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으므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신이 중국 가는 데 행할 계책을 자세히 일러 주자, 법사는 그 말에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11년을 머물면서 3장을 널리 통달하고 유술(유학의 학술)까지 아울러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600) 삼국사에는 다음 해 신유에 왔다고 했다. 법사가 행장을 차려 돌아오려 했었다. 이에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하여 그 전에 거주했던 삼기산 절에 갔더니 밤중에 신도 또한 와서 그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해륙의 노정에 왕복이 어떠했습니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도착 했습니다.”

“내 또한 스님에게 계를 드리겠습니다.”

이에 윤회의 모든 세계에게 서로 구제할 약속을 맺었다.

법사는 또 청했다.

“신의 진용을 볼 수 있습니까?”

“법사가 만약 내 모양을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하늘 끝을 바라보시오.” 법사가 그 이튿날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대어 있었다.

그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

이일 때문에 삼기산을 민간에서 비장산 이라고 한다.

신은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의 해는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다 이 몸을 버릴 것입니다. 법사는 오셔서 영원히 떠나는 내 혼을 전송해 주시오.”

법사가 약소한 날을 기약해서 그 곳에 가서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 빛 같았다. 법사는 늘 대승견전을 강의했다. 이 때 고구려와 백제가 언제나 신라의 변경을 침범했으므로, 왕은 이것을 매우 걱정하여 수나라 마땅히 당이라 써야 할 것이다. 군사를 청하려고 법사를 청해서 걸병표를 짓게 했다. 수의 황제는 그 글을 보고 30만명으로 고구려를 친히 쳤으니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까지 두루 통찰함을 알게 되었다.

향년 84로서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 장사했다.

또 삼국사 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은 사량부의 사람인데, 같은 마릉 추항과 벗이 되었다. 두사람이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와 교유하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모욕당함을 면치못할 것이니 어찌 어진이의 곁에가서도를 묻지 않겠는가.?”

그 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감 혹 가서 또는 가서라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 은 우리말에서는 곳이라 하므로, 혹은 곳적이라 하니, 갑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천보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이라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 에 사신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문하에 와서 물었다.

“속사가 우매하여 아는바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리시어 평생의 잠언을 삼도록 해 주십시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조항이 열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된 몸이니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에 5계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 셋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니, 너희들은 이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를 것은 이미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만, 이른 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인다’는 말씀만은 아직 이해도지 않습니다.”

“여섯 잿날과 봄철. 여름철에는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시기를 가림이요, 가축을 죽이지 않음은 말. 소. 닭. 개를 이름이며 세물을 죽이지 않음은 곧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생물을 가림이다. 이도 또 한 그 소용되는 것만 하지 많이 죽이지는 않을 일이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

그리고 넷째는 전쟁에 나아가서 물러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써 사귀는 것이다.“

귀산 등은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말을 받들어 실행하며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종군하여 모두나라에 뛰어난 공로가 있었다.

또 건복 30년 계유[613] 즉 진평황 즉위 35년이다. 가을에 수나라의사신 왕세의가 오니, 황룡사에서 백좌도량을 설치하여 여러 고승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있었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