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制髮)
삭발은 출가정신의 상징이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는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어야 한다고 율문(律文)은 규정하고 있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가 머리를 깎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다른 종교의 출가 수행자와 모습을 다르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 번뇌를 단절함을 뜻한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불교의 수행자 말고도 집을 떠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전은 이들을 외도(外道)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은 자신의 교단을 외도들의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은 머리와 수염을 깎도록 했다. 율문은 출가자가 머리와 수염, 손톱을 기르는 행위를 승모(僧貌)에 어긋난다 하여 금하고 있다. 삭발은 처음 출가할 때 하고 그 뒤부터는 보름마다 한 번씩 깎는 것이 통례다. 삭발은 다른 말로 체발(剃髮) 또는 낙발(落髮)이라고도 한다. 낙발은 세속적 번뇌의 소산인 일체의 장식(裝飾)을 떨쳐 버린다는 의미에서 낙식(落飾)이라고도 한다.세속적 번뇌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출가인의 삶이다. 부처님은 세속적인 번뇌와 얽매임을 단절하려는 결단의 상징으로 머리를 깎게 했다. 출가인이 머리모양에 연연하는 것은 출가의지를 흐리게 하고 무명(無明)을 증장(增長)시킨다 하여 머리털을 무명초(無明草)라고까지 했다.
삭발과 그 의미
큰절의 목욕일은 보통 음력으로 보름전날과 그믐 전날로서(일부 사찰에서는 한달 두 번으로는 모자란다며 열흘에 한번으로 조정하기도 하고 대부분 사찰 안에 있는 욕실을 이용하지만 날짜만 지키면 장소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날은 바로 삭발(削髮)목욕일이다.
이날이 되면 아침 공양을 마친 스님들은 욕실로 가서 앞뒤로 두 줄로 서는데 앞줄은 웃옷을 벗고 앉고 뒷줄의 스님들은 그 뒤에 선다.
삭발목욕을 하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 측면에서 볼 때 삭발은 스님과 동의어다. 그 때문에 ‘머리 깍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스님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청의삭발’(靑衣削髮)의 재소자나 ‘까까머리’ 중학생도 ‘헤어스타일’은 같지만 삭발은 스님들만의 독특한 표상이다.
다른 모든 종교가 머리카락을 신성시하며 애지중지 하는 것과 달리 불교는 삭발을 고집하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생겨난 오랜 전통이다.
최초의 삭발자는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다.
부처님은 출가를 결심하고 궁을 빠져나오자 마자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냥꾼이 입고 있는 옷과 바꿔 입는다.
〈과거현재인과경〉(因果經) 2권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태자가 ‘이제 수염과 머리를 깎았아오니 일체 번뇌와 죄장을 끊어주소서’라고 말하자 인드라는 머리칼을 받아 떠나갔으며 허공에서 여러 하늘이 향을 사르고 꽃을 흩으면서 ‘장하십니다’ ‘장하십니다’ 라며 찬탄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은 인드라가 삼십삼천에 모셨다고 한다.
여러 제석천인들이 찬탄할 정도로 삭발 출가는 성스럽고 귀한 일이라는 것을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 뒤 삭발은 계율이 되었다.
〈사분율〉(四分律) 잡건도 1을 보면 부처님이 머리가 긴 어떤 비구를 보고 “깎으라. 스스로 깎든지 남을 시켜 깎든지 하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인 〈장아함경〉 ‘사문과경’ 제8에서는 부처님이 아사세 왕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출가 사문이 되는 것을 ‘수염과 머리를 깎고 삼법의를 입고 집을 나가 도를 닦아’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출가자의 위의가 삭발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분율〉이 부처님 입멸후 100년 뒤 쓰여졌고 ‘아함’이 원시불교 경전인 점 등을 감안할 때 부처님 재새시부터 삭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 삭발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사분율〉 잡건도분에는 수염과 머리를 기르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사문을 보고 “그렇게 하지마라”는 부처님의 경책 장면이 나온다.
계율은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부처님이 일러주신 것이 모여 나중에 집대성된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에는 삭발이 전 비구들에게 숙지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님의 상호가 삭발이 아니라 곱슬이나 물결머리 형인 것도 의문을 가질만하다.
부처님 32상호중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은 곱슬머리를 말한다.
이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부처님 입멸 후 500여년이 지난 뒤 처음 탄생한 불상은 그리스 미술의 산물이다.
그래서 당시 불상은 그리스인들의 물결모양의 머리형을 하고 있다.
영웅이나 성자의 머리를 물결형으로 조각하는 간다라 미술의 영향으로 부처님만의 독특한 상호가 생겨난 것이다.
후대 제자들이 인도에서 죄인들의 머리형인 삭발을 부처님에게 적용하기 난감했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번뇌의 표상으로 본다.
마음속의 번뇌가 머리카락으로 드러난다고 여긴다.
그러면 머리를 깎으면 번뇌가 사라지는가.
그건 아니다.
일종의 비유다.
깎아도 깍아도 자라는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번뇌와 닮았다.
불교에서는 그래서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부른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점도 삭발 이유다.
신체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버림으로써 소유욕을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추정도 가능하다.
인도에서는 죄인들에게 삭발을 시켰다.
계급제도를 부정하고 인간 본위의 가르침을 폈던 당시 불교도들은 죄인들의 머리형을 함으로써 평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삭발은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수행자에게 있어 최초의 삭발은 출가다.
그것은 지난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이다.
과거의 습성 관행 심지어 혈친 까지도 절연하는, 철두철미한 부정이다.
단절과 부정의 기의(記意, signifi)는 삭발이라는 기표(記表, signifiant)를 통해 한 인간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 의식이 예사로울 수가 없다.
선배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은사스님이 손수 머리를 깎는다. 삼귀의 반야심경 등을 봉송한뒤 삭발 전에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
태산처럼 짓누르는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머리칼이 한올씩 잘려나간다.
발심이 곧 성불이라는 의미의 집도게(執刀偈)가 울려퍼진다.
“보전에 주인공이 꿈만 꾸더니/ 무명초 몇해를 무성했던고/금강보검 번쩍 깎아 버리니/ 무한광명이 대천세계 비추이네 寶殿主人曾作夢 無明草茂幾多年 今向金剛鋒下落 無限光明照大千 ”
삭발은 한 달에 두 번 한다.
이는 한달에 두 번 즉 15일, 30일 또는 14일 29일에 모여 포살을 해야 하는 불교 계율에 따른 것이다.
포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빔비사라왕의 권유를 받아들여 외도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인데 대중들이 모여 허물을 드러내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포살에 앞서 삭발 목욕으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데서 삭발일이 정해졌다.
포살이 보름과 그믐이기 때문에 이에 하루 앞선 14일과 29일이 보통 삭발 목욕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통은 한동안 퇴색했다가 봉암사 결사 후 다시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 노스님은 “성철 자운스님이 봉암사 결사 당시 포살 법회를 개설하면서 삭발 목욕 전통도 되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성철 자운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는 지금도 이 전통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다.
한달에 세 번 실시하는 사찰도 있고 규모가 적거나 대중이 적은 말사 등은 개인 자율에 맡기는 등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삭발일이 되면 큰 절에는 아침 일찍부터 2인1조가 되어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보통 어른스님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내려간다.
머리를 깎다보면 상처가 나기 쉬워 잘 깎는다고 소문난 몇 명이 도맡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삭발하는 날 점심에는 머리를 깎으면 기가 위로 모인다고 해서 기를 내리는 찰밥을 먹었다.
또 해인사는 영양보충을 위해 ‘두부갈비’가 나왔는데 스님들은 이를 두고 ‘골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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