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죽 한 그릇

難勝 2010. 10. 2. 09:26

 

 

죽 한 그릇(粥一器)

김병연(金炳淵) 1807~

 

四 脚 松 盤 粥 一 器 (사각송반죽일기)

天 光 雲 影 共 徘 徊 (천광운영공배회)

主 人 莫 道 無 顔 色 (주인막도무안색)

吾 愛 靑 山 倒 水 來 (오애청산도수래)

 

소반 위엔 머얼건 죽이 한 그릇

뜬구름 그림자가 함께 오가네

주인은 무안해서 쩔쩔매노니

나야 본시 풍류객 상관이 있소.

 

김삿갓이 방랑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 날 산길을 가다보니 좀처럼 끼니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긴 방랑객이니 유리걸식이 제격입니다. 그날도 몇 고개를 넘어 산골의 어느 외딴 오막살이집 앞에 다다랐습니다. 아침도 굶은 김삿갓입니다.

시장기를 참기 어려워 염치없이 끼니를 구걸하자 소복한 여인이 나와 맞이합니다.

아마 남편과 사별한 청상(靑孀)인가 봅니다. 가난한 여인은 낯선 객에게 점심상을 차려다 놓기는 했지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소반(松盤) 위에는 맹물같이 멀건 죽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그 죽(粥)이란 게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그림자가 둥둥 떠다니는 게 비칠 정도니 말이 죽이지 낟알 하나도 제대로 찾아 볼 수 없는 맹물 같은 죽입니다.

비록 과객일망정 흰밥을 대접해야 도리인데 잡곡밥도 아닌 숭늉같은 죽이라니, 여인은 차마 거절을 못하고 손님을 드리기는 했지만 손님대접이 말이 아니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합니다. 모두가 가난한 탓입니다.

 

남정네가 있어도 빈한한 그 시절 홀로된 여인네가 살아가자니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석 끼니조차 죽으로도 연명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지금 같은 인심이라면 모르는 집에가서 맹물 한 모금도 얻어먹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여인은 비록 가난해도 바른 예의이나 고운 마음씨는 푼푼하기가 부자에 비길바가 아닙니다.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드는 여인에게 도리어 김삿갓은 위안을 합니다. 진수성찬보다 따뜻한 정이 고마울 뿐입니다.

음식가지고 탓할 그런 편협한 김삿갓이 아닙니다.

그 고운 마음씨, 훈훈한 인심이 끔찍이 고마울 뿐입니다.

멀건 죽 한 그릇이 맑은 강에 푸른 산이 누워서 출렁이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비치어 다가옵니다. 김삿갓에게는 죽그릇이 아닙니다.

오히려 햇빛과 구름과 경치가 잠긴 호수입니다.

이런 풍광을 사랑하는 풍류객이라며 부인에게 위로를 합니다.

정겨운 장면입니다.

 

정숙한 여인과 식객이 죽그릇을 사이에 두고 시심(詩心)이 교감(交感)하는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이라면 시 한수는 천금에 해당하고 죽 한그릇은 진수성찬보다 더 값집니다. 풍류객과 심성고운 여인의 만남으로 「죽 한 그릇」이라는 시가 빚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지금까지 오르내리게 됩니다.

 

이를 일러 인정이 풍요로운 사회라 하겠고 이들을 일러 정숙한 여인과 풍류의 시심(詩心)이 교합하는 눈물겹고 흥겨운 장면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김립(金笠)은 역대 시인들의 애환을 주제로 많은 시를 남겼으니 때로는 따뜻한 정에 울어야 했고 때로는 냉대에 울어야 했습니다.

 

평생을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겪은 희로애락을 담은 그의 해학적인 표현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김병연(金炳淵 ; 1807, 순조 7~1863, 철종 14)

- 조선 순조*철종 연간의 방랑 시인.

일명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호는 난고(蘭皐). 본관은 안동.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811(순조11)년 홍경래의 난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됨.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그곳에서 공부를 하며 성장.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스무 살이되던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

그는 항산 큰 삿갓을 쓰고 얼굴으 가리고 다녔으므로 김삿갓이라 불리웠고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작품이 뛰어나 民衆詩人으로도 불림. 방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객사(客死).

작품집으로는 "김립시집(金笠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