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불교의 식생활

難勝 2010. 9. 17. 06:40

 

 

불교의 식생활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병에 시달리고 있다. 종래에는 성인들에게 많이 보이는 병들을 ‘성인병’이라 불렀지만, 요즘은 그것을 ‘생활습관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현대인의 생활 습관 그 자체가 온갖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병이 습관으로부터 생겨났으므로 병을 고치는 것 또한 습관을 바꿈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현대인들의 병을 치유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제 식습관에 관한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음식을 대하는 자세이다.

 

본래 불교의 출가 수행자는 탁발(托鉢)을 원칙으로 하였다. ‘비구’라고 하는 명칭도 ‘걸식하는 이[乞士]’라는 뜻이다. 즉, ‘위로는 법(法)을 아래로는 밥을 구걸하는 이’가 곧 출가 수행자인 것이다. 재가자들은 밥을 베풀며 자신의 복을 비는 대신, 출가자는 재가자들에게 밥을 구걸하고 법을 베풀어준다. 불교도 뿐 아니라 자이나교도 같은 인도의 수행자들은 모든 집착을 버리는 두타행으로서 탁발을 해왔다. 탁발은 수행자 자신의 아만을 버리는 행위인 동시에 공양 올리는 이들에게는 복을 지을 기회[福田]를 제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탁발할 때에는 한 집도 ‘빠짐없이’ ‘순서대로’ ‘일곱 집’을 들러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즉, 모든 재가자들에게 복을 지을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한다는 뜻이다. 음식의 좋고 나쁨이나 많고 적음의 여부에 관계없이 탁발해온 음식을 다시 모두 모아서 승가의 구성원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고대 승가의 규율이었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지금도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행해지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선종의 백장청규가 행해진 이후로 사원에서 경제적 자립과 동시에 식생활 또한 자급자족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왔다. 이것은 인도불교사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중국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의 오랜 억불정책과 일제강점기 이후 외래 종교가 급속히 전파되면서 탁발 본연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점차 사라져 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얻어진 음식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옛부터 행해져온 발우공양법 가운데 잘 설해지고 있다. ‘발우(鉢盂)’란 원래 범어 파트라(patra)의 중국식 표기인 발다라(鉢多羅)의 준말로서 ‘발(鉢)’이라고 했는데, ‘그릇’이라는 뜻의 ‘우(盂)’가 붙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바루’ ‘바리’ 혹은 ‘바리때’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또한 ‘응기(應器)’ ‘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하여 ‘수행자에게 합당한 그릇’이라는 뜻을 지닌다. 불가(佛家)에서 ‘발우공양’이라 불리는 일련의 식사 과정은 그대로 수행 그 자체이다. 공양시에 읊는 《소심경(小心經)》에는 발우공양의 정신이 명료하게 설해져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읽혀지는 구절이 오관게(五觀偈)이다. ‘이 공양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 없애고/ 이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받습니다.’ 즉, 첫째로 공양이 온 인연을 살피고, 둘째로 공양받는 이의 자격을 살피며, 셋째로 모든 탐욕을 살펴 버리고, 넷째로는 음식을 다만 약이라고 살피며, 다섯째는 오로지 도업을 이루리라는 서원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것이다. 이 짧은 게송에는 연기법에 근거한 불자(佛子)의 식사 태도가 집약적으로 설해져있다. 출가수행자 뿐 아니라 재가의 모든 불자들도 매 식사시마다 반드시 이 게송을 읊음으로써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고자 하는 서원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음식을 먹는 방법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일체 제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또 식(食)으로 인해 사라진다’고 하였다. 건강한 몸이나 바른 생각, 바른 정진력 등도 모두 바른 식생활로부터 생겨나고, 또한 건강하지 않은 몸이나 바르지 못한 생각등도 또한 바른 식생활로 인하여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생활에 대한 조항들을 엄격하게 계율로 정해놓으셨다. 그 중 가장 큰 원칙이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수행자는 정오에서 다음날 일출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조항이다.(천신은 아침에 먹고, 수행자는 정오에 먹고, 동물은 오후에 먹으며, 귀신은 밤에 먹는다고 한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를 하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때아닌 때에 먹지 않는다’는 이러한 원칙은 과식으로 인하여 갖가지 병을 초래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실제로 음식을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현대인들은 불교적 방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발우공양’의 실제에 관한 것이다. 발우에도 개수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4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진 것을 쓰고 있다. 수많은 대중이 모여 각자의 발우를 내려 펼쳐 밥과 국, 반찬을 배식하여 먹는 모든 과정에서 오로지 게송 읊는 소리 외에는 고요함 그 자체이다. 자신의 양에 알맞게 음식을 받는데, 그것은 눈으로 음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이 없는 선정의 마음으로 양을 가늠하니 결코 ‘과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발우공양을 하면 평소 우리 마음에 욕심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 뜻이다.

 

또, 발우를 씻어 그 물까지 모두 마시는데, 그 물에는 어떠한 티끌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발우 공양이 끝나면 각자의 발우에 남는 음식이 전혀 없음은 물론 설거지까지 그 자리에서 모두 마쳐진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발우를 제자리에 올려 놓는 것으로 발우공양의 전과정이 끝난다. 이러한 식생활문화는 기독교나 천주교와 같은 타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관심을 끄는 것일 뿐아니라, 음식물찌꺼기에 관한 환경문제 해결에도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끝으로, 먹거리의 내용이다.

 

「사분율」에 의하면, ‘때에 맞는 음식’을 먹으라고 되어 있다. 즉, 아침은 죽식, 점심은 딱딱한 음식, 저녁은 과일즙 등이 그것이다. 아침의 죽식에 대하여, 「사분율」에서는 다섯 가지 공덕을 말한다. ‘죽식(粥食)은 공복감을 없애고, 갈증을 없애며, 소화를 원활하게 해주며, 대 소변을 잘 조절해주고, 풍(風)을 없애준다.’ 아침 식사 외에도 단식수행이나 면벽참선 등의 용맹정진 후에는 반드시 ‘죽’이 나오는데, 이처럼 ‘죽’은 대표적인 선식(禪食)으로 손꼽힌다. 오후불식과 더불어 아침의 ‘죽식’은 ‘소식(小食)’이라는 불가의 식생활 원칙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낮에는 활동량이 많을 뿐 아니라 위장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때이므로, 딱딱한 음식을 권하셨다. 아울러 ‘과식'을 하거나 잠자기 두 시간 전에 먹는 음식은 독약과 같다’고 하여 저녁에는 과일즙을 먹으라 하셨다. 과일즙은 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안의 섬유질이 아침과 낮에 먹은 음식의 배설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살생’의 계율에 의거하여 육식은 절제하고 채식을 권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탁발에 의한다면, 재가자가 공양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받는 것이므로 온전한 채식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현재 남방의 수행센터에서도, 순전한 채식을 하는 그룹과 육식을 가리지 않는 그룹이 혼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으로 오면서 도가적 풍토와 습합되면서 순전한 채식주의가 강화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육류는 채소보다 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배설이 원활하지 않으므로 갖가지 병을 유발하고 가스발생으로 인하여 머리도 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채식위주의 사찰음식이 현대인의 ‘생활습관병’을 치유하는 데에 너무나 좋은 방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불교의 식생활은 발우공양과 같이 온갖 욕심을 버린 상태에서 채식을 위주로 하는 소식(小食)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것은 곧 개개인의 한 몸을 맑히는 수행인 동시에 현대의 환경문제와 생활습관병을 개선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