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중양절(重陽節)의 유래와 안민가(安民歌)

難勝 2010. 10. 10. 05:51

 

음력으로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입니다.

‘9’가 겹쳐서 중구(重九)로도 부르고 양수인 홀수가 겹쳐서 중양이라고 합니다.

3월 삼짇날, 5월 단오, 7월 칠석도 이와 같아 삼짇날을 중삼, 단오날을 중오로 부르기도 합니다.

중양을 달리 구월 귀일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구월 구일을 편히 발음하면서 만들어진 별칭입니다.

 

이웃나라인 중국에서는 요즘에도 중양절을 큰 명절로 여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양절을 명절로 기념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옛 전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절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래 전에는 차례(茶禮), 천도재, 방생, 점찰법회 등이 중양절에 즈음하여 행해졌지만 이러한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사찰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양절은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친숙한 면을 지니고 있기도 한데 예를 들면 계절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새인 ‘제비’는 봄인 삼월 삼짇날 와서 9월 귀일 중양절에 강남으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중양절과 직접 관계는 없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제비하면 제일감으로 떠오르는 고전 「흥부전」은 불교경전 「현우경(賢愚經)」의 ‘선구악구설화(善求惡求說話)’, 「잡비유경 雜譬喩經」의 ‘파각도인설화 跛脚道人說話’를 바탕으로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불교적 가치관을 지닌 소설이라고 하니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질로 자리 잡고 있는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양절을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국화와 유자를 이용한 음식을 들 수 있습니다. 국화는 차나 술, 혹은 전(煎)으로 만들어서 즐겼는데 봄의 화전(花煎)재료로 진달래가 쓰였다면 가을 화전놀이의 재료로는 국화를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민간에서는 국화로 빚은 국화주가 절기음식으로 유행이었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차로 만들어 즐겼다고 합니다.

 ‘다경(茶經)’을 지어 차의 명인으로 숭앙받는 ‘육우(陸羽)’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최초로 ‘다도(茶道)’란 말을 써서 차인들에게는 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는 중국 당나라의 고승 ‘교연(皎然)’스님이 지은 '중양절에 육우와 차를 마시다'란 시에 보면 절에서 즐긴 국화차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일산승원(九日山僧阮) 동리국야황(東籬菊也黃)

 속인다범주(俗人多泛酒) 수해조다향(誰解助茶香)

 

9월 9일 중양절 산사에 동쪽 울타리 국화가 노랗다

속인들은 국화를 많이 술에 띄우지만 국화가 차의 향기를 돕는 것을 누가 알리요

 

 

얼마 전 극장에서 상영했던 중국의 장예모 감독의 ‘황후 花’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데 화려한 영상미로 장안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甲)’인데 출전은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일어났던 '황소(黃巢)의 난' 을 일으켰던  황소가 쓴 ‘부제후부국(不第後賦菊)’이라는 시라고 합니다.

 

 

 대도추래구월팔(待到秋來九月八) 아화개후백화살(我花開後百花殺)

 충천향진투장안(衝天香陣透長安) 만성진대황금갑(滿城盡帶黃金甲)

 

가을 되어 9월 8일 기다려 왔노니 내 꽃이 핀 뒤에 온갖 꽃은 시들리

하늘 찌를 한 무리 향 장안에 스며들어 온 성 안 모두가 황금갑옷 둘렀네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가 구월 귀일 중양절에 절정을 이룸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시를 지은 황소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운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으로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측천무후는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 칭했고 국호도 당에서 대주(大周)로 바꾸고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고 합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에 황제로 등극한 측천무후는 정적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것으로 유명한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라운영을 잘함은 물론 불교를 중흥시켜 수많은 절과 스님들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당태종의 ‘정관의 치’와 더불어 '무주의 치(武周之治)'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아쇼카왕이 잔인한 정복왕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왕(護法王)이 되었고, 중국에서는 측천무후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등극한 조선의 세조가 유사한 인생경로를 밟아갔음은 재미있는 역사의 공통점이 아닐 없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에 보면 「표훈대덕(表訓大德)」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한 지 24년 되던 해(765) 삼짇날(음력 3월 3일)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왕이 능력있는 스님을 데려오라 하자 위의(威儀)를 갖춘 큰스님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왕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내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衲衣)를 걸치고 앵통(櫻筒) 혹은 삼태기를 걸치고 오는 모습을 보고 기쁜 표정으로 누상으로 인도했다.


왕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충담(忠談)이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삼화령(三花嶺)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엇하고 오시었소?"

"저는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달여서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님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한 잔 주겠소?"

"물론이지요."

스님이 차를 달여 왕께 드렸는데 맛이 신묘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내 듣건대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가 뜻이 깊다는데, 나에게도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살 노래를 지어줄 수 없겠소."

스님은 그 자리에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임금은 아버지이고

신하는 사랑을 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할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라.

 

 

안민가 가사구절처럼 우리 불자들이 저마다 자기다웁게 마음살림을 잘 차리면 결국 온 세상이 평안해짐을 생각하면서 가을 들녘에 가득히 핀 국화처럼 구월 귀일 중양절을 맞아 마음이 풍성한 부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