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내 마음의 죽비소리 - 원조 각성 스님

難勝 2010. 8. 25. 06:41

내 마음의 죽비소리


원조 각성 스님 - 부산 화엄사 주지

허욕과 망상 내던진 마음 자리 깨끗하고 고요한 부처가 들지니

중생이 수양해야 하는 건 광석 속 순금을 캐는 이치

참선과 공부를 두루 하고 불경이나 큰 스승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 점검을…

 


죽비는 절에서 사용하는 법구(法具)다. 경책의 도구(회초리)가 되는가하면 후학을 일깨우는 자비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혼탁한 사회, 인생관과 가치관이 사회의 물결에 휩싸여 흔들릴 때가 많다. 청정수행으로 평생을 보내는 스님들의 언행을 통해 세상을 사는 예지를 일깨우는 시리즈를 '죽비'라는 이름으로 싣는다.


부산 사상구 엄궁동에 화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의 회주(會主:제일 웃어른) 원조(圓照) 각성(覺性·71) 스님은 이 시대 불교계의 석학이다. 원조는 스님의 법호이고 각성은 법명이다. 스님들도 사회인과 같이 호가 있고 이름이 있다. 스님은 한국 불교계의 석학일 뿐 아니라 동북아 불교 3국(한·중·일)에서도 손꼽히는 선지식(善知識:큰 스승)이다.


스님은 유(儒), 불(佛), 선(仙)에 막힘 없이 달통한 분이라고 일컬어진다. 스님이 거처하는 방에는 3면이 책으로 꽉 차 있다. 그가 번역·강해한 책만도 16집에 이른다. 대도직지, 중용직지, 대학강목결의 등 유학서적과 입능가경, 원인론(原人論), 불조직지심체요절, 유식론, 대승기신론, 능엄경정맥소현시, 능엄경정해(상·하), 화엄경론회석, 금강삼매경론 능가경 등 불교책 그리고 장자의 남화경에다 도덕경과 감산해 등 선(仙)에 관한 책들이 그것이다. 스님은 가히 '우리 곁에 있는 선지식'이다.



● 선(禪)과 교(敎)는 둘이 아니다(不二)

부처님 말씀이 교라면 부처님 마음은 선이다. 선(禪)이 교(敎)요, 교(敎)가 선(禪)으로 선교불이다. 선을 모르는 사람이 교학을 강의할 수 없으며 강(講)을 한다면 선을 모를 수 없다.


유명한 용수(龍樹) 마명(馬鳴)도 교학에 빼어난 부처님 제자이지만 선의 달마 스님보다 나은 분이시지 않은가.

후대 사람들이 근기(根氣:수행의 바탕)가 중(中)·하(下)로 낮으니까 선과 교를 나누어 공부한다. 선을 닦는 사람이 있고 교학을 연찬하는 사람이 있다.

교는 혜(慧)가 강하다 하고 선은 정(定)이 강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과 혜는 균등해야 한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정과 혜를 함께 닦는다)라 하지 않는가!


●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면 수행은 왜 해야 하는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은 여러 경전에 나온다. 원각경에도 '중생이 본래 부처'라 했고 열반경에도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 성품과 똑같은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광석에 순금이 있더라도 이를 채굴하여 제련하지 않으면 순금을 채취할 수 없는 거와 같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은 광석 속에 있는 순금을 말하는 것이고 석가나 미륵은 순금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나 미륵은 제련 과정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순금이다. 중생에게 있는 번뇌를 제거한다는 것은 광석에 있는 불순물이나 철분 등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광석을 용광로에서 제련하여 순금을 얻듯, 수행이 바로 이 제련과정이라 하겠다.


● 자기 공부(수행력)의 점검은 불경을 통해 하라

선지식 중에 최고 선지식이 부처님 경전이다. 지금 유명한 선지식이 있다 해도 부처님의 경전보다 더한 선지식이 없지 않은가.


"자기가 불경을 못 볼 경우에는 어떡합니까"라고 하는데, 그럴 때는 눈 밝은 지도자를 찾아가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도(外道:불법을 섬기지 않는 무리)가 된다. 깨달았다 해도 인가(印可)를 받지 않으면 외도다. 육조 스님도 깨닫고 나서 오조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고 증도가(證道歌:도를 깨달은 노래)를 쓴 영가 스님도 육조 혜능 스님을 찾아 가서 인가를 받지 않았는가. 영가 스님이 육조 스님에게 가서 법문답을 해보니 막상 육조가 영가보다 나은 게 없었다. 그래도 그 감정(인가)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각자가 스스로 선지식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은 말법시대(末法時代)라 마강법약(魔强法弱:법은 약하고 마구니가 강하다)하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스승의 맥을 잇다

각성 스님은 탄허(呑虛) 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탄허 스님은 평생을 강원도 월정사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길러 낸 당대의 고승이다. 한암(漢岩) 스님의 맥을 이은 탄허 스님은 그 법을 각성 스님에게 물려준 것이다. 한암-탄허-각성으로 이어지는 법맥이다. 탄허 스님은 유불선(儒彿仙)에 통달한 석학이다. 각성 스님도 스승의 그런 법을 이어 받았다.


탄허 스님이 화엄경 80권을 전부 번역·해설할 때다. 각성 스님은 그 때 증의(證義)를 맡았다. 증의는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제대로 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역할이다. 각성 스님은 스승 탄허 스님의 한문 원문의 현토(懸吐:한문에 토를 다는 일)는 고침이 없었고 단지 번역·해설한 문장에는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탄허 스님도 각성의 이의를 받아들여 당신이 한 번역·해설을 고쳤다고 한다. 이 때가 각성 스님이 33세. 그 때 이미 각성은 스승 못지 않은 밝은 눈을 지닌 대강백이었다.


● 공부하다가 물러나려는 마음, 곧 퇴굴심(退屈心)이 들 때는 더 열심히 불경을 보라

각성 스님이 후학에게 당부하는 말은 '열심히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이 전부다. 공부하다 물러날 마음이 들면 들수록 마음을 다그쳐 더 열성을 내어 공부하라는 말이다.


20여 세 때 각성 스님에게도 퇴굴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때 그는 불경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통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게 되고 마음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불제자는 부처님이 스승이요 불경은 부처님의 일러주신 말씀이니까 그에 따라 수행하면 퇴굴심도 어느듯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거다.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을 믿고 따르고 수행을 철저히 하는 것만이 수행자의 보람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 나는 도저히 참선은 못하겠다는 불자는 염불을 하라

참선이 잘 안되고 참선에 매력도 없고 얻는 바가 없다고 느껴질 때엔 염불을 하는 게 좋다. 참선은 자력으로 성불에 이르는 길이요 염불은 타력(他力)이라고들 한다. 본래는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지만 범부(凡夫)에게는 자·타가 엄연하다. 그러니 자력으로 공부의 진척이 더딜 때는 타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염불은 불보살의 위력을 비는 타력이다. 참선과 염불은 그 신앙은 같으나 가는 길은 다르다. 아미타불 염불이 좋은 방법이다.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범어 '나모스(NAMOS)'의 음을 빌어 적은 것이요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아미타바 붓다(Amitabha-Buddha) 아미타유스붓다(Amitayus-Buddha)이다. 아미타바붓다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번역하며 아미타유스붓다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번역한다.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님, 한량없는 생명의 부처님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중생의 번뇌의 어두움을 밝히는 한편 한량없는 생명을 지녔기에 생멸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나무아미타불은 무한한 광명, 무한한 생명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 과욕·허욕·과대망상을 버려라

요즈음 모두들 제 잘 났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과욕·허욕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청정하게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서 노력하면 어려움도 쉬움으로 바뀔 수 있다. 본래 내가 부처라는 긍지를 갖고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한다면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어리석음에 빠뜨리지 않게 하는 게 아닌가!



각성 스님은?

1937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955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도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탄허 스님 밑에서 수학.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백양사 은해사 불교전문강원 강주를 역임하고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및 증의위원이다. 지금은 부산 화엄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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