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파주 보광사 소령원에 얽힌 전설

難勝 2010. 10. 9. 07:21

 

 

파주 보광사 소령원에 얽힌 전설

 

영조는 숙종대왕의 후궁인 숙빈 최씨로 부터 서기 1694(숙종 20)에 탄생하였으며 1719(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49세로 서거했다.

영조대왕은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별궁과 같이 사냥을 취미삼고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녔다.

따라서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미리 산을 지나다 보니 초라한 장례로서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에게 사연을 물은즉 원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사연인 것이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즉 이 아래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는 것이었다.

상주가 너무나도 양심이 바르며 겸손함을 본 영조대왕은 가상히 생각하고 내가 이 뒤에다가 산소를 다시 잡아주도록 하여 줄 터이니 서슴치 말고 추진하라 하고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 냥을 보내라고 편지를 써서 별궁에게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대왕께서 산을 내려와 선비를 찾아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느냐고 묻자 이 선비 말이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하니 영조대왕께서 깜짝 놀라면서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를 하고 돌아가면서 생각하기를 명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최씨가 서거하자 각지 에서 명사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되었으나 영조대왕은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이다.

 

영조대왕은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여 사친 묘전에 묘막을 짓고 친필로 묘비를 세워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느날 궁궐에 들어가고 싶어 차비를 갖추고 떠나 지금의 파주시와 고양시 경계인 혜음령 고개를 넘으려 하던 중 궁궐에서 내려온 관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 고개에서 서기 1724년(경종 4) 영조 임금으로 추봉되는 왕명장을 받게 되어 이 고개를 수령령(授令嶺)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영조대왕은 사친 숙빈 최씨 묘소인 소령원 근방 전주민들에게 철거령을 내려 수렵장 및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한편, 영조대왕은 즉위후 묘소 동남편에 친필비각을 네 곳에다 세웠다고 하며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광사를 중수하는 한편 어실각을 짓고 매년 백중날 절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또한 고양리 벽제관에서 보광사를 넘어 다니는 가파른 고개길을 더 파서 얕이라고 어명을 내리니 이 고개가 더파기 고개인데 임진왜란 당시 사명 대사가 이끌었던 승병 수백명과 이여송제독이 지휘하던 청나라 지원군 수만명이 왜군에게 몰살당하게 되니 승병·청병들의 수많은 시체가 고령산 전역을 거쳐 늘비하였다 하며 더파기 고개에 더욱 많아 후에 되박고개라 개칭하게 되었다 한다.

 

영조는 소령원 자리를 잡아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하여 궁궐로 초대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얼만큼 맞추나 시험하기로 하였다.

 

영조대왕은 경기도 일대에 명당자리가 몇 군데 있느냐 하고 물으니 어디는 정승 날 자리, 어디는 판서 날 자리 등등 수십군데를 마구 지껄이고 있어 역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명지사임이 틀림없고 학문에도 뛰어나 유능한 인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한번만 더 시험 하리라 생각하고 별궁을 시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용상 밑에 감추고

“이 번 질문을 맞추면 큰 벼슬도 주고 후사할 것이나 만약 맞추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하며 하문하기를,

짐의 용상 밑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고 하자 이 선비는 한참 생각한 뒤에 쥐가 들어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니,

아연실색한 영조대왕께서는 그럼 몇 마리가 들어있느냐? 하자 3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니 이놈 짐을 속이는구나 하고 이놈을 데려다가 참하여라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별궁이 달려와서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영조대왕은 이런 인재를 등용 정사를 맡기리라 생각하고 즉시 이 선비를 죽이라고 명한 것을 취하면서 별궁을 시켜 죽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별궁이 가보니 애석하게도 이미 죽은 후라 할 수 없이 돌아와서 그 사연을 고하니 영조대왕은 깜짝 놀라며 짐의 잠깐 실수로 나라의 아까운 인재를 잃었노라며 애석해 하셨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추봉)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께서 이래도 능으로 책봉 못하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 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한다.

 

어느날 먼동이 틀 무렵 순회를 돌다가 무악재에서 숯장사 김세휘(金世輝)라는 노인이 고개마루 에서 쉬는 것을 보고 그대는 뉘시며 어디에서 살며 무엇을 하느냐고 물은즉 노인의 대답은 양주 고령에서 사는데 가세가 빈곤하여 밤이면 능에 가서 참나무를 베어다가 숯을 구어 서울장안에 져다가 팔아 생계를 꾸린다고 하니 영조께서 고령능이라는 말을 백성으로부터 처음 직접 들으니 기쁜 마음으로 시종을 시켜 미행 하여 숯을 판 다음 몇 시경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명 후 환궁대기중 그 시각에 그 노인이 들어와서 부복하고 있는지라 영조께서 고개를 들라하니 마지 못해 숯 장사 노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새벽에 만난 분이라 얼굴이 파랗게 질리어 목숨만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안유를 시키면서 편전으로 들게 했다.

 

영조께서 술을 나누면서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이니 숯 장사 노인에게 말하라 하니 그 노인은 벼슬자리를 달래지도 못하고 소원은 대대손손(代代孫孫) 능세원(능에서 나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하게 해달라고 하자 특명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작위를 내리시고 대대로 능세원을 지내게 되었다 하며 현재 영장리에 김해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의 8대손이 된다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 (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