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선사와의 백문백답
問 : 스님 평상심(平常心)이란 무엇입니까?
答 : 평상심이라는 것은 일체의 추번뇌·세번뇌(序·細煩惱) 가 항복 받은 상태에서 바로 쓰는 것, 다시 말하면 추 번뇌, 세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직관하는 그곳에서 용심(用心)이 나오는 것, 그것이 참으로〈평상심〉이다. 중 생들의 추번뇌, 세번뇌에서 나오는 것은 망상심에서 나타나는 평상심이니 망식 평상심이고 전자는 순수한 평상심을 말하는 것이다.
問 :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입니까?
答 : 일체 번뇌가 없이 순수하게 추번뇌, 세번뇌의 끄달림 을 받지 않고 용심(用心)을 나타내는 것, 이것을 일러 <평상심이 도(道)>라 한다.
問 : 육도윤회(六道輪廻)는 무엇입니까?
答 : 생각이 자꾸 소용돌이치고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이 윤 회다. 부처님께서는 윤회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정지시킬 때 본연 도리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고 윤회 가운데도 고와 낙의 상반된 것을 초월해서 사는 방법 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問 : <생사가 둘이 아니다>라는 것은 번뇌가 쉬기만 하면 윤회가 없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 하는 것입니까?
答 : 윤회에 끄달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問 : 깨닫고 나면 생각 작용이 없는 것입니까?
答 : 중생의 망식(妄識)은 티끌도 없는 것이다. 망식 그대로 보리(菩提)가 되는 것이다.
問 : 깨달은 사람의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망식으로 뛰는 생각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까?
答 : 말로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억지로 비유한다면 탁 한 물을 증발시켜서 수증기가 되었다면 탁수하고 수 증기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수증기는 혈관에 넣어도 되고 탁수는 입에만 넣어도 설사가 된다. 엉뚱한 소견 에 떨 어질까 봐 억지로 비유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부족 하고 맞지 않는 것이다.
問 :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입니까?
答 : 다 똑같다. 제법무아, 열반적정, 제행무상은 모두가 다 같은 말이고, 다만 표현만 달리한 것일 뿐이다.
問 : 욕심과 탐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욕심〉이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탐심〉 이라는 것은 탁한 경계를 말한 것이다. 욕심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땅에 엎어져있는 사람이 땅을 짚고 일 어서는 것에 쓰는 것이다. 부처님법은 욕심도 붙지 않 는 경계다. 지금의 하고자 하는 번뇌는 모두 항복 받 아야 하니까 탐심이 욕심에 속하지만 탁하고 덜 탁하 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問 : 소유욕이란 무엇입니까?
答 : 가지고 있는 생각을 소유욕이라 한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소유욕에서 천천히 멀어지는데, 가지고 있되 가 지고 있다는 집착이 멀어진다.
問 : 소유욕과 탐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答 : 수행에 따라 다르다. 수행이 깊어지면 탐심이 자꾸 멀어진다. 하고자 하는 욕심까지도 같이 멀어진다. 나 중에 가서는 용심(用心)이 확 변할 때 하고자 하는 그것은 전혀 없고 도(道)의 용심(用心)으로 변한다. 그 러나 겉으로 쓰는 것은 <하고자 하는 작용>으로 보 이지만 전혀 다르다.
問 : 불교를 믿는 입장과는 다르게 기독교에선 자기들이 제 일이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 : 제일인 까닭과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데 분명한 것이 없어서 제시하지 못한다. 어느 외도(外道)든 간에 수승 한 것은 수승한 것인데 제시할 것이 없어 못한다.
問 : 기독교인이〈십일조〉를 바쳐 얻는 복력은 어떠합니까?
答 : 기독교의 칭찬할 점은 십일조를 받쳐서 많은 사람들에 게 이익을 주는 것인데 그만큼 복을 받게 된다. 하느 님을 믿거나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누구든 많은 중 생들에게 이익된 일을 하니 복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이다 . 불법을 믿거나 어느 것을 믿거나 인과법칙에 의 한 댓가이다. 인간성은 하락하는데 그에 비해서 복력은 증가할 수 있는 현상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뿌리를 흔들리게 하며 예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게 하고 있다.
問 : 금강경에 사상(四相)을 버리라 하는데 세속에 살면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答 : 정진해서 정(定) 속에서 살면 능히 응용해서 똑바로 지혜를 가지고 앞서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問 : 견성해야만이 사상(四相)을 여의는 것 아닙니까?
答 :그렇지! 견성해야 사상을 여의지. 정진한 지혜의 힘 으로 막 끌고 나갈 수 있는데 왜 못살아, 더 잘 살지, 멋지게 살지!
問 : 아상(我相)의 뜻은 무엇입니까?
答 : 번뇌에 끄달려 사는 것을 아상이라 한다.
問 : 인상(人相)은 무엇입니까?
答 : 인상도 마찬가지다. 아상은 전오식(前五識)이 되고 인상 은 6식(6識)이고 중생상은 칠식(七識)이고 수자상(壽者 相)은 팔식(八識)이다.
問 : 정진할 때 망상을 분석하여 보면 과거 흘러간 망상이 많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答 : 화두타파 전에는 간간히 화두의정 사이에 끼어 들어오 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상이다.
問 : 대신심이란 무엇입니까?
答 : 한번 좌선을 할 때 수미산처럼 움직일 줄 모르고 오직 불조(佛祖)의 정진력을 본받아 정진하는 것이 대신심이 다. 그러나 진정한 대신심은 견성을 해야 대신심이라 할 수 있다.
問 : 대분심이란?
答 : 부모 죽인 원수처럼 분한 마음을 가지고, 영겁의 생사에 윤회하여 왔는데 바른 법, 바른 선지식을 만나고도 허 송세월 한 것을 분하게 마음먹고 불퇴전의 마음으로 정 진하는 것이다.
問 : 대의정이란?
答 : 어두운 땅에 한 조각 밝은 빛을 향하는 것과 같이, 항아 리 가운데 달아나는 자라를 두러워 하지 않는 것과 같 이 망상이 일어나도 그대로 내버려두고 화두만 바르게 참구해 가는 것이다.
問 : 진언(眞言)은 타력이며 가피를 받는다는데…….
答 : 진언이라도 일심으로 열심히 하면 가피를 입게 되는데 하다 중단하기 때문에 별 효험이 없다.
問 : 법문하는 법이 있습니까?
答 : 항상 근본 진리 자리를 먼저 말하고 나중에 사변지(事 辨智)를 말할 것.
問 : 화두가 깊이 안 들어가는 것은?
答 :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問 : 지도층에 있는 40대 이상 수좌스님의 행동은?
答 : 1) 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만큼만 말할 것. 2) 법에 대한 것을 함부로 말을 할 경우, 경계가 드러나 면 중생이 얕볼 수도 있다. 3) 자기 정진만 열심히 하고 모두에게 노력하는 것만 보이면 된다. 4) 막행 막식은 절대 금물.
問 : 선지식이 수좌를 다루는 것이 쉬운가, 아니면 속인 참선 하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答 : 수좌는 속인보다 다루기가 어렵다. 그것은 각자 고집이 있어서…….
問 : 남자, 여자의 태어남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答 : 남자, 여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 사를 익힌 업에 따라서 여자를 좋아하면 남자로 태어나 고, 남자를 원하면 여자로 태어난다. 어머니를 탐하면 남 자로, 아버지를 탐하면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얼른 되 는 것이 아니라 늘 익혀온 것이라 자기의 관념이 들어야 하고 업도 익혀야 된다. 시험준비도 안 하고 별안간 시 험장에 가서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가?
問 :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란 무엇입니까?
答 :〈상구보리〉는 자기가 먼저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고, 그 노력한 만큼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하화중생〉 이다.
問 : 자기 정진보다 이 시대에는 포교부터 해서 중생구제를 해야 한다는데 옳은 말입니까?
答 : 그것도 치우친 말이다. 자기가 아는 것만큼 남에게 전해 주고 자기도 열심히 정진(精進)해 가면서 교화한다는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한다.
問 : 진짜 보리를 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 인데, 사람이 억지로 치우쳐 중생을 구하려고 하니까 또다른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答 : 그건 네 말이 옳다. 원칙은 자기가 할 일 하는 것이〈상 구보리 하화중생〉하는 것이지. 그러면 그대로 그 영향 을 미칠 수 있다. 자기가 전단향을 만들면 그만큼 그 향내를 피우게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참으로 보살행을 하 는 것이다.
問 : 옛날에는 선방 수좌스님이 어느 정도의 수행을 하고 40 세가 넘어서는 인연 따라 포교를 맡는데 요즘에는 20· 30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스님들이 자기 정진할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포교에 힘을 쓰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答 : 고래(古來)로 그렇게 해왔지만 요사이 외도들이 범람하 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방어해야 되는데 이 문제가 크 다. 앞으로는 수행에 장애까지 들어오는 시기가 되기 때문에 이것부터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서산(西山)스님이 왜적을 방어했듯이 지금 그 런 사태다. 방어해가면서 수행을 열심히 할 분은 하고, 서산스님 당시에도 산중(山中)에서 열심히 수행해가면 서 기도하고 그런 스님 몇을 제외하고 전부 나와서 대 치했는데 지금도 그런 시절이다. 그러니까 젊은 포교사 들이 주장하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언제든지 시국에 따라서 표현하는 것이 다.
問 : 세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답게 사는 것입니까?
答 : 팔정도를 의지해서 <어떻게 하면 바로 살 것인가>하 고 바른 목표를 세우고 바른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다. 바르면 바로 자기 마음과 계합할 것이니까, 바른 데다 가치관을 두고 바른 것을 의지해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 하는 것이고 그러다가 바른 데 계합하는 것이 도통이 다. 바른 것을 아는 것이 도(道)다.
問 : 참선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수행자 같은 경우엔 선지식의 말씀을 가장 중요시하겠 지만 세속적인 경우엔 어떠합니까?
答 : 계는 지키는 것만큼 이익을 얻는 것이다. 계는 조도품 (助道品)이니까 철저히 지키는 것만큼 수확을 얻는 것 이다. 등한히 하면 그만치 노력의 수확을 덜 얻게 된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계를〈사다리〉라고까지 말씀하 셨 다.
問 :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하는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答 : 출가해서 수행하는 것은 일도양단해서 용맹심을 내는 것과 같고 재가자들은 그 다음의 역할로 전방군인과 후 방군인의 비유를 할 수 있다. 전방군인은 조금의 흐트 러짐이 없이 번뇌망상과 화두타파의 승리를 해야하고 후방 군인은 여유가 조금 있다. 부부생활하는 데 있어서 두 내외가 다 신심이 있다면 별문제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정을 이루는 주인들이니까 상대방의 뜻을 맞추는 것 이 불자들의 사명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가 정불화가 일어나면 이웃에서 그것을 알고 <불법은 그런 것이구나>하고 모두의 복을 감하는 원 인이 된다. 재가 신도는 첫째 부부생활 하는 것이 주 (主)가 되니까 부인의 경우에는, 남편의 뜻이라면 더 받 들고 그 여가에 정진 을 해도 능히 해마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조도품(助道品)이 되는데 남편의 뜻을 거슬리면 그것이 불화가 돼서 공부 에도 장애가 오고 이웃에도 장 애가 되어 불법을 망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가정의 불 화가 절에까지도 영향이 미쳐 서 이웃 사람까지도 불법 을 멀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박복해지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 수행인을 후방군인이 라 한다.
※ 참선법을 만난 젊은 사람들이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자기의 진로 문제인데, 만나기 어려운 참선법을 만나서 출가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재가로 있으면 결혼을 해야하고, 결혼을 하면 어떤 사람과 만나야 하느냐가 근심거리인데 위 말씀으로 답이 되는 줄 알겠습니다.
問 : 스님께선 재가자의 독신(獨身)생활을 어떻게 보고 계십 니까?
答 : <수행을 한다> 하고 재가에서 독신으로 있으려면 출 가를 해야 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못쓰는 정신이 다. 재가에 있으면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을 잘 해나가 는 것이 재가제자의 사명이다.
問 : 출가하는데 근본적인 연령의 제한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점에 대한 의견은 어떠합니까?
答 : 고래(古來)로 제한은 없었지만 요즘은 제한이 있는 것으 로 안다.
問 : 출가는 인연 따라 찾아가야 합니까,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습니까?
答 : 첫째 해인사, 송광사 같은 총림이나 큰 회중에서 먼저 습의를 익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독살이 암자〉 같 은 데서 물이 들면 삿된 데로 빠질 수도 있다. 불법 중 에도 정법(正法)이 있는데 참선하는 수행정법 도량으로 가 서 행자 생활을 여법하게 하는 것이 낫다. 첫 입문(入門)이 중요한 것이다.
問 : 총림이나 큰 사찰이 아니고 인물중심(人物中心)으로 선 지식을 찾아가는 것은 어떠합니까?
答 : 어른이 계시는 곳이면 직접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좋은 것이다.
問 : 꿈과 잠의 차이는 어떠합니까?
答 : 꿈이라는 것은 팔식(八識) 작용이 잠재해 있다가 자기 생각이 더해져서 나타나는 것이 꿈이다. 잠이라는 것도 기관이 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問 : 정진을 많이 하면 꿈도 잠도 없어지고 화두만 일여(一 如)하다는데 어떻습니까?
答 : 꿈도 잠도 없어진다는 것은 망상에서 꾸는 꿈이 없 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첫 경계가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숙면을 취하기 때문에 꿈이 없어지는 것 이고 생각이 쉬어 들어가면 꿈이 없어진다.
問 : 수행자는 잠을 몇 시간 자야 합니까?
答 : 건강에 따라서 자야 한다. 많이 잘 필요는 없고 건강한 사람 기준 하여 6시간을 표준으로, 증감하면 된다. 젊은 출가자는 3∼4시간 자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問 : 잠도 하나의 습관입니까?
答 : 육신이 여우같아서 잠을 자면 자주 더 자고 싶어하니 습관화해야 한다.
問 : 재가자와 출가자가 제일 가려야 할 음식은 무엇입니까?
答 : 담배, 술은 안 하는 것이 좋고, 건강에 따라서 보존하는 것이 좋다. 출가자는 채식만 하는 것이 좋고, 재가자는 음식을 가리면 살기가 불편하고 공기도 나쁘고 하니 까…….
問 : 성욕(性慾)이란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答 : 다겁생래 익힌 습관 가운데 제일 깊이 박힌 것이기 때 문에 제일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그런 경계가 둘만 되어도 성불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問 : 술은 왜 나쁜 것입니까?
答 : 망령된 과실, 과오를 범하는 소재, 즉 모든 불화를 조성 하고 화합하지 않는 요소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 서 술 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생에 멍청이(石頭)가 되어서 나오는 과보를 받는다. 술기운은 깨끗한 정신을 흐 려 놓기 때문에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
問 :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이치로는 몰 록 깨쳤어도 습기(習氣)는 몰록 제(除)하지 못했다> 하 는데 어디까지가〈이즉돈오〉입니까?
答 : 참으로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최상승문(最上乘門)에서 는 확철대오를〈이즉돈오〉라 하고〈사비돈제〉는 거기 에 대해서 습을 녹여 가는 것이고, 확철대오를 했으면 최상승 화두법을 익혀 가지고 그 근본을 항상 여의지 않 는 관은 분명하나 아직 그것이 밀밀(密密)하지 않아 서 신통이 나지 않은 경지 즉, 신통이 나게 하는 보림 경지를〈 사비돈제〉라 한다. 최상승선에서〈돈오보림〉 의 경지를 점수(漸修) 라 하기도 하고〈사비돈제〉라 하기도 한다.
問 : 화두의심은 3일 또는 1주일만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 는데 그것은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단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 : 시간적으로 1주일 안에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일 주 일을 넘으면 거기서 힘을 얻는 고비다. 사람이 태에 들 어 가서도 1주일만의 변동이 가장 크고 또 수행인이 모두 겪고 느끼는 그 경로와 굴곡에 대한 숫자가 7일이 라는 것이 명확한 것이다.
問 : 낮에는 화두가 잘 잡히는데 몽중(夢中)에는 잘 잡히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答 : 더 열심히 하다보면 꿈 가운데도 잘된다. 아직 덜 익어 서 그렇다.
問 :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수행자는 화두만을 전력으로 들 어 화두정(話頭定)에 들어가야 합니까?
答 : 화두가 두동강 나면 안 되니까〈화두정〉에 무릇 익어 서 들어가는 것을 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로 의 심이란 것이 없다는 말이다. 전체가 의심이니까, 따로 의심이라 할 것이 없는 것 ― 그것을〈화두정〉이라 한 다.
問 : 화두에 대한 의심은 수행자들의 생명입니까?
答 : 근본생명이다. 의심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제일 가 까운 표현이다.
問 : 몸의 기(氣)와 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기(氣)란 혈을 돌릴 수 있는 기운을 말하고 신의(神醫) 들은 혈 돌아가는 것을 알고 옛 한의(韓醫)들은 침을 의지하여 기(氣) 돌아가는 것을 안다. 기운은 혈을 돌리 게 하는 힘을 말한다.
問 : 사후(死後)에도 외도(外道)들은 기(氣)만 남는다 하는데 어떻습니까?
答 : 그건 자기들의 이름이지 불가(佛家)에서는 팔식(八識), 잠재해 있는 의식, 버릇만 남는다 한다.
問 : 죽는다는 것은 슬픈 것입니까?
答 : 죽음을 모르니까 슬픈 것이다.(망식으로 미쳐서 슬프게 느끼는 것이다.)
問 : 닦은 것만큼 죽어서도 간직합니까?
答 : 그렇지. 그대로 나타난다. 관상이 초년부터 나타나는 것 이 그것이다. 겉모습이 좋으면 마음도 좋은 것인데 잘 볼 줄 몰라서 그렇다. 고집도 나타나는데 자기 생각으 로 치우쳐 보여서 그렇다. 그것을 아상(我相)이라 한다.
問 : 근기(根機)가 하열한 사람들이 행자 생활이 힘들어 처음 마음먹은 길(도를 이루겠다는 것)을 버리고 하산하려 할 때는 어떻게 지도해야 하겠습니까?
答 :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첫째는 그 사람의 근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잘못 다뤄서 나가는 것이고, 둘째는 그릇이 모자라고 인내를 못해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수승한 근기가 들어와서 절집안 돌아가 는 것 을 보고 낙심하고 나가는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안 타깝다.
問 : 출가를 하고 계를 받게 되면 은사를 정하고 강원으로 가든지 선방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스님은 강원을 원하 십니까, 선방을 원하십니까? 법도대로 어느 단계를 밟 는 것이 좋겠습니까?
答 : 처음 들어와서는 선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그 다음에 강 원을 거치는 것이 앞으로는 좋을 것 같다. 선(禪)부터 배운 다음 부처님 교(敎)의 뜻으로 들어가는 것이 흔들 림이 없는 사상이 될 것이다.
問 : 초보자가 입문하여 수행하려 할 때 어떤 경전이나 어록 을 좌우명으로 권하시겠습니까?
答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먼저 오십독(五十讀)하고《지 장경》을 읽게 하며 신도들은 반대로《지장경을》먼저 읽게 하고《선가귀감》을 보게 하는데 그 사상의 바탕 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육조단경》을 권하 겠다.
問 : 참선 수행자가 선방을 두루 거쳐 소임을 사는 것과 자 세와 그 역할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答 : 그 문제는 아주 어려운 문제인데 수행한 사람이라야 수 행한 사람의 입장을 알아서 삼직(三職)을 잘 볼 수 있는 데 수행하지 않은 사람이 맡으면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모르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러기 때문에 사무 보 는 일만을 한 사람은 수행한 사람을 시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부터 사판(事判), 이판(理判)이 벌어지는 것이 다. 수행 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도저히 맞춰나 갈 도리가 없고 그러므로 스스로 수행해 나가야지만이 삼직을 살아도 맞춰서 잘 살 수 있는 참다운 삼직자가 되는 것이다.
問 : 말세에는 신통력을 갖춘 도인은 왜 없습니까?
答 : 부처님 말귀를 알아듣는 도인은 많으나, 세속 사람들이 원하는 신통을 자유롭게 나타내는 도인이 산중(山中)에 는 숨어 계신지 몰라도 나타나지 않으니까 도인이 없다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 말귀를 알아들은 다음에 그런 신통이 나야 되기 때문이고 또 신통이 나더라도 함부로 써먹는 것이 아니라 외도(外道)를 만났을 때 항복 받으 려고 써먹는 것이다.
問 :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도인(道人)이라는 개념은 불가에서 견성(見性)해야 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 : 견성해야 도인이고 마음 깨달은 것이 도인이다.
問 : 수행(修行)하는데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스스로를 의 지해야 된다는데 선지식과 스승의 개념 차이는 어떤 것 입니까?
答 : 통털어 외도도 스승이라고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선지 식(善知識)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선지식이나 스승의 근본 뜻은 같다.
問 : 선지식을 만나지 않고는 억겁의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 다는데 선지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십오.
答 : 불가의 선지식이란 뜻은 깊다. 禪이라 하는 것은 생사 (生死)가 없는 경지를 터득한 용(用)을, 다시 말하면 여 래 체에서 나오는 용(用)을 禪이라 한다. 그래서 선지식 이란 말을 외도들이 쓰지도 않거니와 불가의 선지식의 뜻은 이것이 다르다. 그러니까 통털어 스승이란 개념은 같지만 깊이는 다른 뜻이 들어 있다.
問 :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答 : 서산 스님의 사상인 동시에 부처님의 사상이다.
問 : 사회의 불신 풍조가 생긴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答 : 첫째로 우리나라의 예(禮)가 땅에 떨어진 데에 기인한 다. 예의가 부족한 탓이고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 래 물이 맑다>는 속담과 같이 기성세대에게 큰 원인이 있는 것이다.
問 : 도인(道人)의 정의(正義)를 내리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습 니까?
答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것이고, 그 실력자를 도인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 님 말씀을 다 알아들을려면 삼처전심(三處傳心)과 팔 만장경의 뜻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경지가 도 인인 데, 그 뜻에 계합하지 못하고 신통이 나는 것은 요 술(妖術)에 해당하는 것이고 도술(道術)이 아니다. 그러 기 때문 에 기본은 부처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되는 데, 그것은 본심(本心)이기 때문에 그렇다. 부처님 말씀 은 본심을 깨달아서 그 마음을 소개한 말이니까 그것을 못 알아들으면 도인이 아니다. 마음에 대한 소리인데 그 마음에 대한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면 진리를 모르 는 사람이다. 우선은 부처님 말씀을 알아듣는 분상, 그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 의 말귀를 알아듣는 자격이 됐다 는 것이 도인이다. 도인이라는 것은 사람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힘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걸 못 알아 들으 면 도인이 아니라 요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힘을 알고 신통이 나는 것이 도 술이다. 요술은 요사스 런 생각이 통일되면 나타나는 것이다. 추번뇌를 항복받 아서 나타나는 도술은 소승교(小乘敎 )의 도인이 쓰는 것이고, 추번뇌·세번뇌를 모두 항복 받티?나타나는 도술은 최상승선, <마음을 깨달은 도인> 이 쓰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도인은 신선도를 닦은 것으로 아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問 : 선지식을 찾아 화두(話頭)를 받는 데에 정해진 법도가 있으며, 화두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答 : <화두란 진리를 바로 나툰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표현한 것이니 여기에도 떨어지면 아니 된다. 진리란 바로 화두가 되고 자기 본연이 되매, 그 자리를 앞질러서 부처님이라고 하고 그것을 일러 선이 라하고 그 禪의 자리를 모르니까 <참구(參究)한다> 고 해 서 참선이라 한다.
問 : 외도(外道)들이 말하는 진리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答 : 외도들이 말하는 진리는 관념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건 진리일 수가 없다. 외도들은 생각 없는 무념무상 (無念無想)에 조금 잠기면〈열반〉이라고 하고〈증득〉 이라고 하고 그런데에서도 힘이 조금 나오니까 힘이 나 오 는 것을 도술이라 하는데 이것은 요사스런 생각이 묶 여져서 나타나는 힘이며 요술이다. 도술이란 추번뇌· 세번뇌 가 조복되어서 나타나는 이 마음의 묘용(妙用)이 며 부사의(不思意)한 능력인 것이다.
問 : 화두 타는 방법에 있어서 지켜야할 예의는 무엇입니까?
答 :화두라는 것은 기본이 되어 있어야 화두라 하지 기본이 없는 사람이 화두를 타면 되지도 않을 것이고 화두는 화두를 지닐 그릇이 되어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릇 이 안 되었더라도 애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안위시 키 기 위한 것이지 별 뜻은 없는 것이다.)
問 : 화두 참구하는 방법 중 예를 들어 무자(無字)를 참구하 는데, <저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無〉 이렇게 가르치는 스님도 있고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無〉,<어째서 無라 했는고?> 이렇게 하는 분도 계시고 아니면 <준동함령이 모두 불성이 있다 했는데 어째서 조주스 님은 없다 했는고?> 이렇게 전제를 길게 하다가 <無∼> 하고 넣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答 : 그것은 초학자가 자칫 잘못하면 생각에 끌려 관념을 용 납해 가지고 더디게 잡힐 수가 있으므로 조주 무자(無 字) 같은 경우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無∼>, <어째서 無라 했는고?> 이렇게 하는 것이 간단하며 관념을 끌고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준동함령이 모두 불성 이 있다 했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無라 했는고?> 하 면 즉 <부처님은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어째서 없 다 했는가> 하는 관념, 부처님과 반대되는 관념을 끌 고 나와서 상대적인 데에 엎어지기 쉬우니까 오히려 빼 는 것이 쉽게 된다. 그것도 오래 오래하면 자리가 잡히 는데 좀 돌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니 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無∼〉해서 의심이 되어 가는 사람은 그렇 게 하면 된다. 이것은 발음에 있지 않고 조주의 뜻을 찾는 자세가 되면 되는 것이다.
問 :『이뭣고』화두는 <이∼만 바르게 의심하면 '뭣고'가 필 요 없다> 하는데 그런 것입니까?
答 :『이뭣고』하는〈이〉는 처음에『마음이 무엇인고?』, 『이 무엇인고?』 두 가지로 하다가 의심이 잡히면 『이 뭣고』로 통일하면 되는 것이다. 의심이 분명해야 되는 것인데『무엇인고?』라는 것은 의심의 표시니까. <이∼> 해서 의심이 생기면 <∼ 뭣고>가 같이 곁들 여 있는 것이므로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초 보자가 잘되지 않으니까 <∼ 뭣고>까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이 희미해지면 안되니까 가끔 '∼ 뭣고'도 넣 어야 된다.『이 뭣고』, <뭣고∼ 하는 그 놈이 무엇 인고?> 반복해서 의심을 잡아나가야 한다.
問 :『이뭣고』에서 <이∼> 하기 이전(以前)을 찾으라는 말은 맞습니까?
答 : 그것은 틀린 말이다. <이∼> 하는 그 놈을 찾으라 했 지, <이∼> 하기 전을 찾으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問 : 큰스님들께 점검을 받는다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 게 해야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받는 것입니까? 경계가 날 때마다 찾아와서 묻는 것입니까?
答 : 안 되면 가끔 찾아서 묻는 것도 좋고, 경계가 난 뒤 하 는 것도 좋다. 어느 정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는 가 운데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안 했으면 또 안 했으니까 야단도 맞을 겸 자주 묻는 것도 괜찮다.
問 : 묻는 것도 허물이 되고 안 묻는 것도 허물이 된다는데 어느 허물이 더 큰 것입니까?
答 : 안 묻는 허물이 더 크다. 물으면 꾸중이라도 해서 바로 잡아 나아가는 것인데 안 묻는 것은 죽은 놈이 되어서 죽은 것으로 치게 되어 묻는 허물이 좀 적은 것이 된다.
問 : 요즈음 일부에서 큰스님들의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 신 비스럽게 해석하는데 깨쳤다는 것은 망상이 쉰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答 : 신비스러운 것은 요사스러운 술법의 속임수이고 삿된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법뿐이다.
問 : {업장 소멸(業障消滅)}이란 무엇입니까? 소멸할 수 있 습니까?
答 : 화두를 타파해야 업장소멸이라 할 수 있다. 중생들은 자 기 업을 지어 놓고 부처님께 애원하는 것이, 죽을 죄를 지은 사형수가 교도관에 의해 사형장에 끌려 들어가며 교도관에서 살려 달라고 비는 것과 같다. 빈다고 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問 : {업(業)}이란 무엇입니까?
答 : 생각.
問 : {夢中一如}·{寤寐一如}의 경지란 전혀 망상이 들어오 지 못하고 100%로 화두만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까?
答 : 화두타파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간간이 망상이 들어온 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問 : 『화두(話頭)』를 받는 법이 있습니까?
答 : 믿음이 가는 선지식 스님을 만나면 바로 화두를 타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는 그 문하에서 3∼5년 이상 시봉도 하고 사찰에서 소임을 살고 하여 어느 날 계기가 되면 화두를 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임제선사가 황벽회운선 사에 게 신(信)하는 표시로 3∼10년 정도 문하에서 온갖 힘든 일을 다하고서야 화두법의 가르침을 받았다.
問 : 오늘날에도 이런 가풍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答 : 요즈음에도 큰스님들 회상에서는 1∼3년 정도 사찰의 소임을 다해야 화두를 준다.
問 : 화두를 타는 계기가 되면 어떤 의식 절차가 있습니까? 答 : 옛날 가풍은 조실스님의 명에 따라 대중이 큰방에 모인 다음 모인 대중은 가사장삼을 수하고〈화두참구법문〉 을 듣고, 들은 뒤에 화두를 받을 대중은 앞으로 나와 삼 배 절을 하고 물러나 앉아 있으면, 당사자는 그 위 압적 인 분위기와 많은 대중이 증명하는 가운데 평생 잊 지 못할 도업이 한순간 새롭게 이어지는 엄숙한 상황 속에서 화 두를 받는다.
問 : 화두법 이전에는 무슨 수행을 하였습니까?
答 : 그 이전에는 부처님 말씀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였다.
問 : 『5宗 7家』의 가풍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중생의 근기가 시대가 변천하면서 하열(下劣)해지고 알 음알이가 붙어 해석하고 따지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섯갈래로 길을 제시해 놓은 것이다.
問 : 망상을 분석하여 보면 흘러간 과거의 망상이 더 많이 떠오르며 미래에 대한 망상은 잘 안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問 : 많이 보고 많이 듣는 것은 업식만 더하는 것입니까? 答 : 그렇다.
問 : 그렇다고 안 보고 안 들어도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망상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答 : 안 보고 안 듣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보고 듣더라도 끄달리지 말아야 하며 끄달리지 않으려면 화두가 익어 야 한다. 그러므로 화두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問 : 어떻게 화두를 익혀야 합니까?
答 :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問 : 선지식의 특별한 지도방법은 무엇입니까?
答 : 시대적 환경에 따라서, 개개인의 근기및 직업과 환경에 따라서 근본지혜로써 적소적절(適所適切)하게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선지식이 수행자를 대(對)함은 마치 부모 가 자식을 키우는 것 같아서 지나치게 넘치는 것은 잡 아 주고 모자라는 것은 조언하여 주며 방일하여졌을 때 는 경책하여 준다.
問 : 3일이나 7일만 화두가 낮과 밤이 없이 이어지면 <타파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간적으로 짧은 단위를 표현하 는 것인지 아니면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 정진하는 습 (習)을 길들여주기 위한 방편인지 알고 싶습니다.
答: 시간적인 일 주일이다. 3일은 안 되고 7일은 되지. 또 짧은 단위가 아니고 시간적인 것으로 화두가 밀밀(密 密)하게 이어지는 7일인데 대부분 7일 안에는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7일을 넘으면서 힘을 얻는 고비가 된다.
問 : 태고보우국사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들고 37세 가을에 『오매일여(寤寐一如)』경지에 들었는데 7일만에 터지지 않고 90일을 끌고가다 38세 되는 1월 7일에 확철대오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고보우국사와 같은 대근 기도 오매일여에 90일을 끌고 갔는데 말세(末世)의 하 근기중생이 일주일만에 깨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 니다.
答 : 1주일만 화두가 밀밀(密密)하게 이어지면 의단(疑團) 이 독로(獨露)되어 그 힘으로 90일을 끌기도 하고 1년, 2년을 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부가 본 궤도에 오르 는 단계 정도를 1주일로 잡는다.
問 :『오매일여』에 들었을 때는 근본적인 망상인 <밥 먹고 옷 입고 사물을 대하는 망상도 끊어진 상태인가> 알 고 싶습니다.
答 : 아니다. 근본적인 미세망상은 나되 그것이 지배하지는 않으며, 망상이 껍데기만 스쳐 지나갈 뿐 내부로는 침 투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큰 집만한 불에 달아 오른 쇠덩어리가 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것에 쇳덩어리가 금방 식지 않는 것과 같다.
問 :『오매일여』의 경지가 참으로 되면 입태(入胎), 주태(住 胎), 출태(出胎) 모두를 마친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答 : 완전한『오매일여』라면 그렇다.
問 : 본능적 생각으로 일어나는 망상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 까? 예를 들면 밥먹는 것, 진급하는 것, 돈버는 것 등 대인 관계 속에서 살아 나가는 속인이 한 생각 일어났 을 때 화두로만 돌이키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나 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答 : 본능적 생각은 어쩔 수 없다. 돈버는 것, 진급하는 것 등을 승화하면 공부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손해 되지 않 는다.
問 : 산중에서 세속의 인연을 끊고 20년, 30년 정진하신 스님 들도 견성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결혼하여 세속 생활을 하는 속인도 화두만 참구한다고 견성할 수 있습니까?
答 : 할 수 있다. 바른 생각 바른 선지식 바른 정진은 바른 깨달음 으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생각이 쌓여 업이 되고 업이 생 사윤회의 근원이 되는데 속인이라도 생각 생각을 간 절히 화두 의심으로만 돌린다면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 다. 스 님들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른 생각, 바른 선지 식, 바른정진을 하지 않았으므로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問 : 무심(無心)의 경지와 무아(無我)의 경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答 : 무심이란 견성(見性)을 해야 알고, 무아도 견성을 해야 안다.
問 : 무심의 경지에서 막행, 막식하면 업식(業識)으로 남지 않습니까?
答 : 무심도 무심 나름이기 때문에........
問 : 화두 공안 가운데 여래 체(體)를 나타낸 것과 용(用)의 자리를 나타낸 것이 있다는데 맞는 말입니까?
答 : 그럴 수도 있다.
問 : 법거량을 할 때 차별지(差別智)를 살피지 못하면 안 되 는 것인데 그 당시 대답을 못하였어도 더 정진하여 답 하는 경우도 인정합니까?
答 : 인정한다. 예를 들면 태고보우국사가『無』자 화두를 크 게 깨치고, 후에 1700 공안을 점검하던 중에 암두밀계 (岩頭密契) 공안(公案)에 막혔는데 태고스님은 3일 정진 후에 답한 적이 있다.
問 :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엇을 가장 큰 고(苦)라고 합니까?
答 : 안 되는 화두를 열심히 하려는 것.
問 : 지금도 외도(外道)들은 명상, 결가부좌, 단식 등으로 극 심한 고행 수도를 하는데 어떻습니까?
答 : 몸에 고통을 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고 번뇌를 조복받 기 위하여 안 되는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고(苦)이다.
問 : 잠을 자지 않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答 : 젊은 사람은 4시간 정도만 자면 충분하다.
問 : 몇 년 전에 맛본 경계를 다시 맛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정진해도 그 경계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 까?
答 : 비유를 들면 우연히 물가에 가서 수영을 하다가 손에 잉어가 걸려 두손으로 잉어를 잡다 놓친 것과 같으니, 옛 경계를 맛보려 하지 말고 화두만 열심히 하라.
問 : 화두도 망상이라는 데 어떻습니까?
答 : 화두는 어떠한 비유, 어떠한 표현으로도 말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의 체(體)의 자리를 가장 가깝게 표현한 것 인데 의심도 하기 전에 상대적인 망상심으로 사량분별 (思量分別)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問 : 애를 쓰고 참선을 하는 수행자가 득도(得道)하지 못 하 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答 : 선지식의 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고 본인이 바른 수행법을 택하지 않고 했기 때문이다.
問 : 식(識)이 맑다는 것은 어떤 현상입니까?
答 : 외부 경계에 대하여 번뇌가 쉰만큼 나름대로 지혜가 생 기기 때문에 나름대로 식이 맑다는 것이다.
問 : 화두법에서 식(識)이 맑다는 것과 관법(觀法)에서 식이 맑다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答 : 관법에서 식이 맑다는 것은 정신통일을 해서 산란심 (散亂心)이 쉬기 때문이나 다시 일용심(日用心)으로 돌아가면 매(昧)해진다. 화두법에서 식이 맑다는 것은 의심으로 들어가기 때 문에 상대적인 망상이 작용하지 못하고 화두의심을 할 때 업이 동시에 깎여 들어간다.
問 : 수행하여 견성하면 경계를 대함에 있어서 심중유망(心 中有妄) 입니까? 심중무망(心中無妄)입니까?
答 : 심중무망이지. 일체번뇌가 마음에 침입을 못하니까. 확 철대오 하면 외부 경계를 대함에 있어 망식이 마음에 쳐들어오지 못해.
問 : 그런데 심중유망(心中有妄)은 무슨 말인가요? 깨달은 후 에도 왜 망상이 있다고 했는지요?
答 : 깨달아도 망상이 있다는 것은 <번뇌 즉 보리 煩惱卽菩 提>라는 뜻이겠지. 내외가 없는 경지로 중심이 딱 서 있으니까 경계에 마음이 침범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러기에 <번뇌 즉 보리>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정력 이 밀밀(密密)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켜서 <보림한 다> 또는 <닦음 없이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론 을 이렇게 세워야지, 번뇌가 마음 안으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마치 연꽃잎에는 더러운 물 방울이 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 :『내외명철 內外明徹』이라는 것은 유망이 아니라 무망 으로 봐야겠군요.
答 :『내외명철』이라는 것에도 이변지(理辨智) 내외명철이 있고 이사변지(理事辨智) 내외명철이 있지. 상상근기는 이 둘을 같이 다룰 수 있고, 상근기는 이렇게 나눠서 다루고, 하근기는 더하다.
問 : 게송으로 전법하는 것을 道라 할 수 있습니까?
答 : 이것은 수행인의 눈 밝히는 말이고, 道라 할 수 있지. 게송의 말에 가서 떨어지지 않고 그 뜻을 사무쳐서 보 는 관계로 道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삽삼조사까지는 여 래선도리(如來禪道里)로 눈을 떴음을 확인하여 전법 했 고, 그 후에는 자꾸 알음알이를 붙여서 <너도 나도 견 성했다>고 하니까, 까다로운 전법을 세워 진실로 눈뜬 이만 통 과시켜 전법하는 것을 조사선(祖師禪)이라 한다. <조사선을 여래선에서 잡아 썼다>는 말은 까다롭게 용법(用法) 을 썼다 그 말이지. 활용을 까다롭게 했다는 말이야. 삽삼 조사(三十三祖師 :가섭 ∼ 혜능)까지는 까 다롭게 안 해 도 눈을 떴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전법한 것이고, 그 후에는 눈 못 뜬 사람도 눈떴다고 하니까 까다롭게 활용해 보면 이 사람은 못 살피거든. 그러니 까 <아니다> 하고 눈떠서 살피는 이만 통과시켰지.
問 : <견성 후에도 유망이다> 하는 부분을 다시 설명해 주 십시오.
答 : 무망의 경지에서 유망이 나온 것은 용(用)이다. <무위심내기비심 無爲心內起悲心>이라, 기비심이 유망 인 즉 무망 가운데서 유망이라 하는 것이다. 무망이 곧 무심이니, 〈최상승무심〉은 추번뇌·세번뇌를 모두 항 복 받은 것이고,〈소승무심〉은 추번뇌만 항복 받은 것 이 니까 무심이라고 분류하면 이렇게 다른 것이지.
問 : 추번뇌만 항복 받은 경지로 게송을 지으면 허물처가 있 지요?
答 : 추번뇌만 쉬어 가지고는 게송을 못 짓는다. 禪門에서는 화두했기 때문에 추번뇌·세번뇌를 항복 받아 지을 수 있지만, 다른 문중에서는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問 : 체·상·용(體·相·用)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가요?
答 : 체·상·용과 체·용·제시는 같은 말이다. 남전스님이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중생들은 <부처님이 천상천하에 제일이다> 하는 생각 을 일으켜 말머리에 떨어져서 소견을 일으키고 있잖아? 그 러면 그 말을 한 남전스님도 망상으로 그런 것이겠 나? 그러니까 격(格)이 천지 차이로 다르거든.
問 : 법거량 하는 것은 이변지입니까? 사변지입니까?
答 : 이변지로 하는 것이지. 이(理)를 논하기 때문에 즉, 이변 으로 다루는 말이기 때문에 이변지로 하는 것이지. 사 변지라는 것은 신통묘용이다. 그러니까 사변지라는 말 은 잘 안 쓴다. <생사거래가 본래 없다. 기용제시(機用提示)하고 살활종 탈(殺活從奪) 한다>는 등의 말은 법담하는 데 쓰는 말 이지, 정진하는 데는 잘 안 쓰는 말이지. 이런 것은 마치 채 자라지도 않은 어린이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 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
問 : 마음이 밝아졌다는 경지는 어느 정도의 경지인가요?
答 : 보조스님이 돈오한 다음 망상이 있다는 것은 <나름대 로 깨달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야. 확철대오가 아닌 것이다.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死), 계무 생사(契無生死)를 지나 용무생사(用無生死) 단계라야 진 정 한 깨달음 즉, 진정한 무망(無妄)이 되는 것이지. 이 때 가서야 미세번뇌까지 끊어지는 것이지.
問 : 현재의 성철 종정스님이 오매일여 경지가 되기 전에는 나에게 와서 물을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은 수행지도에 있어서 지나친 것이 아닐까요? 또 종정스님이 현실 사 회 문제에 대해서 종정으로서 한 마디 말도 않고 있는 것은 불교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아니지 않은 지요?
答 : 그것은 그 스님의 뜻이지. 밑에 사람이 깨달은 사람의 뜻에 점수를 매기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지. 마치 초등학생이 대학원생의 시험점수를 매기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자격미달 아닌가?
問 : 견성이 화두타파입니까?
答 : 견성이 화두타파지. 타파 후에 닦는 것이 보림이라 하는 것이다. 견성하기 전에 닦는 것은 점수(漸修)가 아니다. 보조스님이나 태고스님도 처음엔 스스로가 견성했는 줄 믿었으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속은 경계였다고 한 것처 럼 진정한 견성이 아니지. 화두하는 과정이《수심결》 에 있는 바와 같은 경계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問 : 그러면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경계를 배척하라는 것은 잘못 아닌 가요.
答 : 그렇지. 화두하는 데 있어서 그런 데 가서 걸린다 이거 지. 스님도 그런 것을 지적한 것 아닌가.
問 : 이(理)와 사(事)를 동시에 닦는 것은 다른 문중에 또 있 습니까?
答 : 참선 문중밖에 없지.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것은 동시에 닦는다는 것으로 서 화두 문중에만 있는 것이지. 원돈문(圓頓門)에는 그 런 것이 없다.
問 : 화두를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견성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答 : 화두를 올바로 들기가 힘들겠지. 김이 빠진 것 같아서.
問 :『無자 화두』 드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요?
答 : 처음엔 전제(全提)를 들어서 힘을 얻은 다음에, 단제(單 提) 즉 <조주는 어째서 無라 했는가?> 하고 조주스님 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조주의 뜻을 찾으면 그게 의심 이 되고 그게 바로 본심경계(本心境界)인 것이다. 일체 공안이 다 그렇게 참구하는 것이다. 조주의 뜻을 몰라 뼈에 사무쳐 꿈에서까지 그 뜻을 참구해야 한다. 전제 를 가 지고만 하면 관념이 붙어서 구경까지 갈 수 없으 므로 단제만을 들어야 관념이 못 붙어, 다시 말해서 조 주의 뜻만 바로 찾으면 망식(妄識)이 거기에 붙지를 못 해. 이렇게 관념이 붙지 못 하기 때문에 방편이 아니고 여래의 자리를 바로 제시했다고 하는 것이다.
問 : 현재 한국에서 법을 임의자재로 잡아 쓰는, 확철대오했 다고 믿을 수 있는 스님은 없는 것입니까?
答 : 그렇지. 닦아 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스님들이 있는 것이 지.
問 : 그렇다면 경허스님도 확철대오 못한 것 아닙니까?
答 : 확철대오 못했다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막행 막식(莫行 莫食)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방편력이 부족했다고 봐야지. 그 행(行)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은 어린이가 어른의 뜻을 모르고 겉만 보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問 : 무심(無心) 즉 무념(無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答 : 무심에는 소승무심, 대승무심, 최상승무심이 있다.〈소승 무심〉이란 생각을 통일하여 멸진정(滅盡定)에 드는 것 이고,〈대승무심〉이란 대승관법을 하여 닦아 나가는 것이며 대승 방편이라 한다.〈최상승무심〉은 닦아 나 갈 수 없는 것이다.〈화두가 바로 본심자리〉이므로 닦 아 나가는 점차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방편이 아 니라고 하는 것이다.
問 : 강원교육 받은 사람은 화두타파 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答 : 꼭 그렇지는 않지. 강사를 잘못 만나는 경우, 스승이 제 자에게 김빠진 맥주를 권하는 격으로서, 실력 없는 강 사의 허물이 커.
問 : 강원을 옛날에는 권하지 않았는데 요즘엔 어째서 강원 을 권합니까?
答 :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권하는 것이다. 참선을 못할 바에 는 강원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問 : 추번뇌·세번뇌(序煩惱·細煩惱)·겹번뇌란 무엇인지요?
答 : 이 단어는 내 말이 아니라 옛 경전에 다 나와 있는 것 이다. 겹번뇌는 추번뇌, 세번뇌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수행하여 추번뇌를 조복받고 나면 세번뇌가 뛰는 것이 또 나타난다. 추번뇌의 힘이 제일 세어서 경계에 자꾸 끌려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자제하는 경지가〈수다 원〉경지다. 여기서 더 다져지는 수행을 하면〈사다함 〉경지가 되고, 더 위는〈아나함〉, 더 수행하면 추번 뇌를 조복 받는〈아라한〉경지가 된다. 아라한은 생사 를 벗어나는 것 은 알았으나, 생사가 없는 도리는 미세 관념까지 없어야 나타나는 것인데, 아라한은 미세관념 이 남아있는 고로 생 사 없는 도리는 꿈에도 모르는 것 이다. 대승관법은 20%의 관념이 붙어서 미세번뇌와 같 이 합류해서 관(觀)해 나가 는 것이고, 소승관법은 미세 관념이 더 많이 뛰는 상태로 닦아 나가는 것이다.
問 : 능엄경에서 50종류의 마장(魔障)은 어떨 때 나타납니까?
答 : 50마장이 나오는 것은 자기의 미세관념이 뛰면서 닦아 나가는 관계로 자기가 <외부의 마>를 끌어들이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문에서는 10가지 병폐 즉 <무자 10종병 無字十種病>만 조심하면 된다. 오직 화 두만 올바로 들고 나가면 이 10가지 병폐도 막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로 화두를 들고 나가면 미세번뇌까지 붙지 못하 기 때문에 천마외도가 칭찬할 수 없고, 비난 할 수 없는 것이다.
問 : 그러면 화두법이 정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答 : 그렇지. 대승관법은 미세번뇌가 뛰므로 외마(外魔)가 칭 찬할 수 있지만, 화두문에서는 일체의 번뇌가 없이 닦 는 수행법이므로 정법이라 할 수 있다.
問 : 자기 망식 가운데에 자기 근본이 서 있을 때, 망식이라 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答 : 그것은 망식이 아니다. <번뇌 즉 보리 煩惱卽菩提>가 되기 때문에, 화두경지만 보니까 본심이 돼서 망식이 다 쉬게 되지 않겠나! 전에는 망식에 휩쓸려 살던 것이 이제 화두가 근본이 되어 중심이 섰으니까, 그때는 번 뇌 즉 보리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오매일여』경지 이 후를 말하는 것이다.
問 : 심우도(尋牛圖)에서는 인우구망(人牛俱忘) 이후에야 완 전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答 : 그렇지.『인우구망』다음에 일원상(一圓相) 나타나는 것 이 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 8번째 이후에 표현한 것들 은, 세밀히 보이기 위해서『삼처전심』으로, 또『체·용 ·제시』로 표현한 것이다.
問 : 고집이 센 수좌가 한 생각만 돌이키면 밀고 나가는 힘 이 세므로 도통하기가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答 : 고집보다는 꾸준한 근기라고 해야겠지.
問 : 법에 대해 미세한 참구방법을 모르고서도 견성할 수 있 습니까?
答 : 안 된다. 바르게 참구할 줄 알아야지. <자기의 화두하는 것이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고 자꾸 물어서 바르게 들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분별이 많은 사람은 미리 알아서 이것저것 자꾸 따지고 이론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안 좋은 것이다.
問 : 성성적적(惺惺寂寂)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答 : 화두가 분명한 것으로, 의심이 분명한 것을〈성성하다〉 고 하고 번뇌가 없으니까〈적적하다〉고 한 것이다. 寂 寂한 가운데서 寂寂에 치우치면 무기(無記)에 빠지므로 화두를 들기가 싫어지게 되므로 그래서 다시 寂寂한 가 운데서 惺惺하게 화두를 들어야 하므로 <惺惺寂寂>이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잘 들어서 惺惺하 면서 寂寂해야 하고, 다시 寂寂한 가운데에서 惺惺하 게 들고 나아가야 한다. 寂寂한 것만 지키면서 <내가 깨달았다> 고 생각하는 것은 묵조 사사배(默照 似邪輩) 들이 무사갑(無事甲) 속에 앉아있는 잘못된 것이다.
問 : 화두타파 시에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어떠할 때입니까?
答 : 몸의 상태는 편안하고 정신상태는 맑을 때이다. 이때는 잠이 저절로 달아나 버리게 된다. 이때는 대중처소에 서 예불소리, 종소리 등이 아무리 복잡하게 들려와도 상관없게 되는 때이다. 그런 소리는 그대로 놔두고 화 두가 이어지는 것이며, 이런 경계로써 1주일 정도 끌고 나가야 한다. 이런 화두 상태가 한번 자리 잡혀지면 복잡한 외 부경계에 끄달리지 않게 되어 계속 화두가 들 려져 나가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외부경계가 복잡하 다 해도 그리 쉽게 이런 경계가 없어지지는 않으며, 잠 이 깜빡 들었어도 금방 화두가 들려져 나가고 만다. 이 럴 때 예불소리, 종소리 등 외부경계에 마음이 쓰여 화 두를 잊는 사람은 시비에 빠져서 공부할 근기가 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진실로 화두를 간절히 든다면 시장바닥에 앉아서 해도 상관이 없지.
問 : 이런 상태로 얼마나 가면 견성할 수 있습니까?
答 : 약 1주일 정도 가야 한다고 봐야지.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기쁘다는 생각을 내면 안 되지. 이러한 희마(喜魔)가 있으면 사사배(似邪輩)가 되고 마 는 것이다. 이것은 태고스님이 지적한 것처럼 <나름 대로의 견성>이지 <참견성>이 아니다. 이럴 때는 다 시 해야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경계에서 다시 바르게 참구하면 되는 것이다.
問 : 현실적으로 수행하는데 1단계 힘을 얻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합니까?
答 :『지무생사』정도는 알아야지. 화두가 익어 타성일편(打 成一片) 경지가 돼서 쉬운 법문은 살필 수 있는 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지.
問 :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어떠한지요?
答 :『체무생사』로서 무르익는 경지지. 이것은 나름대로『오매일여』를 지나 터졌다는 경지지. 그러나 선각자가 보면 이것도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용무생사』가 되는 것이다. 그 러나 소승에서처럼『용무생사』도리만 귀중히 여겨 좌 탈입 망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엔『용무생사』가 된 것 처럼 보이지만, 이렇게『지무생사』『체무생사』『계무 생사』단 계를 거친 『용무생사』라야 진정한 <생사 없 는 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는 도리를 앎.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도리를 체득함.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도리에 계합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도리를 씀.
問 : 토굴과 대중처소에서의 수행은 어떻게 다른 가요?
答 : 토굴에서는 별 진취가 없다. 대중처소에서는 대중이 같 이 정진하고 움직이므로 자기 규칙 지키는 습관만 지키 면 별 어려움이 없지. 불 때주고, 공양 주고, 다 해 주 니까, 불편한 게 없지. 대중처소에서는 자기 소임 하나 만 하면 되니까 그것만 마치고 나면 나머지는 하루종일 자기 시간이지. 그러나 자기 위치 지키기가 그리 쉽지 는 않지 . 도반하고 어울리지 않는 자기를 지키기가 어 렵다. 토굴생활은 전부 자기가 해결해야 하니까, 뺏기는 시간이 많게 된다. 대중처소에서 정진하는데는 해제 때 도 좋다. 공양도 주고 방도 있고 하니까.
問 : 조실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이 육조 이후 마조 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정맥(正脈)이고 하택―규봉―보조 로 내려오는 문중은 문 밖 사람이라 정맥이 아니라고 하 셨는데, 〈돈오돈수〉는 미세망념이 없는 것입니까?
答 : 그렇지.
問 : 성철스님과 여기 조실스님 가풍은 돈오돈수사상이죠?
答 : 그렇지. 육조 문하에 오종(五宗 : 임제·위앙·조동·운 문·법안)이 벌어졌고, 오종은 모두 돈오돈수 사상이지.
問 : 깨친 다음에 인가(印可)를 받습니까? 깨치기 전에도 인 가를 받습니까?
答 : 깨친 다음에 인가를 받는 것이지.
問 : 깨친 후 탁마해서 확실하다고 인가해서 은밀히 전해진 후에도 미혹한 것이 있으면 또다시 점검 받는 경우도 있습니까?
答 :『향상구』가 해결되면 다시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이지.『법신구』나『여래선』갖고 알았다고 하는 것 은 종사(宗師)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 임제·덕산·마조 의 살림살이를 모르는 것이다. 마조스님이『향상구』를 제 창하셨고, 그 문하들이 모두 향상구·향하구(向上句 ·向下句)를 제창한 것이지,『여래선』『법신구』를 제 창한 것 이 아니거든.『향상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니 고, 임제·덕산의〈돈오돈수〉도 모르는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에 이러한 바른 안목이 열리지 못하고 점 수(漸修)의 물이 잔뜩 들어서 큰 병폐가 되는 것이지. 육조스님도 <하택은 지해인(知解人)>이라 하셨고, 오 조 홍인대사는 <신수는 문 밖의 사람>이라고 하셨거 든. 반야다라 존자의 수기를 받으신 마조선사는 선(禪) 에 대해 전무후무한 안목을 지니신 분으로 마조의 가풍 은 독특 한 것이거든. 백장·남전·귀종(歸宗)이 마조의 법을 이어받아 이 법이 중국 천하를 덮게 되었고, 임제 ·덕산도 바 로 이 법을 터득한 것이지. 임제·덕산의 법이 마조의 법인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돈오점수 〉를 주장하고, 이 법을 바로 알면 〈돈오돈수〉이고, 이것이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問 : 돈오점수에서는 육조 스님이 16년간 사냥꾼과 지낸 기 간을〈보림〉즉,〈점수〉로 보는데 스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答 : 돈오 후의 점수기간이 아니라 시절 인연이 있는 것이 지. 오조스님도 육조스님에게 <시절을 기다리라>고 부촉했거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 을 펴는 데도 시절 인연이 있는 것이지. 시절 인연이 도래하 지 않으면 법을 펼 수 없고, 역행하게 되는 것이 거든. 귀종스님은 마조선사의 제자인데, 어느 납자가 <어떤 것이 보림입니까?>라고 물었더니, <한 티가 눈에 가리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고 하셨단 말이야. 귀종스님이 아니면 이렇게 말을 못하지. 이것 을 바 로 받아들일 줄 알면 모든 종사의 본분사(本分 事)를 다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근 래 우리나 라 선지식들에게〈돈오점수〉사상이 있게 된 것이지. <한 티가 눈에 가리면 허공꽃이 떨어진다>고 한 뜻 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사의 눈을 바로 갖추지 못했 다고 보는 거지.
問 : 돈오돈수 사상은〈이변지〉가 부처님과 똑같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사변지〉는 부처님과 같은 능력 이 나오지를 않으니까,〈사변지〉를 닦기 위해서 닦는 것을〈점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答 : 닦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 즉,〈이변지〉만 바로 보게 되면 자연히 다 갖추게 되는 것이지.
問 :〈이변지〉만 확실히 보고 나면〈사변지〉는 닦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신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인 가요?
答 : 그럼,〈이변지〉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지.
問 : 소승 사과(小乘四果)인『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 한』에서〈아라한〉도 견성을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 라한이 견성을 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答 : 아라한은 성인(聖人)에 들어간 것이지. 부처님께서는 아 라한은 성인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하지만 이 달 마의 견성법과는 다른 것이지.
問 : 소승법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까?
答 : 성인에 들어가는 것이고, 견성법과는 차등이 있지.
問 : 확철대오(廓徹大悟) 하면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없다고 보십니까?
答 : 그렇지. 돈오돈수(頓悟頓修)만 되면 미세망념이 없는 것 이지.
問 : 망상이 있는데 놀아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망상이 아주 없는 것입니까?
答 : 망상이 없는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고 깨달은 경계 그대 로가 일상살림이 되는 것이지.
問 :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아뢰야식(阿賴 耶識) 가운데 그대로 훈습이 되는데 확철대오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훈습이 안됩니까?
答 : 그렇지. 육조스님도 제8식을 넘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 가 되면 종전의 분별작용이 서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구 경에 이르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
問 : 묘관음사의 비문에 적혀 있는 <운봉선사께 향곡선사가 인가를 받고 난 후에 함께 정진하던 도반(성철 스님)이 물었는데, 향곡 선사께서 답을 못해서 더 정진을 하신 후에 답을 했다> 하는 것은?
答 : 향곡 선사께서는 답을 못하시고는 소낙비가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탑에 기대어서 삼·칠일 간을 용맹정진을 하셨었지. 이렇게 참구하시다가 깨치셨는데, 깨닫고 보 니까 질문을 한 도반 스님이 확실히 아는 것이 아닌 것 을 보고 도반 스님에게 방망이를 놓고,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었지. 이 두 분 스 님으로부터 다시 한국 선종이 임제·덕산의 가 풍을 재현하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모든 한국 선사 스님들이〈돈 오점수사상〉에 침체되어 있었거든.
問 : 여기서『향상구』는『조사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 : 아니지, 별개야. 『향상구』를 알아야〈차별삼매〉를 다 알게 되는 거야.
問 : 혜월 스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법맥을 운봉 스님이 향곡 스님에게 전하신 것인데 향곡 스님이 인가를 받은 후, 도반의 물음에 막혀서 삼·칠일 간을 용맹정진을 해서 답을 했다는 것은 미진하기 때문에 더 닦은 것으로 돈 오돈수 의 확철대오가 아닌 돈오점수 아닙니까?
答 : 고인들도 한두 번 늦게 깨달은 경우도 있다. 설봉스님 도 암두스님에게 한두 번 혼이 났었고, 임제스님도 두 번 그런 적이 있고……. 구경각(究境覺) 즉,『향상구』에 이르러야 〈돈오돈수〉 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선사들의 사상이『향 상구』를 모르고『여래선』만 알았지. 향곡·성철 스님 이『향상구』를 깨달은 이후에 돈오돈수로 변화가 된 것 이지.
問 : 400년 전의 서산 스님까지도〈돈오점수〉로 잘못 아신 것으로 보십니까?
答 : 중년기에는〈돈오점수〉를 주장했다가 노년에는〈돈오 돈수〉를 제창했다.
問 : 그 위의 태고 보우국사, 환암 혼수, 구곡 각운…… 같으 신 분들도?
答 : 태고 보우국사나 나옹, 백운스님 등 서너 분들은 중국에 서 직접 전해 받아 안목이 있었고, 그 후로 실낱같이 내려오게 된 것이지.
問 : 임제·덕산의 살활자재하는 가풍이 향곡·진제 스님으 로부터 재현되었다고 보면 기존적인 운봉·혜월·경허 스님의 맥은 존중하되 거기에 맞추면 이론이나 논리가 맞지 않는 것이죠?
答 : 안 맞지. 우리가 허물은 짚고 넘어가야 돼. 임제골수의 안목을 전수 받지 못하다가 변화가 온 것이지.
問 : 임제종에서 깨닫게 되면 조동종, 위앙종, 운문종, 법안종 과 거량해서 서로 통하고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까?
答 : 육조의 자손들도 다 똑같은 것이지. 임제의 가풍은 대기 대용(大機大用)한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 잘못 알고 이러니 저리니 하는 것이지 알면 다 통하는 것이야.
問 : 법상에 올라가시기 전에 미리 법문을 준비하십니까?
答 : 준비가 좀 되어야지. 아침에 좀 생각하지.
問 : 준비한다는 것은 미진한 것 아닙니까? 전광석화처럼 살 활자재(殺活自在)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答 : 미진한 것이 아니고, 줄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가? 부처님 49년 설법도 마찬가지야. 12년 간〈소승법〉을 설하시고, 어느 정도 교육이 된 후에 한 단계씩 올려서〈대승법〉으로, 마지막에는〈최 상승선〉을 설하신 것이지. 주장자만 들면 되는데 중생 들이 이 뜻을 모르니까 말로 하신 것이지.
問 : 법상에 올라가셔서 법문을 하실 때에 주장자를 처음에 는 세 번, 끝날 때에는 한 번 치는 경우가 있고, 처음에 한 번 끝날 때에 세 번 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무 엇을 표현하는 것입니까?
答 : 고인들은 세 번 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는 꼭 한 번 치지.
問 : 제 알음알이 상식으로는 한 번 치는 것은 일구(一句)이 고, 세 번 치는 것은 군더더기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答 : 그것은 사견이야. 종사는 항시 <본분사 本分事>를 나 투는 법이야.
問 : 조실 스님이 주장자를 한 번 치시는 것은 무슨 도리입 니까?
答 : 심오한 진리가 있지.
問 : 최초로 법상에 오르신 나이와 장소는?
答 : 묘관음사에서 인가를 받고 법상에 올랐는데, 세속 나이 로 33세일 거야.
問 : 외호대중을 만나지 못하면 도통하지 못 한다고 들었는 데요. 예를 들면 석두스님이 효봉스님을 토굴에서 정진 하게 할 때에 음식도 넣어주고 사람도 못 오게 하셨는 데,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외호를 해 주 었는데, 조실스님도 향곡스님한테 그렇게 외호를 받으셨습니까?
答 : 그냥 대중생활을 했었지. 외호가 필요 없지, 마음의 반 연이 다 끊어졌는데........
問 : 깨칠 때 7일 혹은 90일간 화두의심이 이어진다고 하는 데, 조실 스님은 얼마나 화두가 이어지셨는지요?
答 : 나는 모든 반연이 끊어져서 결제·해제를 관계하지 않 고 앉으나 서나 화두를 참구했지. 처음 화두 타서 2년 만에 열렸고, 그 뒤 한 5년.......
問 : 그 기간에는 묘관음사 밖에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答 : 거의 안 나갔지.
問 : 그 때 잠은 몇 시간이나 주무셨습니까?
答 : 잠은 4∼5시간 잤지.
問 : 어느 경계가 지났을 때 조실스님에게 물으셨습니까?
答 : 막힌 것이 있었을 때 묻고 화두가 타파되어야 거량이 되는 것이지. 깨닫고 난 다음에 물으면 서로 여러 가지 문답이 상통되지.
問 : 그럼 며칠에 한 번씩 묻습니까?
答 : 화두가 풀려야 묻게 되지.
問 : 향곡스님께 인가를 받으실 때 전 대중을 모아 놓고 하 셨습니까? 개인적으로 인가를 받으셨습니까?
答 : 단독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전법게를 받았다.
問 : 밀전(密傳)이라고 하지만 제3자가 보았을 때 공신력이 덜한 것이 아닙니까? 答 : 단독으로 받았지만 선사께서 대중에게 알려서 대중이 다 알았다.
問 : 여태까지 마음에 드는 수좌가 없다고 하셨는데 인정받 은 사람이 없는 것인 가요?
答 : 없지. 서로 문답이 상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問 : 수좌스님들이 평생 목숨을 걸어도 견성하지 못하는 가 장 큰 이유는?
答 : 첫째, 선지식을 믿지 않는 데에 있고 둘째, 바른 지도 를 받지 못하는 데에 있지. 바른 지도를 받고 모든 반 연이 쉬어서 오로지 <견성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쳐야 겠다>는 확고한 신심이 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지.
問 : 사람을 다룬다는 것은 말을 시켜보고 다룬다는 것입니 까? 모습을 보고 다루는 것입니까?
答 : 말을 주고받고 하면 알게 되지.
問 : 정진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임종할 때 매(昧)하지 않으 려고 하는 것인데 평상시에도 화두가 안 되는데 숨 떨 어질 때 되겠습니까?
答 : 정신을 못 차리는데 주력(呪力)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지. 그러나 화두 한 생각이 바로 이어지면 모든 산란 심이 없어지고, 어느 것보다도 나은 것이지.
問 : 공안 화두법은 자력(自力)으로 보아야 합니까? 타력(他 力)으로 보아야 합니까?
答 : 절대 자력이지.
問 : 타력적인 기도나 정근을 하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答 : 그것은 할 수 없이 소인배들이 하는 것이지.
問 : <명당이다, 보궁이다> 하는 터에 구애받지 않습니까?
答 : 선지식을 만나야 도를 성취하는 것이지 장소는 상관이 없다.
問 : 복(福)의 정의(개념)?
答 : 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삿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마음 이 깨끗하고 삿되지 않으면 일거일동이 복이 된다.
問 : 덕(德)은?
答 : 덕도 복과 마찬가지이지. 남을 헐뜯지 않고 항시 본성의 깨끗한 성품을 따라서 평등하고 인아상(人我相), 아만이 없는 마음을 쓸 것 같으면 덕이 되지.
問 : 지혜는?
答 : 마음의 광명이 열려서 본바탕을 보게 되는 것이야.
問 : 중생은 어리석고 무명업식에 있다고 하지만 머리를 써 서 우주를 관찰하고 과학을 창조하는데 이것과 지혜는 틀린 것입니까?
答 : 지혜와 <견문 알음알이>는 틀리지. 지혜는 본바탕을 바로 보아서 체성의 광명을 찾는 것이고, 세상의 지식 은〈알음알이〉분상으로 따지고 셈하는 것으로 과학이 이루어진 것이지.
問 : 묘관음사에서 정진을 하실 적에 해운정사를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요?
答 : 공부할 때에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問 : 인가를 받고 난 후에 회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 신 후에 산중불교는 생명력이 없다고 여기시고 장소를 물색하시던 중에 장수산의 맥이 여기 뻗쳐 있는 것을 보시고 해운정사를 지으셨다고 하셨는데, 지금 짓고 계 시는 108평 큰 법당 불사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하신 것 입니까?
答 : 3년 전부터 만반준비를 했지.
問 : 중생들이 생각하는 알음알이, 계산, 계획과 조실 스님이 절을 지으시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答 : 물론 차이가 있지. 혜안으로 미래사를 직견하고 바로 하 는 것이지만 장소와 시주자와 여러 가지 조건이 되어야 지.......
問 : 여기 해운정사가 장수산의 정맥으로 조실스님의 인연 도 있는 것이지만 불·보살님의 가피도 입어서 절을 지 으신 것은 아닌가요?
答 : 가피는 생각 않고 그냥 세속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에 게 법을 펴기 위하여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지. 이렇 게 좋은 조건의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속세에 많은 사 람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보 다 도 부처님 법을 바르게 지도하고 바른 안목을 가진 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지.
問 :〈업장소멸〉이 된 사람과 〈업장소멸〉이 안 된 사람 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答 : 업장은 과거의 여러 가지 습기인데, 중생은 그 습기가 없어지질 않지. 견성을 해야 없어지는 것이지.
問 : 견성을 해야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라면 조실스님은 업 장이 소멸된 것이네요. 업장이 소멸되지 않은 사람도 각기 업의 가볍고 무거운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答 : 덜하고 더한 경중이 있지.
問 : 업의 최초의 시작은......?
答 : 본심본성을 한 생각 등지므로 인해서 한 생각을 좇아서 온갖 생각이 점차 일어난 것이지. 모두 자성삼매(自性 三昧)를 수용하면 생각이 붙지를 못하는데, 한 생각 일 어남으로 인해서 퇴보하게 되어 천차만별의 분별이 일 어나 는 것이지.
問 : 깨달으면 과거·현재·미래의〈삼세〉가 하나로 통일되 어서 일념으로 간다고 하는데, 전생·현생·미래를 안 다고 하는 것은 외도입니까?
答 : 그것은 본심으로 돌아가면 알게 되지.
問 : 깨달으면 확연하게 다 알게 됩니까?
答 : 그렇지.
問 : 확연하고 명백하게 아는 것은 확철대오라고 하는 것이 고, 희미하게 아는 것을 그냥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 : 구경(究境)에 이르러야 바로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지.
問 : 화두를 하면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지만, 괴로울 때도 있는데 이것은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지 않기 때문입니 까?
答 : 그렇지. 분별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問 : 조실스님이 보실 때 한국 불교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答 : 모두를 한 군데에 모아놓고 참선을 지도해서 인·아상 을 쉬게 하여 마음광명을 찾음으로 인해서 종단이 화합 하고 온 나라가 불국토가 될 것이다. 껍데기 불교는 소 용이 없는 것이지.
問 :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의 삼현 (三玄)이 임제의 가풍이 아니라고 스님은 그러시는데, 임 제록에는 삼현이 나오는데요?
答 : 그것은 고탑주라는 후손이 자기의 사견으로서 성립시킨 것이지. 임제선사의 삼현 현지(玄旨)와는 거리가 멀다.
問 : 생사를 넷으로 나누어서 지무생사(知無生死)·체무생사 (體無生死)·계무생사(契無生死)·용무생사(用無生死)라 하고 이것을 교가의 이무애(理無碍)·사무애(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사사무애(事事無碍)와 비교하면 서 로 맞는데, 이러한 것들을 후학이 알아야 하는 것인지, 깨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인지.....?
答 : 깨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인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 부러 알려고 할 필요는 없지. 임제와 고인의 살림살이 는 살활종탈(殺活從脫), 기용제시(機用提示) ― 죽이고, 살리고, 주고, 뺏고, 기·용의 자재에 있는 것이지. 그러 니까 바보가 되어서 화두와 씨름을 해서〈일념삼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問 :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사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答 : 나는 권하지를 않아. 왜냐하면 〈장좌불와〉를 해도 혼 침이나 몸에 끄달리지 않는 상태이면 좋지만 억지로 하 려면 어려운 것이지. 화두가 일념으로 지속되면〈장좌 불와〉가 저절로 되고 혼침도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 지게 되는데 흉내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 괜히 시간 낭비이고 몸만 망치게 되어서 실다운 소득이 없게 되 지. 몸은 기계와 같아서 기계에 기름을 치듯이 몇 시간 을 쉬고 맑은 정신에서 혼침과 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정진을 해야 하 는 것이지.
問 : 오후 불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答 : 건강을 유지할 정도로 적당히 먹는 것이 좋지.
問 : 화두만 바로 하면 장좌불와, 묵언, 일종식(一種食) 등은 저절로 되니까 조작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 지요?
答 : 그렇지. 화두만 바로 하면 되는 것이지.
問 :향상구(向上句)·일구(一句)·최초구(最初句)·말후구(末 後句)·상신실명(喪身失命)은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의 체 (體)의 자리로 밥을 먹으나 잠을 자거나 이대로가 일구 (一句)이고 여기서 털끝만큼이라도 표현하고 하면 동념 즉괴(動念卽乖) 즉, 움직이면 어긋난 것이 되어서 따로 법문을 하는 것도 죽은 것인데, 조실 스님은 향상구와 일구 를 다르게 보십니까? 다르다고 전에 하셨는데...?
答 :『향상구』를 알면〈일구〉를 알고,〈일구〉를 알면『향 상구』를 아는 것이지. 향상구와 향하구, 최초구와 말후 구, 일구와 이구가 번복되면 안되는 것으로, 같은 몸이 라도 머리·손·발이 있는 것처럼 각 부분이 있는 것인 데, 미(迷)한 자는 이것을 가리지 못하지.
問 : 초당파 공안 같은 것은 일구소식(一句消息)이 아닙니까?
答 : 모든 공안은 다 다른 것이지. 이 방 안에 책상이 있고 또 꽃도 있고 책, 단주, 안경이 있지만 각 역할이 틀리 듯이 공안도 다른 것이지.『향상구』를 모르면 용도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고 이치적으로 서로 맞아야 하는 것 이 지.〈돈오돈수〉가 된 사람이면 이렇게 가릴 줄 알고 시비가 없지. 모르는 사람은『할』이나『방』밖에는 못 하는 것이야.
問 : 평상심(平常心)이란 무엇입니까?
答 : 먹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 그대로가 평상심이지.
問 :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평상심입니까?
答 : 그렇지.
問 : 도인의 평상심과 속인들의 평상심은 어떻게 다른 가요?
答 :도인과 범부는 다르지. 중생은 모든 생활에 일일이 집착 하는 반면에, 도인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지. 평상심이 라는 것은 도인의 깨달은 경계를 생활화하는 것이지.
問 :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과 <생사가 없다는 것> 은 다릅니까?
答 :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생(生)하는 이치나 사(死)하 는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 진리 자체에는 생도 사도 없다.
問 : 깨닫고 나면 작용하는 망상이나 생각이 없습니까?
答 : 그대로 진법(眞法)으로 돌아가는 거지.
問 : 그러니까 망상 그대로가 보리(菩提)가 된다는 것입니까?
答 : 망상이란 자체가 없는 것이지.
問 : 욕심(欲心)과 탐심(貪心)의 차이는 어떠한지요?
答 : 오십보백보지.
問 : 스님들께서는 무심으로 소유욕 없이 살아가라고 하시는 데 중생들이 소유욕 없이 무심으로 살 수 있습니까?
答 : 그럴 수 있지.『참나』를 알면 온 법계를 알고 온 중생 과 한 몸이 되어 절대 평등이 되게 되지. 그렇기 때문 에 모든 사람들이 견성을 하면 지상이 불국토가 되고, 모든 백성이 부모 형제로 한 몸이 되어서 아귀다툼이 없고 항상 평온하고 안락하게 되지.
問 : 바른 선지식을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데 중생은 눈이 없 는데 어떻게 선지식을 바르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答 : 중생은 안목이 없기 때문에 바른 선지식을 가리기가 어 렵지.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스승에게 탁마(琢磨)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거든. 혼자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고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은 분을 따르면 백 생애를 닦아야 할 것을 한 생에 바르게 닦아 깨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 로 <이 사람도 선지식이고, 저 사람도 선지식>이라고 쫓아다니다 보면 사견에 떨어져서 정진에 진척이 없고 업에다가 업을 더 보태게 되지. 그래서 대도(大道)와는 거리가 멀어져서 깨달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야. 결국 본인이 정진을 해서 닦아야 하는 것이지.
問 : 눈 없는 사람은 선지식을 가리지 못하겠네요?
答 : 그렇지. 안목이 없이는 상대를 바로 볼 수 없지.
問 :《금강경》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리라> 고 하는데 중생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리 고 생활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答 : 중생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참으로 올바르고 건 전한 생활은 <내가 없는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 고, 그래야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問 : 아상이란 무엇입니까?
答 : <내가 제일이다, 내 법이 제일이다, 내가 잘 났다, 내 가 잘 한다, 내가 많이 안다, 내가 많이 가졌다> 하는 것이 다 아상에 속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처님법에는 대오(大悟) 하면 이런 것이 없게 되지.
問 : 재가자(在家者)는 어떻게 해야 참답게 사는 것입니까?
答 :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자기를 개발하는 수행을 하루하루 쌓아 가는 가운데 직분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길이지.
問 :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가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 으로 지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 : 참선을 하는 사람이 혼자서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 『참나』를 알기 위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고. 아주 값 진 생활이지.
問 :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에 있어서 그 차이점은 무엇입 니까?
答 : 출가자는 혼자의 몸으로 홀가분하고 재가자는 처자가 있어서 생활을 하니까 번거롭지. 그러나 최상승법에서 는 바른 신심으로 바른 법을 구하는 철두철미한 생각 을 갖고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수행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승속(僧俗)에 관계가 없지.
問 : 총림(叢林)으로 출가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答 : 안목이 근본인데 총림의 방장이라도 모두 안목이 투철 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거든. 절이 크다고 해서 일등 수행인이 사는 곳은 아니야.
問 : 출가하는 사람은 어떠한 곳으로 출가를 하여야 합니까?
答 :『참나』를 발견하는 데는 절대적으로 선지식(善知識) 이 근본이다. 선지식은 부처님의 대행인(代行人)이야. 출가 는 견성대오(見性大悟)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거든.
問 : 꿈과 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잠으로 인해서 꿈을 꾸는 것이지.
問 : 그럼, 꿈과 잠이 똑같은 것입니까?
答 : 잠을 자지 않으면 꿈이 없는 법이거든. 망상이 있는 중 생이 망상이 그대로 꿈이 되는 것이지.
問 : 음욕심〔性欲〕은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答 :전생의 습기로 축생이나 사람이나 다 익힌 것이지. 다겁 생에 익힌 것으로 아주 예민한데 이것을 없애려면 정진 해서〈일념삼매〉가 되어야 하지. 좋고 나쁜 것이 차 단이 되어서 깨달으면 모든 습기가 일시에 다 제거가 되지.
問 :《선가귀감 禪家龜鑑》에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이치로는 깨 달았어도 습기는 제하지 못했다> 하셨는데요.
答 : 그것은 모순이지. 육조대사도 금을 캐어 녹여서 잡금을 제하면 순금이 된다고 하셨지. 물에 있으나 산에 있으 나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성을 하면 습기와 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 번뇌가 곧 보리,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는데 번뇌에 놀아나게 되겠는가.
問 : 낮에는 화두가 잘 되는데 꿈속에 화두가 안 되는 이유 는?
答 : 아주 간절하게〈참의심〉이 순일되어야 꿈속에서도 화 두가 이어지게 되지.
問 : 조실스님은 화두가 언제 어디서나 꿈속에서도 이어졌 나요?
答 : 나는 결제, 해제에 관계없이 정진을 했었지. 아주 간절 한 일념이 지속되다가 깨달았지.
問 : 잠깐 사이에 깨치셨습니까?
答 : 잠깐 사이가 아니고 아주 간절하게 일념으로 화두의심 이 지속되다가 깨쳤지.
問 : 시간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答 : 모르겠다.
問 : 며칠간은 일념이 지속된 것이지요?
答 : 전 생애를 화두에 걸고 생활을 했었지.
問 : 태고 보우국사는 오매일여가 90일간〔가을∼이듬해봄〕 이어졌다고 하는데요?
答 :〈선정삼매〉에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고 세월이 가는 것이지. 석가모니 부처님도 삼매에 드셔서 새가 둥지를 트는 것도 모르셨다고 하셨거든. 누구든지 삼매 에 들게 되면 길고 짧은 것을 논하게 되지는 않지.
問 : 외도(外道)들은 <기(氣)가 있어야 한다. 기를 잘 돌려야 한다>고 하는데 기(氣)는 무엇입니까?
答 :견성법은 기(氣)를 논하지 않고 오직 바른 안목을 논하지. 이 몸은 백년 이내에 없어지거든. 수행인은 그런 것 에 집착하지 않아야지.
問 : 죽는다는 것은 슬픈 것입니까?
答 : 가고 오는 것을 모르고,『참나』를 모르니까 적막하고 막막해서 슬프다고 하는 것이지.
問 : 죽은 후에도 자기가 닦은 것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지 요?
答 : 그렇지. 지혜·복덕·업, 이 세 가지는 가지고 가지.
問 : 참다운 근기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答 : 부처님의 대승법·최상승법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 아 들이는 대기(大機)를 말하는 것이지.
問 : 수좌스님들이 몇 년간 정진을 하다가 강원으로 들어가 는 것은 신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答 : 신심이 빈약하고 참다운 발심을 못한 고로 그러한 현 상이 일어난다. 출발 자체도 진정한 신심이 아니고 남 이 하니까 나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다가 정진이 힘들고 진취도 없으니까 자포자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지.
問 : 그러니까 한번 수좌가 되면 끝까지 수좌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答 : 그렇지. 발심한 사람은 구경에 이를 때까지 불퇴전의 신 심으로 정진을 해야 하지.
問 : 화두가 일념이 되기 전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 가요?
答 : 그렇지. 정진삼매의 진가(眞價)를 모르니까.
問 : 초보자에게 권하시는 책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나 육 조단경(六祖壇經)?
答 :《육조단경》이 좋지. 심요(心要)의 비결이《육조단경》 에 있지.
問 :《서장 書狀》은 어떻습니까?
答 :《서장》은 화두를 들고 공부하라는 거지.
問 : 조실스님께서도 전에《육조단경》을 많이 보셨습니까?
答 :《육조단경》을 수행의 길잡이로 삼았다.
問 : 결제 기간 중에 원주·다각 등 소임을 맡는 것은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答 : 禪은 동정(動靜)가운데서 익히는 것이지. 일거일동, 일상생활 가운데서 화두와 씨름을 하면서 익 혀야 하는 것이지.
問 : 선지식이란 말과 스승이란 말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스승은 은사·법사 스승 등 많고, 선지식은 부처님의 진 리를 깨달아 안목을 갖춘 분을 말하지.
問 : 현 사회에 불신풍조가 만연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答 : 탐(貪)·진(瞋)·치(癡)와 아만·교만·허세 때문이지.
問 : 도인은 어떠한 분입니까?
答 : 진리대로 생활하고 모든 사람을 평화로운 곳에 인도하 는 역할을 하지.
問 : 화두를 타는 방법이 있습니까?
答 : 삼배(三拜)하고 생각을 비우고 선지식이 일러주시는 말 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問 :『無자 화두』를 참구할 때 <조주는 어째서 無라고 했 는가?>하고 그 뜻을 참구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입 니까?
答 : 그렇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 고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 가?>하고 오매불망 조주스님의 뜻을 참구하는 것이지.
問 :『이 뭣고』참구할 때 <이∼>만 바로 의심을 하면 <뭣고>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요?
答 : 화두를 드는 데에는 화두 전체를 분명히 챙기는 것에 바로 화두를 드는 묘미가 있는 법이지. 육조스님이 시 삼마(是甚 ) 화두를 들 때 <모든 사람에게 한 물건이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르니 이것은 무엇인고?> 했으니 화두 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의심이 철저해야 된다.
問 : 경계가 날 때마다 점검을 받는 것이 좋습니까?
答 : 말을 들어보고 바르게 지도를 하니까 자주 물을수록 좋 지.
問 : 묻는 허물보다 묻지 않는 허물이 더 큽니까?
答 : 서울을 가야 하는데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되지.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곧바로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지.
問 : 어떻게 해야 업장 소멸이 됩니까?
答 : 참회하는 것도 조그마한 업장 소멸은 되는 것이지만, 견성을 해야 모든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지.
問 : 업(業)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答 : 생활 가운데에 가지가지 습기(習氣)로 이루어진다.
問 : 생각이 업이라고 하는데요?
答 : 진법(眞法)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법이지만 중생은 진법을 모르니까 생각 생각이 다 습이 되고 업이 되는 것이지.
問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면 배고프고 오줌 누고 하 는 생각들이 나지 않습니까?
答 : 그 가운데에서도 일념이 지속되는 것이지.
問 : 망상은 망상대로 약간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答 : 화두가 일념이 되면 망상이 차단이 되지.
問 : 화두법 이전에는 무슨 법이 있었습니까?
答 : 염불·독경·관법(觀法)이 있었지. 육조스님 이후로 무 수한 도인이 난 것은 최상승법으로 인하여 모든 습기가 제거되고 몰록 진리의 문이 열려진 것이지. 〈간화선〉만 바로 하면 누구나 견성도인이 되거든. 시 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진리에 접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화두이지.
問 : 정진 중에 과거 망상이 많이 떠오르고 미래 망상은 적 은데 왜 그렇습니까?
答 : 과거의 습기로 인해서 망상이 떠오르는 것이지.
問 : 많이 보고 듣는 것이 업식만 더 보태는 것입니까?
答 : 그렇지.
問 : 그럼, 산중에서 안 보고 안 듣고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答 : 그렇지도 않지. 선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힘만 허비하는 것이지. 지혜로운 자는 선각자(先覺者)를 친견하여 바른 수행법 묻기를 좋아하지.
問 : 어떤 스님은 수좌가 300∼400명이 되어도 그 분이 뜻하 는 바대로 바르게 실참실구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조실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答 : 이 일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십분 신심과 용맹심을 가져서 선지식 스님의 지도를 받아 수 행을 잘 하면 십중팔구는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있지.
問 : 선지식 스님을 만날 때마다 화두 참구 방법을 물어 보 아야 합니까?
答 : 바른 선지식을 만나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익혔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問 : 일반인들이 화두 참구를 하다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 서 살아남지를 못하는데,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정 립해야 합니까?
答 : 여러가지 생각에 많이 시간을 빼앗기는데 이것을 화두 로 돌리면 사심(私心)이 없어지게 되지. 일상 생활을 직 분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에 가지가지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력할 것 같으면 마음의 지 혜가 계발되어 더욱 더 잘 사는 국토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일가(一家)가 되어서 발전하고 평화가 오지. 그 렇기 때문에 대통령도 농부도 정치인도 누구나가 참선 을 수행해야 마음의 평화가 오는 법이지.
問 : 산중에서 20∼30년 정진해도 견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세속에서 처자와 살면서 견성할 수 있겠습니까?
答 : 진실하게 얼마만큼 바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렸지. 일념 이 순일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야. 장시간(長時間)을 요 하는 것이 아니거든. 일념이 지속되어서 홀연히 마음땅 〔心地〕을 돌이키는 것이 견성이지. 시간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야.
問 : 어떤 스님은 1주일 간 용맹정진을 해서 트이지 못하면 견성을 못한다고 그러셨는데요?
答 : 형식적이 아니라〈참의심〉이 일념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 하루가 지속되어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지.
問 : 무심(無心)과 무아(無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마음 가운데 따로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 〈무심〉하면〈무아〉를 누리고,〈무아〉하면 자연히〈무 심〉을 수용하느니라.
問 :(動)하지 않기 때문에 무심 속에서 화두를 잡고 고기를 먹고 술을 먹어도 업식이 나지를 않는다고 하는데, 견성 전에는 업식이 나는 것 이지요?
答 : 견성을 해서 진리를 봐야 정법이지. 무심 상태라도 진리 를 보지 못하는 가무심(假無心)은 업식이 나는 법이지.
問 : 화두 공안 중에서도 체(體)를 나툰 공안이 있고 용(用) 을 나툰 공안이 있다고 하는데요?
答 : 체와 용에 국한되지 않고 향상구, 향하구, 최초구, 말후 구, 일구, 여래선, 법신구 이러한 등등의 화두 공안이 나열되어 있지.
問 : 용(用)을 나툰 공안은 대표적으로 덕산탁발(德山托鉢)· 남전참묘(南泉斬猫)·노파소암(老婆燒庵)이 아닙니까?
答 : 그렇지 않지. 체니 용이니 논할 수가 없지. 그것은 선 지식이 학자를 접할 때 밝혀야 하는 것이지.
問 : 법거량 할 때 차별지(差別智)를 살펴야 한다고 하셨는 데, 요번에〈차별지〉를 답을 못하고 다음에 정진을 하 고 나서 그〈차별지〉를 설명하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答 : 바른 눈이 열리면 일체 법문이 일시에 열리게 되지.
問 : 세상살이가 고통이라고 하는데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 입니까?
答 : 나고 죽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 되지.
問 : 전에 한번 맛본 경계를 또 다시 맛보려고 하는데도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정진의 힘을 못 얻어서 그렇지.
問 : 잠은 몇 시간 자야 합니까? 答 : 참선 공부를 성취하려면 4∼5시간 자는 것도 무방하지.
問 : 화두를 방편이라고들 하는데요?
答 : 화두를 실답게 참구해서 실답게 깨달으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되지.
問 : 식(識)이 맑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答 : 분별이 다하면 맑게 되지.
問 : 화두법에서 식이 맑다는 것과 관법(觀法)에서 식이 맑다 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대동소이한 것이지.
問 : 대승법에서의 견성과 소승법에서의 견성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答 : 소승법에서는 견성이 없지.
問 : 일념삼매에 들었다는 것이나 외도가 선정에 들었다고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答 : 견성을 못하면 사견이고 진정한 선정과 일념삼매가 될 수 없지.
問 :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의 차이는?
答 : 견성을 해야 정정(正定)이고 못하면 사정(邪定)이지.
問 : 화두를 참답게 실참실구(實參實究)를 하려면 어떻게 해 야 합니까?
答 : 눈 밝은 선지식 밑에서 공부하면서 법문도 듣고 자주 묻고 해야지.
問 : 눈을 감고 정진을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答 : 눈을 감고도 일념이 지속되면 관계가 없는데 그렇지 않 으면 혼침과 망상에 떨어지느니라.
問 : 호흡하는 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答 : 따로 권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데 일부러 따 로 익히려고 하면 어렵지. 호흡에 관계하지 말고 화두 에 전념하는 것이 힘을 더는 것이니라.
問 : 터〔道場〕는 어떻게 보십니까?
答 : 신라 고찰도 명당에 지어졌었고, 터가 좋으면 생기가 나 고 좋지만 선지식이 없으면 소용없지. 선지식도 있고 도량이 좋으면 금상첨화지.
問 : 수좌스님들이〈터〉가 세어서 정진을 못한다고 하는 것 은 어떻게 보십니까?
答 : 마음이 굳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問 :〈터〉가 센 곳에서 수행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答 :〈터〉가 세고 세지 않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問 : 외마(外魔)가 있습니까?
答 : 마음의 분별이지.
問 : 가위에 눌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答 : 자나깨나 화두를 일여하게 들면 없는 것이지.
問 : 섬·바닷가에 도인이 적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도인은 인연에 따라 곳곳마다, 어디든지 머무르게 된다.
問 : 하안거보다 동안거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答 : 둘 다 중요하지. 발심하기에 달린 것이지.
問 : 30∼40세에 힘을 얻지 못하면 내생으로 넘어가고 이 나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答 :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의 신심을 내어 간 절한 마음으로 바른 지도를 받아 바르게 하느냐에 달 린 것이지.
問 : 현시대의 도인이 신통이 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일상 생활 그대로가 다 신통이지. 별달리 신통을 구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야.
問 : 평소에 화두가 안 되면 숨 떨어질 때에도 화두가 안 될 것인데, 임종시에는 아미타불이라도 염(念)해야 하는 것 입니까?
答 : 아미타불을 염(念)하는 정신이 있으면 화두를 바로 챙기 는 것이 더욱 좋지.
問 : 시신(屍身)을 화장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 하는 것이 좋 습니까?
答 : 화장을 하는 것이 좋지. 중생은 몸에 혼(魂)이 머물고 있는데 시신을 태워 없애고 법문을 해 주어서 집착을 떠나 없애 보내는 것이 좋지.
問 : 풍수가들은 묘자리의 씀에 따라서 집안이 흥하고 망 한다고 하는데요?
答 : 절집 견성법 문중에는 중요시 여기지 아니한다.
問 :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세다고 하는데요, <도고마성 道高 魔盛>이 사실입니까?
答 : 잘못된 인식이니라.
問 : 정진 중에 꿈 가운데에서 몽사(夢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요? 答 : 다 전생의 업이지.
問 : 조상이 천도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答 : 천도를 잘하면 영가가 집착을 놓고 좋은 곳으로 저절로 가게 되지. 신심과 정성으로 환희심을 다해서 영가를 천도할 것 같으면 자연히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 어 가지. 천도는 법력을 의지하여야 되는 것이다.
問 : 대중 선방 생활과 토굴 생활과의 장단점은 무엇입니까?
答 : 선지식이 주석하는 회상이라사 고귀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지 않고는 용두사미에 불과하다.
問 : 끝으로 달마가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答 : 조사는 무의(無意)니라.
問 : 조사는 왜 뜻이 없습니까?
答 : 억!!! 〔일할(一喝)하시다.〕
問 : 禪의 정의를 내려 주십시오.
答 : 다겁생에 걸쳐서 자신에게 입력되어진 번뇌(業)를 소멸 시키는 것이다. 이미 녹음되어진 테이프를 원래 상태로 되돌이켜 공테이프를 만드는 작업을 禪이라 한다.
問 :관법(觀法)수행과 화두법(話頭法)수행과의 차이점은 무엇 입니까?
答 : 정진을 할수록 <관법이다, 화두법이다>에 얽매이지 않 게 된다. 두 가지 모두 번뇌를 끊으려는 방법이고 명칭 이 틀릴 뿐이다. 초기 수행에는 관법 수행으로 점차적으 로 수행력을 쌓아 가다가 공부가 깊어지고 무르익은 경 지에 이르렀을 때에 화두를 들어야 한다. 옛날 스님들이 스승이 한 번 할(喝)하는데 깨쳤다는 것도 자신의 수행 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깨침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꼭 화두 법으로 수행해야 한다.
問 : 견성(見性)은 무엇입니까?
答 : 자기 자신의 업(業)으로 생각하여서 중생심으로 <깨쳤 다, 터졌다> 하는 것이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자성(自 性)자리이므로 따로 깨침이란 것은 없는 것이다. 문을 닫아도 공기는 통하는 것과 같이 본래의 성품이 자유 자 재하고 신통(神通)하다. 따라서, <견성했다>고 스스 로가 말하는 것은 죄가 된다.
問 : 대승(大乘)의 견성과 소승(小乘)의 견성은 다릅니까?
答 : 소승적 견성은 <견도 見道>로 道의 이치를 이른 것으 로 이 때는 영통(靈通)이 나게 되고, 대승적 견성 <확 철 대오를 해야 견성했다>고 하는 것으로 신통(神通) 이 나게 된다.
問 : 평상시 수행인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答 : <중생에게 모든 것을 회향한다>는 명(命)보시 사상을 가져야 한다. 평소 선행을 쌓고 양심적인 생활로 담담 한 마음을 기른다. 허공과 같이 담담한 마음이 되어야 정진을 할 수 있는데 번뇌를 끊는 마음으로 정진을 하 기 때 문에 공부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問 : 시간은 어떻게 조절하는 것이 좋습니까?
答 : 하루 일과를 <정진·수면·일>로 나누고 각각 3분의 1씩 할애한다.
問 : 어떤 상태에서 정진에 효율이 오릅니까?
答 : 방안을 너무 덥지 않게 하여 머리는 차고 발은 따뜻하 게 한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상태이면 정진에 효율 이 오른다.
問 : 새벽에 일어난 후에 정진을 하게 되면 곧바로 혼침(昏 沈)에 떨어지는데, 방지책이 있습니까?
答 : 이런 경우에는 밖에 나가 찬 공기를 쐬고 산책을 한다 든지 하여 머리를 맑게 하고 졸음을 완전히 제거하여야 한다. 졸음을 완전히 없앤 후에 정진을 해야만 혼침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問 : 여러 번 삼매(定)에 드셨었다고 하셨는데, 삼매에 들었 을 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答 :〈정〉에 들게 되면 시간관념이 없어지고 배고픔도 없 고 아득해진다. 한 번 진정한 정에 든 힘은 몇 년이 지 속되어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
問 : 삼매에도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지 않습니까?
答 : 삿된 정은 물질을 이용한 사술(邪術)이고, 바른 정은 모 든 생각이 쉬어서 신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問 : 삼매에 못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마음을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정진을 하기 때문 에 장애(魔)가 생겨 삼매에 들지 못하게 된다.
問 : 오늘날 승가의 문제점과 선지식들의 폐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答 : 스님들이 신자들에게 받기만 하는 습(習)에 젖어서 고마 움을 모르고 세상살이를 쉽게 보는데, 스님들이 남에게 베푸는 생활로 전환해야 한다. 선지식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가르쳐 주지 않고 알음알이로 여겨서 제자들을 꾸짖 으며 제자들을 끝까지 성취시키려는 책임감이 없다. 옛 선지식들은 평소의 행동으로 제자를 가르쳤었고, 자 신의 상좌 하나에 목숨을 걸고 교육을 시켰었다.
問 : 현 사회에서 포교의 비중이 높아져 가고, 많은 스님들이 포교활동을 하고 계신데, 중생 포교를 어떻게 보십니까?
答 : <자신제도가 곧, 중생제도이다.>
問 : 결제 때 스님의 특별한 생활 방법이 있습니까?
答 : 자연스럽게 생활한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인력을 투입 하지 않는다.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시계를 없 애고 아주 자연스런 상태에서 정진을 한다.
問 : 결제를 90일 간으로 정하고 수행하십니까?
答 : 결제기간이 90일이라면 실제 결제기간은 10∼15일 정도 된다. 90일 중에서 10∼15일 정도가 실질적인 수행일이 다. 부처님께서는 하근기 중생은 110∼120일, 중근기 중 생은 100∼90일, 상근기 중생은 90∼80일 간을 결제기 간 으로 정하셨다.
問 : 결제기간에도 도량석과 예불을 꼭 지켜야 합니까?
答 : 관계없다. 모든 것은 형식적인 것이다. 수행자는 <禪 밖에 없다>는 신조로 생사를 걸고 정진해야 한다.
問 :〈용맹정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答 : 금생에 딱 한 번, 화두타파 직전에 하는 것이다. 정진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스승·조국의 은혜를 생각해서 절을 한다. 뜻을 아는 시봉자 이외에는 모든 외부와의 인연을 끊는다.
問 : 절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절을 할 때에 선근이 심어지고 내생까지 이어진다.
問 : 정진하실 때에 눈을 뜨고 하십니까? 아니면…….
答 : 눈을 뜨고 정진하면 피로해서 눈을 감고 정진한다.
問 : 눈을 감고 정진을 하면 혼침이 오지 않습니까?
答 :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잠이 온다. 잠을 조복받기 위해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도 있었고, 젓가락을 뾰족하 게 갈아서 다리를 찌르면서 공부를 했었다.
問 : 호흡은 어떻게 하십니까?
答 : 따로 호흡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問 : 일반적으로 출가를 해야 정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출가 생활과 속가 생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答 : 수행에는 출가자와 속가자의 차이는 없다. 오히려 출가 자는 구속적 생활로 인한 심리적 갈등이 심화되어 생활 이 힘들다고 본다.
問 : 도인(道人)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答 : 업에서 풀려난 자연인·자유인이다. 위로는 불조(佛祖) 를 공경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
問 : 화두를 깊이 참구할 때 괴로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答 : 과거생의 업이 제거되면서 뇌를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 에 괴로운 것이다.
問 :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答 : 마음은 바다와 같이 잔잔한 물이고, 생각은 그 위의 거 품이다. 중생은 본바탕 마음을 모르고 거품을 진짜로 여기고 살고 있다.
問 : 대체로 해안가와 같이 외곽 지역이나 변방 지역에 거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신심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변방에는 주변 환경에 풍파가 많고 심하기 때문이다. 고 래(古來)부터 신(神)에게 제를 지내는 풍습이 많았고 지 금도 이런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問 : 어떤 것이 정법(正法)입니까?
答 : 견성 전은 외도(外道)이다. 자기 위주의 삶은 외도(外道)이고 이타적인 삶은 복을 짓는 일이다. 이 두 가지를 떠난 것이 정법(正法)으로 공(功)과 덕(德)이 합일되어야 공부를 성취한다. 정진을 하면 피아노건반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모 든 것에 능통하게 된다. 치우치는 것은 외도이다.
問 :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答 : <스승과 도반·도량>이다. 스승이 가장 중요하지만 세 가지 모두가 화합이 되어야 한다.
問 : 수행자가〈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터〉가 센 곳에 는 정진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答 :〈터〉는 무정(無情)이고, 사람은 유정(有情)이다. 유정 이 무정보다 높은 것이 이치인데 오히려 사람들은 무정 인 〈터〉를 더 높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손톱이나 머 리카락은 유정과 무정이 같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수 행하는 사람은 유정과 무정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
問 : 대부분의 큰스님들은〈터〉가 센 곳을 눌러 지내시는데, 큰스님들과 같이 도력이 높아지면〈터〉에 구애받지 않 고 어느 곳에서든지 지낼 수 있게 됩니까?
答 : 각 도량에 따라 틀리다. 스님들의 인연에 따라서 도량신이 바뀌어지고 도량의 상 주신(常住神)과도 맞아야〈터〉를 누르고 지낼 수 있게 된다.
問 : 수행자에게 특별한 인연지가 있습니까?
答 : <고향·입산지·성취한 자리>를 수행인의 3지(地)라고 한다. 이 세 곳은 중요하므로 잊지 말아야 한다.
問 : 선방은 어느 곳이 좋습니까?
答 : 비산비하(非山非河)가 좋다. 자연적인 기(氣)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면 수행자가 기(氣)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에 정진에 도움이 된다.
問 : 산에서 도인이 많이 나오고 해안에서는 도인이 나기 어 려운 것은......?
答 : 물은 자력(自力)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전기도 기를 빼앗기 때문에 전등을 켜는 것보다 촛불을 켜고 정진하 는 것이 좋다.
問 : 스님은 하안거보다 동안거를 중요시하고 동안거 결제는 꼭 하시는데.....?
答 : 기(氣)의 작용을 알기 때문이다. 동짓달 중순 이후에는 다시 기가 상승작용을 하는 기의 순환이 잘 이루어진 다. 기가 움직이는 여름철에는 기의 힘을 받을 수가 없 지만 겨울철은 기가 땅에 뭉쳐 있어서 수행자가 기의 힘을 받을 수 있다.
問 : 바람은 무엇입니까?
答 : 지·수·화·풍 사대(四大)중에서 예리한 것에 속한다.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홀로 다니면서 소리를 낸다.
問 : 둔갑술은 무엇입니까?
答 : 혼이 다른 짐승의 가죽에 들어갈 수 있다.
問 : 지구를 중심으로 한 인종의 형성과정은 어떻습니까?
答 : 피부색의 갈림으로 세계는 서로 대립하고 있으며 각 국 은 국업(國業)에 따라 분류되어진다.
問 : 임종시에는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答 : 수행자는 생(生)과 사(死)를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
問 : 죽은 후의 경계는 어떻습니까?
答 :평소에 익힌 습(習)에 의한 업(業)에 끌려간다. 죽은 후 혼은 49일 간 머물다가 다른 곳에 태어나게 되는데, 49 일 동안 고통을 받게 된다. 평소에 집에 애착이 많았던 사람은 죽은 후에 그 집의 개로 태어나서 집을 지키는 경 우도 있다. 애착하는 것이 없으면 죽은 후에 혼은 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問 : 윤회는 어떻습니까?
答 : 수행력이 높을수록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윤회가 빨 리 이루어진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과거생의 인연 있는 혼들이 그룹으로 몰려다니면서 따라서 같이 태어 나게 된다.
問 : 극락이 있습니까?
答 : 윤회가 없는 것을 극락이라고 한다. 극락과 지옥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식(識)이 맑게 되면 극락 이 된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계속 염하거나 극락세계로 가는 습을 익히게 되면 극락에 가게 된다.
問 : 죽은 후에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答 : 신체의 모든 부분이 사대(四大)로 각각 흩어지게 된다. 같은 사대끼리 뭉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問 : 임종 전이나 후에, 망자에게 염불을 해 주거나 경전을 읽어 주면 혼이 제도되어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됩니까?
答 : 각자의 근기에 따라서 제도가 되기도 하고, 제도가 되지 않기도 한다. 기름은 기름을 낳고, 중생은 번뇌를 만들 고, 부처님은 부처님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평 상시의 습에 따라서 염불을 받아들이는 혼도 있고 듣지 않 는 혼도 있다.
問 : 마(魔)란 무엇입니까?
答 : 수행에 여러 경계가 나타나고 마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 다. 마란 다겁생의 번뇌가 수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 로 <염식(染識)이 풀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問 :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 하여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세 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答 : 번뇌(염식)가 제거될 때는 하나가 수천 개로 분산되어서 여러 형태로 되어 없어진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번뇌가 크게 없어지게 되고, 내생에 받을 고통을 미리 금생에 다 받게 된다. 가능하면 금생에 모든 고통을 다 받는다 는 자세로 정진을 해야 한다.
問 : 마의 대처 방안은 없습니까?
答 : 마는 염식작용으로 근본뿌리가 없는 것이다. 다겁생으로 익힌 나의 업(業)이 벗어나는 과정이므로 <저것이 바로 나로구나>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를 당할 때 의 마음상태에 따라서 크게, 작게 느껴지게 되기도 한다. 타의적인 힘으로 막으려 하면 공부에 진전이 없게 된다. 가능한 한 방편을 쓰지 않고 목숨을 걸고 관문을 통과해 야 한다.
問 : 몽사(夢死)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자기 번뇌를 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수행하지 말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정진을 해야 한다.
問 : 꿈은 무엇입니까?
答 : 꿈이란 자기의 염식이 풀려 나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다. 정식(淨識)의 장엄된 꿈은 부처님·보살님들이 나타 나는 것이고 염식(染識)의 장엄된 꿈은 삿된 것이 나타 난다. 수행의 초기에는 꿈으로 마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 은데 처음에는 강하게 나타나다가 점점 약해진다. 미 래의 일들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問 : 세속인에게 마가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答 : 수행은 때를 벗기는 작업인데, 세속인들은 때를 묻히면 서 살고 있다.
問 : 〈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答 : 마음에 두지 않으면 업이 형성되지 않는다. 금생에 지은 업은 7∼10일 기도로 소멸될 수 있지만, 전생의 업은 쉽 게 소멸되지 않는다. 90%가 전생의 업이고 작은 업이라 도 지은 것은 금생에 몇 배로 불어나게 된다.
問 : 귀신은 어떻습니까?
答 : 인간이 귀신보다 우월한데 배짱이 적어 눌려 산다. 선신 (善神)과 악신(惡神)이 공존하고 있는데 세속에는 아귀 종류가 많고 도량에는 도량신이 있다.
問 : 무섭다는 것과 겁난다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答 : 본능적인 것이다. 무섭다는 것은 자기의 몸을 숨기는 것 이고, 겁은 숨이 끊어질까 봐 두리번거리는 것을 뜻한다.
問 : 인과(因果)란 무엇입니까?
答 : 도(道)가 곧, 인과(因果)이다. 수행을 할수록 인과가 확 실히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인과는 정신과 물질에 똑같이 적용되고 인과의 양은 복이고, 질은 수행력이다. 인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고 꿈에서 음식을 많 이 먹고 깨면 배가 아픈데 탐심에 의해 인과가 붙는 것 이다. 현대인에게 병(病)이 많은 것도 인과를 모르고 자 신에 게 주어진 복 이상의 것을 인위적으로 성취하려는 탐심에 원인이 있다.
問 : 복(福)이란 무엇입니까?
答 : 남에게 베푸는 과정에서 업이 소멸되어지고 남에게 베 푼만큼 자신에게 복이 된다. 복을 짓는 그대로 자기자 신의 통장에 예금되어지게 된다. 복을 많이 쌓으면 천 상계에 태어나게 되는데 점점 복이 감해져서 인간계로 오게 된다. 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것도 새로 복을 짓지 않고 나머지 복을 다 쓰게 될 때의 경우가 많다. 현재 의 사찰도 숨은 개개인의 복력으로 유지되고 있고 복이 많으면 악신도 선신으로 변한다.
問 : 복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 것입니까?
答 : 재물을 아껴 써서 남에게 베푸는데 주변 여건도 살펴야 하고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성심 성의껏 해야한 다. 무엇보다도 진리(眞理)에 맞게 복을 지어야 한다. 가 사를 보시하는 경우에, 옛날 가사는 <진리는 막힘이 없 다 >는 사상에서 가사 바느질을 막힘이 없이 하였는데 요즘에는 이것을 무시하고 바느질을 한다. 이렇게 진리 에 맞지 않게 시주한 사람도 죄를 짓게 된다.
問 : 토굴 수행하실 때의 마음가짐은 어떤 것입니까?
答 :회향처로 생각하며 목숨을 내놓고 정진한다. 정진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토굴로 떠나기 전날 부모님·스승·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해서 절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토굴생활을 할 때에 스스로의 약속을 굳게 지 키게 된다. 평상시 거대한 배짱을 갖고 있는 인간이 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問 : 대중선방생활과 토굴생활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입니까?
答 :대중선방은 초보 수행자에게 알맞다고 생각한다. 대중적 습의를 익히게 되고 여럿이 생활을 하니까 의지는 되지 만 공동생활에 신경이 많이 써지게 되고 시간에 구애를 받게 되어 깊은 정진을 할 수가 없다. 공부를 깊게 하려 면 토굴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問 : 토굴은 어떤 것으로 짓는 것이 좋습니까?
答 : 자연 소재로 짓는 것이 좋다. 나무나 흙으로 지으면 자 연적으로 통풍이 되어 호흡에 좋고, 시멘트로 지은 집은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問 : 계획을 세우고 토굴 생활을 하십니까?
答 :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몸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 목숨을 내놓고 한다. 배짱을 크게 갖는다. 모든 경계를 나자신으로 생각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동요하지 않는 다. 억지로 하려 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한다. ( 평소에도 이와 같이 수행한다.)
問 : 음식은 어떻게 드십니까?
答 : 미리 며칠 분의 밥과 국을 해 놓고 먹는다. 밥은 묽게 하고 물은 많이 먹지 않는다. 반찬은 된장이나 김으로 한다.
問 : 씻는 것은 어떻게 하십니까?
答 : 피부 보호를 위해서 자주 씻지 않고, 머리와 수염도 깎 지 않고 지낸다.
問 : 혼자서 토굴생활을 하시면서 여러 경계를 당하셨을 텐 데, 그럴 때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答 :혼자서 정진을 하면 경계를 더 많이 겪게 되는데 경계 가 생기면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쳐 가는 것 같이 무심하게 그대로 넘긴다. 모두 과거생에 내가 살아온 모 습들이 나타나는 것이지, 타의에 의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내 가 지어 놓은 번뇌를 내가 그대로 받는 것으로 형상에 집착하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問 : 고기를 먹는 것이 나쁜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고기는 벌레(蟲)들이 모여서 살이 된 것이다.
問 : 채식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答 : 채식을 함으로써 업이 점점 벗겨진다.
問 : 수행인에게 좋은 음식과 건강요법을 소개해 주십시오.
答 : 채식을 하고 소량을 먹는다. 자연요법으로 해풍(海風)을 몸에 직접 쐬면 좋다.
問 : 파·마늘 등을 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 음심(淫心)이 일어난다.
問 : 염분(소금)의 섭취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答 : 몸 자체에 힘이 있다. 싱겁게 먹는다.
問 : 음식 조리법은 어떻게 합니까?
答 : 불기운을 쐬지 않을수록 좋다. 식은 음식이 영양분이 많 다. 기름은 피부호흡을 막기 때문에 나쁘다.
問 : 그릇은 어떤 것을 쓰는 것이 좋습니까?
答 : 나무같이 자연적인 것이 기가 돌게 되어 좋다.
問 : 의복은 어떻게 입는 것이 좋습니까?
答 : 혈이 잘 도는 헐렁한 것이 좋다.
問 : 신발은 어떤 것이 좋습니까?
答 : 발바닥에 충격을 주어서 피를 빠르게 돌게 하는 신발이 좋다.
問 : 방석은 어떤 것이 좋습니까?
答 : 자연산인 목화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蒜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진로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를 꽉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 黃檗 ―
무진년(戊辰年) 동안거 수선화(현담)와의 문답 -진제대선사
문 : 조실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사상이 육조(六祖)이후 마조(馬祖) 로 내려오는 것이 정맥(正脈)이고 하택(荷澤)- 규봉(圭峰)- 보조(普照) 로 내려오는 문중은 문밖 사람이라 정맥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돈오돈 수는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없는 것 입니까?
답 : 그렇지. 일체번뇌(一切煩惱)와 미세망념이 몰론 끊어진 것이지.
문 : 종정스님과 여기 조실스님 가풍은 돈오돈수 사상이지요?
답 : 그렇지. 육조문하(六祖門下)와 오종(五宗)이 벌어졌고 오종은 모 두 돈오돈수 사상이지.
문 : 깨친 다음에 인가(認可)를 받습니까? 깨치기 전에도 인가를 받습 니까?
답 : 깨친 다음에 일체법문(一切法門)에 막힘이 없어야 인가를 받는 것이지.
문 : 깨친 후 탁마하여 확실하다고 인가해서 은밀히 전해진 후에도 미혹한 것이 있으면 또 다시 점검받는 경우도 있습니까?
답 : 향상구(向上句)가 해결되면 다시 더 닦고 깨달을 것이 없는 것 이지. 법신구(法身句)나 여래선(如來禪)을 가지고 알았다는 것은 종사 (宗師)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 마조(馬祖), 임제(臨濟), 덕산(德山)의 살림살이를 모르는 것이야. 마조선사께서 향상구를 제창하셨으니, 그 문하들이 모두 향상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니고 임제, 덕산의 돈오돈 수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바른 안목이 열리지 못하고 점수의 물이 잔뜩 들어서 큰 병폐가 되는 것이지. 육조대사(혜능)도 하택은 지해인(智解人)이라하셨고, 오조대사(홍인)는 신수(神秀)를 문 밖의 사람이라 하셨거든. 반야다라존자의 수기를 받으신 마조선사는 선(禪)에 대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안목을 지니신 분으로 마조의 가 풍은 독특한 것이야.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보다도 마조선사가 더 안목이 투철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백장(百丈), 남전(南泉), 귀종 (歸宗)이 마조의 법을 이어받아 이 법이 중국 천하를 덮게 되었고, 임 제, 덕산도 바로 이 법을 터득한 것이지. 임제, 덕산의 법이 곧 마조의 법인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지만 이 법을 바로 알면 돈오돈수이고 이것이 부처님의 바른 수행법이 되는 것이야.
문 : 돈오점수에서는 육조스님이 16년간 사냥꾼과 지낸 기간을 보림 (점수:漸修)으로 보는데 스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담 : 돈오 후의 점수 기간이 아니라 시절 인연(時節因緣)이 있는 것이 지. 오조대사도 육조대사에게 시절을 기다리라고 부촉 했거든. 석가 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을 펴는 데도 시절 인연이 있 었던 것이지. 시절 인연이 도래하지 않으면 법을 펼수 없고 역행하게 되는 것이거든. 귀종선사는 마조선사의 제자인데 어느 납자가 어떤 것이 보림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한 티가 눈에 가리면 어지러이 허공 꽃이 떨어진다고 하셨단 말이야. 귀종선사가 아니면 이렇게 말을 못 하지. 이것을 바로 들을 줄 알면 모든 종사의 본분사(本分事)를 다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근래 우리나라 선지식들에게 돈오점수 사상이 있게 된 것이지. 한 티가 눈에 가리면 허공꽃이 떨 어진다고 한 뜻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사의 눈을 바로 갖추지 못했 다고 보는 것이지.
문 : 돈오점수 사상은 이변지(理邊智)가 부처님과 똑 같아야 되는 것 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변지(事邊智)는 부처님과 같은 능력이 나오지 를 않으니까, 사변지를 닦기 위해서 닦는 것이 점수라고 하는 것이 아 닙니까?
답 : 닦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 즉 이변지만 바로 보게되면 자 연히 다 갖추게 되는 것이지.
문 : 이변지만 확실히 보고 나면 사변지는 닦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 도 신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인가요?
답 : 그럼, 이변지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지.
문 : 소승사과(小乘四果)인 수다함(須陀含), 사다함(斯陀含), 아나함 (阿那含), 아라한(阿羅漢)도 견성을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라한이 견성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답 : 아라한은 성인(聖人)의 지위에 들어간 것이지. 부처님께서도 아 라한은 성인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하지만 이것은 달마(達磨)의 견성법과는 다른 것이지.
문 : 소승법(小乘法)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까?
답 : 소승법은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고 견성법과는 차등이 있 는 것이지.
문 : 확철대오(確撤大悟)하면 미세망념(微細妄念)이 없다고 보십니까?
답 : 그렇지. 돈오돈수(頓悟頓修)만 되면 미세망념이 없는 것이지.
문 : 망상이 있는데 놀아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망상이 아주 없는 것입니까?
답 : 망상이 없는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고 깨달은 경계 그대로가 일 상 살림이 되는 것이지.
문 :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아뢰야식 가운데 그대 로 훈습이 되는데 확철대오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훈습이 안됩 니까?
답 : 그렇지. 육조대사도 제 8식을 넘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면 종전의 분별 작용이 서지 못한다고 하신 것처럼 구경에 이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문 : 묘관음사의 비문에 적혀 있는 운봉선사로부터 향곡선사가 인가 를 받고 난 후에 함께 정진하던 도반(성철스님)이 물었는데, 향곡선사 께서 답을 못해서 더 정진을 하신 후에 답을했다....하는 것은?
답 : 향곡선사께서는 답을 못하시고는 소낙비가 오는 것도 모를 정도 로 탑에 기대어 삼칠일간 용맹정진을 하면서 참구하시다가 깨치셨는 데, 깨닫고 보니까 질문을 한 도반스님이 확실히 아는 것이 아닌 것을 별 도반스님에게 방망이를 놓고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었지. 이 두분 스님으로부터 다시 한국 선종이 임제, 덕산의 가풍을 재현하 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 어 있었거든.
문 : 여기서 향상구는 조사선(祖師禪)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 아니지, 별개야. 향상구를 알아야 차별삼매를 다 알게 되는 것이 야.
문 : 경허, 혜월로 이어지는 법맥을 운봉선사가 향곡선사에게 전하신 것인데, 향곡선사께서 인가를 받은 후, 도반의 물음에 막혀서 삼칠일 간 용맹정진을 해서 답을 했다는 것은 미진하기 때문에 더 닦은 것으 로 돈오돈수의 확철대오가 아닌 돈오점수 아닙니까?
답 : 고인들도 한 두번 늦게 깨달은 경우도 있지. 설봉선사(雪峰禪師) 도 암두선사(巖頭禪師)에게 한 두번 혼이 났었고, 임제선사도 두번 그 런 적이 있고.....구경각, 즉 향상구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선사들의 사상이 향상구를 모르고 여래선만 알 았지.
문 : 400년전의 서산대사까지도 돈오점수로 잘못 아신 것으로 보십니 까?
답 : 나중에는 돈오돈수를 재창했다.
문 : 그 위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환암 혼수(幻菴混修), 구곡 각운(龜 谷覺雲)같은 분들도....
답 : 태고 보우국사가 중국으로부터 직접 선법을 전수받은 뒤로 환암, 혼수 등의 선사들은 안목이 있었고, 그 후로 실낱같이 내려오게 된 것 이지.
문 : 임제, 덕산의 살활자재(殺活自在)하는 가풍이 향곡-성철선사로 부터 재현되었다고 보면 기존의 경허-혜월-운봉선사의 맥은 존중하되 거기에 맞추면 이론이나 논리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답 : 안 맞지. 우리가 허물을 짚고 넘어가야 돼. 임제 골수의 안목을 전수 받지 못 하다가 변화가 온 것이지.
문 :임제종(臨濟宗)에서 깨닫게되면 조동종(曺洞琮), 위앙종(僞仰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과 거량해서 서로 통하고 걸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까?
답 : 육조의 자손들도 다 똑같은 것이지. 임제의 가풍은 대기 대용(大 機大用)한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 잘못 알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지 알면 다 통하는 것이야.
문 : 큰스님께서는 법상에 올라가시기 전에 미리 법문을 준비하십니 까?
답 : 준비가 좀 되어야지. 아침에 좀 생각하지.
문 : 준비한다는 것은 미진한 것 아닙니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살활자재(殺活自在)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 미진한 것이 아니고, 줄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 사십구년 설법도 마찬가지야. 십이년간 소승법을 설하시고, 어 느 정도 교육이 된 후에 한 단계씩 올려서 대승법으로, 마지막에는 최 상승선을 설하신 것이지. 주장자만 들면 되는데 중생들이 이 뜻을 모 르니까 말로 하신 것이지.
문 : 정진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임종할때 매(昧)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평상시에도 화두가 안되는데 숨떨어질때 되겠습니까?
답 : 진실되게 화두가 순일하게 될 것 같으면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 나니....
문 : 숨 떨어질때 차라리 주력(呪力) 등으로 힘을 얻는 것만 못한 것 아닙니까?
답 : 정신을 못차리는데 주력이라고 해서 나을 것이 없지. 그러나 화 두 한 생각이 바로 이어지면 모든 산란심이 없어지고, 어느 것보다도 나은 것이지.
문 : 공안(公案) 화두법은 자력(自力)으로 보아야 합니까? 타력(他力) 으로 보아야 합니까?
답 : 절대 자력이지. 화두 일념이 지속되면 홀연히 타파가 되는 법이 야.
문 : 타력적인 기도나 정근(精勤)을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 까?
답 : 그것은 하근(下根) 중생의 신앙 생활이지.
문 : 복(福)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답 : 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삿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마음이 깨끗 하고 삿되지 않으면 일거일동이 선행(善行)이 됨이니 그것이 복의 원 천이니라.
문 : 덕(德)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답 : 덕도 복과 마찬가지이지. 남을 헐뜯지 않고 항시 본성의 깨끗한 성품을 따라서 평등하고 인아상(人我相), 아만(我慢)이없는 마음을 쓸 것 같으면 덕이 되지.
문 : 지혜(智慧)는 무엇입니까?
답 : 마음의 본 바탕을 봄으로 인해서 마음 광명이 열리니 이것을 지 혜라 하나니라.
문 : 중생은 어리석고 무명업식(無明業識)에 있다고 하지만 머리를 써 서 우주를 관찰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이것은 지혜와 다른 것입니 까?
답 : 지혜와 견음 알음알이는 다르지. 지혜는 본 바탕을 바로 보아서 체성(體性)의 광명을 찾는 것이고, 세상의 지식은 알음알이 분상으로 따지고 셈하는 것으로 과학이 이루어진 것이지.
문 : 묘관음사에서 정진을 하실 적에 해운정사(海雲精舍)를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요?
답 : 공부할 때에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
문 : 인가를 받고 나서 회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후 장소 를 물색하시던 중에 장수산의 맥이 뻗쳐 있는 것을 보시고 해운 정사 를 지으셨다고 하셨는데, 지금 짓고 계시는 108평 큰 법당 불사도 그 렇게 즉흥적으로 하신 것입니까?
답 : 3년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지.
문 : 중생들이 생각하는 알음알이 계산, 계획과 조실스님이 절을 지으 시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답 : 몰록 차이가 있지. 혜안으로 미래사(未來事)를 직견(直見)하고 바 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장소와 시주자와 여러가지 조건이 되어야지....
문 : 해운정사가 장수산의 정맥으로 조실스님의 인연도 있는 것이지 만, 불보살님의 가피도 입어서 절을 지으신 것은 아닌가요?
답 : 가피는 생각 않고 그냥 세속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펴기 위하여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지. 이렇게 좋은 조건의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숙세(宿世)에 많은 사람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 사 람들이 많이 오는 것보다도, 부처님법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바른 안목을 가진 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지.
문 : 업장 소멸이 된 사람과 업장 소멸이 안된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 업장은 과거의 여러가지 습기(習氣)인데 중생은 그 습기가 없어 지질 않지. 견성을 해야 없어지는 것이지.
문 : 견성을 해야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라면 조실스님은 업장이 소멸 된 것이네요. 업장이 소멸되지 않은 사람도 각기 업의 가볍고 무거 운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답 : 덜하고 더한 경중(輕重)이 있지.
문 : 업이 최초로 시작되는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답 : 본심본성(本心本性)을 한 생각 등짐으로 인해서 한 생각을 쫓아 서 온갖 생각이 점차 일어난 것이지. 모두 자성삼매(自性三昧)를 수 용하면 생각이 붙지를 못하는데 한 생각 일어남으로 인해서 퇴보하게 되어 천차만별이 일어 나는 것이지.
문 : 깨달으면 확연하게 다 알게 됩니까?
답 : 그렇지, 일체지(一切智)를 갖추면 다 알게 되지.
문 : 확연하고 명백하게 아는 것을 확철대오(確撤大悟)라고 하는 것이 고, 희미하게 아는 것을 그냥 안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 : 구경(究境)에 이르러야 바로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지.
문 : 화두를 하면 마음이 편안할 때 있지만, 괴로울 때도 있는데 이것 은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답 : 그렇지. 분별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니기 대문에 그런것이지.
문 : 조실스님이 보실때 한국 불교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 모두를 한 곳에 모아놓고 참선을 지도해서 인상(人相), 아상(我 相)을 쉬게 하여 마음 광명을 찾음으로 인해서 종단이 화합하고 온 나라가 불국토(佛國土)가 될 것이야. 껍데기 불교는 소용이 없는 것 이지.
문 : 체중현, 구중현, 현중현의 삼현(三玄)이 임제의 가풍이 아니라고 스님은 그러시는데, 임제록에는 삼현이 나오는데요?
답 : 그것은 고탑주라는 후손이 자기의 사견(邪見)으로써 성립시킨 것 이지. 임제선사의 삼현 현지(玄旨)와는 거리가 멀어.
문 : 생사를 넷으로 나누어서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 死), 계무생사(界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라 하고 이것을 교가(敎 家)의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 (事事無碍)와 비교하면 서로 맞는데, 이러한 것들을 후학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깨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까?
답 : 깨치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인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알 려고 할 필요는 없지. 임제선사와 고인(古人)의 살림살이는 살활종탈 (殺活從脫), 기용제시(機用提示)의 자재에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바보 가 되어서 화두와 씨름을 해서 일념삼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문 :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어떻게 보십니까?
답 : 나는 권하지를 않아. 왜냐하면 장좌불와를 해도 혼침이나 몸에 끄달리지 않는 상태이면 좋지만, 억지로 하려면 어려운 것이지. 화두 가 일념으로 지속되면 장좌불와가 저절로 되고 혼침도 없어지고 괴로 움도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흉내내서 몸만 망치게 되면 오히려 실다 운 소득이 없게 되지. 몸은 기계와 같아서 기계에 기름을 치듯이 몇 시간을 쉬고 맑은 정신에서 혼침과 망상에 끄달리지 않고 정진을 하 는 것이 좋지,
문 : 오후 불식(午後不食)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건강을 유지할 정도로 적당히 먹는 것이 좋지.
문 : 화두만 바로 하면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 일종식(一種 食)등은 저절로 되니까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답 : 그렇지, 화두만 바로 하면 되는 것이지.
문 : 향상구와 일구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답 : 향상구를 알면 일구를 아는 것이지. 향상구와 향하구, 최초구와 말후구, 일구와 이구가 번복되면 안되는 것으로, 같은 몸이라도 머리, 손, 발이 있는 것처럼 각 부분이 있는 것인데, 미(迷)한 자는 이것을 가리지 못하지.
경오년(庚午年) 4月 수선회(현담)와의 문답
문 : 평상심(平常心)이란 무엇입니까?
답 : 먹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 그대로가 평상심이지.
문 :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평상심입 니까?
답 : 그렇지.
문 : 도인들의 평상심과 속인들의 평상심은 어떻게 다른가요?
답 : 도인과 범부는 다르지. 중생은 모든 생활에 일일이 집착을 하는 반면에, 도인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지. 평상심이라는 것은 도인의 깨달은 경계를 생활화 하는 것이지.
문 :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과 생사가 없다는 것은 다릅니까?
답 :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생(生)하는 이치나 사(死)하는 이치 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 진리 자체에는 생도 사도 없다.
문 : 깨닫고 나면 작용하는 망상이나 생각이 없습니까?
답 : 그대로 진법(眞法)으로 돌아가는 거지.
문 : 그러니가 망상 그대로가 보리(普提)가 된다는 것입니까?
답 : 망상이란 자체가 없는 것이지.
문 : 욕심(慾心)과 탐심(貪心)의 차이는 어떠한지요?
답 : 오십보백보지.
문 : 스님들께서는 무심(無心)으로 소유욕 없이 살아가라고 하시는데 중생들이 소유욕 없이 무심으로 살 수 있습니까?
답 : 그럴 수 있지. 참 나를 알면 온 법계(法界)를 알고 온 중생과 한 몸이 되어 절대 평등이 되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견 성을 하면 지상이 불국토가 되고, 모든 백성이 부모 형제로 한 몸이 되어서 아귀 다툼이 없고 항상 평온하고 안락하게 되지.
문 :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데 중생은 눈이 없 는데 어떻게 선지식을 바르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답 : 중생은 안목이 없기 때문에 바른 선지식을 가리기가 어렵지. 부 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스승에게 탁마(琢磨)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거든. 혼자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고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은 분을 따르면 백 생애를 닦아야 할것을 한 생에 바르게 닦아 깨 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이 사람도 선 지식이고 저 사람도 선지식이라고 쫓아다니다 보면 사견(邪見)에 떨 어져서 정진(精進)에 진척이 없고 업(業)에다가 업을 더 보태게 되지. 그래서 대도(大道)와는 거리가 멀어져서 깨달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야.
문 : 결국 본인이 정진을 해서 닦아야 하는 것이지, 눈 없는 사람은 선지식을 가리지 못하겠네요?
답 : 그렇지 , 안목이 없이는 상대를 바로 볼 수 없지.
문 :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을 버리라고 하는데, 중생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고 생 활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답 : 중생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참으로 올바르고 건전한 생활은 내 가 없는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복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문 : 아상(我相)이란 무엇입니까?
답 : 내가 수행한 것이 제일이다, 내 법이 제일이다, 내가 잘났다, 내 가 잘 한다, 내가 많이 안다, 내가 많이 가졌다 하는 것이 다 아상에 속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처님법에는 대오(大悟)하면 이런 것이 없게 되지.
문 : 재가자(在家者)는 어떻게 해야 참답게 사는 것입니까?
답 :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자기를 계발(啓發)하는 수행을 하루 하루 쌓아가는 가운데 직분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참답게 사는 길이지.
문 :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재가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 는 것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답 : 참선을 하는 사람이 혼자서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 참 나를 알 기 위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고. 아주 값진 생활이지.
문 : 출자가와 재가자의 수행에 있어서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답 : 출가자는 혼자의 몸으로 홀가분하고, 재가자는 처자가 있어서 생 활을 하여야 하니까 번거롭지. 그러나 최상승법에서는 바른 신심으로 바른 법을 구하는 철두철미한 생각을 갖고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바 른 수행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승속(僧俗)에 관계가 없지.
문 : 총림(叢林)으로 출가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답 : 안목이 근본인데 총림의 방장이라도 모두 안목이 투철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실이거든. 절이 크다고 해서 일등 수행 인이 사는 것은 아니야.
문 : 출가하는 사람은 어떠한 곳으로 출가를 하여야 합니까?
답 : 참 나를 발견하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선지식(善知識)이 근본이 다. 선지식은 부처님의 대행인(大行人)이야. 출가는 견성대오(見性大 悟)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거든.
문 : 꿈과 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 잠으로 인해서 꿈을 꾸는 거지.
문 : 그럼, 꿈과 잠이 똑같은 것입니까?
답 : 잠을 자지 않으면 꿈이 없는 법이거든. 망상이 있는 중생이 망상 이 그대로 꿈이 되는 것이지.
문 : 음욕심(性欲)은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답 : 전생의 습기로 축생이나 사람이나 다 익힌 것이지. 다겁생에 익 힌 것으로 아주 예민한데 이것을 제하려면 정진을 해서 일념삼매가 되어야 하지. 좋고 나쁜 것이 차단이 되어서 깨달으면 모든 습기가 일시에 다 제거가 되지.
문 :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습기는 제 하지 못했다)라 하셨는데요.
답 : 그것은 모순이지. 육조 대사도 금을 캐어 녹여서 잡금을 제하면 순금이 된다고 하셨지. 물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성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 번뇌가 곧 보 리, 완전한 진리로 돌아갔는데 번뇌에 놀아나게 되겠는가.
문 : 낮에는 화두가 잘 되는데 꿈 속에 화두가 안되는 이유는?
답 : 아주 간절하게 참 의심이 순일되어야 꿈 속에서도 화두가 이어 지게 되지.
문 : 조실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화두가 꿈 속에서도 이어졌나요?
답 : 나는 결제, 해제에 관계없이 정진을 했었지. 아주 간절한 일념이 지속되다가 깨달았지.
문 : 잠깐 사이에 깨치셨습니까?
답 ; 잠깐 사이가 아니고 아주 간절하게 일념으로 화두의심이 지속되 다가 깨쳤지.
문 : 시간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답 : 모르겠다.
문 ; 며칠간은 일념이 지속된 것이지요?
답 : 전 생애를 화두에 걸고 생활을 했었지.
문 : 태고 보우국사는 오매일여가 90여일간(가을-이듬해 봄)이어졌다 고 하는데요?
답 : 선정삼매에 들면 눈깜짝할 사이에 3년이고 세월이 가는 것이지. 석가모니 부처님도 삼매에 드셔서 새가 둥지를 트는 것도 모르셨다고 하셨거든. 누구든지 삼매에 들게 되면 길고 짧은 것을 논하게 되지는 않지.
문 : 외도(外道)들은 기(氣)가 있어야 한다. 기를 잘 돌려야 한다고 하 는데 기(氣)는 무엇입니까?
답 : 견성법은 기(氣)를 논하지 않고 오직 바른 안목을 논하지. 이몸 은 백년 이내 없어지거든. 수행인은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지.
문 : 죽는다는 것은 슬픈 것입니까?
답 : 가고 오는 것을 모르고, 참 나를 모르니까 적막하고 막막해서 슬 프다고 하는 것이지.
문 : 죽은 후에도 자기가 닦은 것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지요?
답 : 그렇지. 지혜, 복덕, 업, 이 세가지는 가지고 가지.
문 : 참다운 근기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 부처님의 대승법, 최상승법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기(大機)를 말하는 것이지.
문 : 수좌 스님들이 몇 년간 정진을 하다가 강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답 : 신심이 빈약하고 참다운 발심을 못한고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 니라. 출발 자체도 진정한 신심이 아니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다가 정진이 힘들고 진취도 없으니까 자포자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지.
문 : 그러니까 한 번 수좌가 되면 끝까지 수좌의 길로 가야 하는 것 이지요?
답 : 그렇지. 발심한 사람은 구경에 이를 때까지 불퇴전의 신심으로정 진을 해야 하지.
문 : 화두가 일념이 되기 전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요?
답 : 그렇지. 정진삼매의 진가(眞價)를 모르니까.
문 : 초보자에게 권하시는 책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나 육조단경 (六祖壇經)...?
답 : 육조단경이 좋지. 心要의 비결이 육조단경에 있지.
문 : 조실스님께서도 육조단경을 많이 보셨습니까?
답 : 육조단경을 수행의 길잡이로 삼았다.
문 : 결제 기간 중에 원각, 다각 등 소임을 맡은 것은?
답 : 선(禪)은 동정(動靜) 가운데서 익히는 것이지. 일거일동, 일상 생 활 가운데에서 화두와 씨름을 하면서 익혀야 하는 것이지.
문 : 선지식이란 말과 스승이란 말과의 차이는?
답 : 스승은 은사스승, 법사스승 등 많고, 선지식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안목을 갖춘 분을 말하지.
문 : 현 사회에 불신풍조가 만연하는 이유는?
답 : 탐, 진, 치와 아만, 교만, 허세 때문이지.
문 : 도인은 어떠한 분입니까?
답 : 진리대로 생활하고 모든 사람을 평화로운 곳에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문 : 화두를 타는 방법이 있습니까?
답 : 삼배(三拜)하고 생각을 비우고 선지식이 일러 주시는 말씀을 그 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문 : <無>자 화두를 참구할 때 '조주는 어째서 無라고 했는가?' 하고 그 뜻을 참구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 셨는데 조주선사는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가?' 하고 오매 불망 조주선사의 뜻을 참구하는 것이지.
문 : '이 뭣고?' 참구할 때 <이->만 바로 의심하면 <뭣고>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요?
답 : 화두를 드는 데에는 화두 전체를 분명히 챙기는 것에 바로 화두 를 드는 묘미(妙味)가 있는 법이지. 육조 선사가 시삼마(是森麻 : 이 뭣고)화두를 들 때 '모든 사람에게 한 물건이 있으되, 가고 오고 말하 는 가운데에 늘 쓰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르니 이것이 무엇인고?' 했으니 화두 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의심이 철저해야 된다.
문 : 경계가 날 때마다 점검을 받는 것이 좋습니까?
답 : 말을 들어보고 바르게 지도를 하니까 자주 물을수록 좋지.
문 : 묻는 허물보다 묻지 않는 허물이 더 큽니까?
답 : 서울을 가야 하는데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되지. 선지 식의 지도를 받아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곧바로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지.
문 : 어떻게 해야 업장 소멸이 됩니까?
답 : 참회하는 것도 조그마한 업장 소멸은 되는 것이지만, 견성을 해 야 모든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지.
문 : 업(業)은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답 : 생활 가운데에 가지가지 습기(習氣)로 이루어진다.
문 : 생각이 업이라고 하는데요?
답 : 진법(眞法)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법이지만 중생은 진법을 모 르니까 생각 생각이 다 습이 되고 업이 되는 것이지.
문 : 오매일여(悟昧一如)가 되면 배 고프고 오줌 누고 하는 생각들이 나지 않습니까?
답 : 그 가운데에서도 일념이 지속되는 것이지.
문 : 망상은 망상대로 약간은 남아 있는 것이지요?
답 : 화두가 일념이 되면 망상이 차단이 되지.
문 : 화두법 이전에는 무슨 법이 있었습니까?
답 : 염불, 독경, 관법이 있었지. 중국 육조선사 이후로 무수한 도인이 난 것은 최상승법으로 인하여 모든 습기가 제거되고 몰론 진리의 문 이 열려진 것이지. 간화선만 바로 하면 누구나 견성도인이 되거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진리에 접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 화두이 지.
문 : 정진 중에 과거 망상이 많이 떠오르고 미래 망상은 적은데 왜그 렇습니까?
답 : 과거의 습기로 인해서 망상이 떠 오르는 것이지.
문 : 많이 보고 듣는 것이 업식만 더 보태는 것입니까?
답 : 그렇지.
문 : 그럼, 산중에서 안보고 안듣고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답 : 그렇지도 않지. 선지식이 없는 것에서는 힘만 허비하는 것이지. 지혜로운 자는 선각자(先覺者)를 친견하여 바른 수행법 묻기를 좋아 하지.
문 : 어떤 스님은 수좌가 300-400명이 되어도 그 분이 뜻하는 바대로 바르게 실참참구하는 사람은 한 두명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조실스님 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답 : 이 일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십분신심과 용맹 심을 가져서 선지식 스님의 지도를 받아 수행을 잘 하면 십중 팔구는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있지.
문 : 선지식 스님을 만날 때마다 화두 참구 방법을 물어보야야 합니 까?
답 : 바른 선지식을 만나 바르게 참구하는 법을 익혔으면 그렇게 하 면 되는 것이지.
문 : 일반인들이 화두 참구를 하다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 지를 못하는데, 일반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정립해야 합니까?
답 : 여러가지 생각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데 이것을 화두로 돌리면 사심(邪心)이 없어지게 되지. 일상 생활을 직분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에 가지가지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력할 것 같으면 마음의 지혜가 계발되여 더욱 더 잘 사는 국토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일가친척같이 화목하고 평화가 오지,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도 농부도 정치인도 누구든지 참선을 수행해야 마음의 평화가 오는 법이지.
문 : 산중에서20-30년 정진해도 견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세속에서 처 자와 살면서 견성할 수 있겠습니까?
답 : 진실하게 얼마만큼 바로 받아 들이느냐에 달렸지. 일념이 순일하 게 되어야 하는 것이지. 장시간(長時間)을 요하는 것이 아니거든. 일 념이 지속되어서 홀연히 마음땅(心地)을 돌이키는 것이 견성이지. 시 간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야.
문 : 어떤 스님은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해서 터지지 못하면 견성을 못한다고 그러셨는데요?
답 : 형식적이 아니라 참의심이 일념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 하루 가 지속되어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지.
문 : 무심(無心)과 무아(無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 마음 가운데에 따로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 무심(無心)하 면 무아(無我)를 누리고 무아(無我)하면 자연히 무심(無心)을 수용하 느니라.
문 : 무심 상태에서는 업식이 동(動)하지 않기 ㄸ문에 무심 속에서 화 두를 잡고 고기를 먹고 술을 먹어도 업식이 나지를 않는다고 하는데, 견성 전에는 업식이 나는 것이지요?
답 : 견성을 해서 진리를 봐야 정법이지. 무심 상태라고 진리를 보지 못하는 가무심(假無心)은 업식이 나는 법이지.
문 : 화두 공안 중에서도 체(體)를 나툰 공안이 있고, 용(用)을 나툰 공안이 있다고 하는데요?
답 : 체와 용에 국한되지 않고 향상구, 향하구, 최초구, 말후구, 일구, 이구, 여래선, 법신구 이러한 등등의 화두 공안이 나열되어 있지.
문 : 용(用)을 나툰 공안은 대표적으로 덕산 탁발(德山托鉢), 남전 참 묘(南泉斬猫), 노파소암(老婆燒庵)이 아닙니까?
답 : 그렇지 않지. 체니 용이니 논할 수가 없지. 그것은 선지식이 학 자를 접할 때 밝혀야 하는 것이지.
문 : 법거량할 때 차별지(差別智)를 살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요번에 차별지의 답을 못하고 다음에 정진을 하고 나서 그 차별지를 설명하 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답 : 바른 눈이 열리면 일체 법문이 일시에 열리게 되지.
문 : 세상살이가 고통이라고 하는데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입니까?
답 : 나고 죽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 되지.
문 : 전에 한 번 맛본 경계를 또 다시 맛보려고 하는데도 안되는 이 유는 무엇입니까?
답 : 정진의 힘을 못 얻어서 그렇지.
문 : 잠을 몇 시간 자야 합니까?
답 : 이 참선 공부를 실천할려면 4-5시간 자는 것도 무방하지.
문 : 화두를 방편이라고들 하는데요?
답 : 화두를 실답게 참구해서 실답게 깨달으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되지.
문 : 식(識)이 맑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 분별이 다하면 밝게 되지.
문 : 화두법(話頭法)에서 식이 맑다는 것과 관법(觀法)에서 식이 맑다 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답 : 대동소이한 것이지.
문 : 대승법에서의 견성과 소승법에서의 견성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 까?
답 : 소승법에서는 견성이 없지.
문 :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의 차이는?
답 : 견성을 해야 正定(바른 정)이고 못하면 邪定(삿된정)이지.
문 : 화두를 참답게 실참실구(實參實究)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답 : 눈 밝은 선지식 밑에서 공부하면서 법문도 듣고 자주 묻고 해야 지.
문 : 눈을 감고 정진을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답 : 눈을 감고도 일념이 지속되면 관계가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혼 침과 망상에 떨어지느니라.
문 : 호흡하는 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따로 권하지를 않는다. 자연스럽게 하면 되는데 일부러 따로 익 히려고 하면 어렵지. 호흡에 관계하지 말고 화두에 전념하는 것이 힘 을 더는 것이니라.
문 : 터(도량)는 어떻게 보십니까?
답 : 신라 고찰도 명당에 지어졌었고, 터가 좋으면 생기가 나고 좋지 만 선지식이 없으면 소용없지. 선지식도 있고 도량이 좋으면 금상첨 화지.
문 : 터가 센 곳에서 수행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답 : 터가 세고 세지 않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문 : 외마(外魔)가 있습니까?
답 : 마음의 분별이지.
문 : 가위에 눌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답 : 자나 깨나 화두를 일여하게 들면 없는 것이지.
문 : 섬, 바닷가에 도인이 적은 이유는..?
답 : 도인은 인연을 따라서 곳곳마다, 어디든지 머무르게 된다.
문 : 하안거보다 동안거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답 : 둘 다 중요하지. 발심하기에 달린 것이지.
문 : 30-40세에 힘을 얻지 못하면 내생으로 넘어가고 이 나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답 :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의 신심을 내어 간절한 마음 으로 바른 지도를 받아 바르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문 : 현 시대의 도인이 신통이 나지 않는 이유는?
답 : 일상 생활 그대로가 다 신통이지. 별달리 신통을 구하는 것은 그 릇된 생각이야.
문 : 평소에 화두가 안되면 숨 떨어질 때에도 화두가 안될 것인데, 임 종시에는 아미타불이라도 염(念)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 : 아미타불을 염하는 정신이 있으면 화두를 바로 챙기는 것이 더 욱 좋지.
문 : 시신(屍身)을 화장하는 것이 좋습니까? 안하는 것이 좋습니까?
답 : 화장을 하는 것이 좋지. 중생은 몸에 혼(魂)이 머물고 있는데 시 신을 태워 없애고 법문을 해 주어서 집착을 떠나 없애 보내는 것이 좋지.
문 : 풍수가들은 묘자리의 씀에 따라서 집안이 흥하고 망한다고 하는 데요?
답 : 절집 견성법 문중에는 중요시 여기지 아니한다.
문 : 도가 높을 수록 마가 세다고 하는데요, '도고마성(道高魔盛)'이란 무엇입니까?
답 : 잘못된 인식이니라.
문 : 정진 중에 꿈 가운데에서 몽사(夢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요?
답 : 다 전생의 업이지.
문 : 조상이 천도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수가 있습니까?
답 : 천도를 잘하면 영가가 집착을 놓고 좋은 곳으로 저절로 가게 되 지. 신심과 정성으로 환희심을 다해서 영가를 천도할것 같으면 자연 히 영가는 고(苦)를 여의고 낙(樂)을 얻어 가지. 천도는 법력을 의지 하여야 되는 것이다.
문 : 대중 선방생활과 토굴 생활과의 장단점은 무엇입니까?
답 : 선지식이 주석하는 회상이라서 고귀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지 않 고는 용두사미에 불과하다.
문 : 끝으로 달마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답 : 조사는 무의(無意)니라.
문 : 조사는 왜 뜻이 없습니까?
답 : 할(喝).
경오년(庚午年) 동안거 금모선원 정진대중과의 문답
문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 :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은 오조 홍인(五祖弘忍)대사 회상 (會上)에서부터 전개되어 육조(六祖) 문하에 오종(五宗)이 벌어졌는데, 이 오종이 모두 돈오돈수다. 돈오점수 사상은 오조 대사 밑에 교수 사(敎修師)로 있던 신수(神秀), 육조대사 밑에 하택(荷澤), 이후 규봉 종밀(圭峰宗密)로 전개 되었는데, 이 점수 사상은 선종(禪宗)의 정안 종사(正眼宗師)의 안목이 아니다. 이 최상승(最上乘) 선법(禪法)은 일 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이다.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이른 다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 가서 구경법(究景法)은 하나이니, 그 구 경의 여래지에 이르면 다시 더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돈오돈수 인 것이다.
문 : 스님께서 상당(上堂)법문 하실 때, '한 번 깨치고 또 깨쳤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로, 향곡(香谷) 큰스님께서 어린 나이에 출가하셔서 행자(行者)시절에 한번 깨쳤는데, 그 후 봉암 사에서 정진하실 때 또 한 번 깨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말씀만 들을 때는 혼돈이 옵니다. 한번 깨치면 바 로 여래지(如來地)인데, 다시 또 깨쳤다고 하시니까요. 저희들도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데, 만약 화두를 한 번 타파(打破)한 뒤에 다시 또 참구해서 깨쳐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돈오돈수 사상이 성립될수 없지 않는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답 : 그래, 그것이 의심이 날 수가 있는 것이지. 육조대사도 두 번 깨치셨는데, 처음 한 번은 시장에서 탁발승이 금강 경(金剛經) 독송하는 것을 듣고 홀연히 깨달으셨다. 그러고 나 오조(五祖)대사 회상을 찾아가서 행자(行者)로 있었는데 하 루는 오조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렇게 일렀다. "모두 공부한 바 소견(所見)을 글로 지어 바쳐라. 만약 진리에 계합 (契合)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법(法)을 전해서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리라."
그러나 신수(呻) 상좌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적어서 벽에 붙여 놓았 다. 오조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 게송대로 닦으면 악도(惡道)에 떨어 지지 않고 큰 이익이 있으리라 하시며 향 피워 예배하게 하고 모두 외우라고 하셨다." 그래서 온 대중이 신수 상좌를 칭찬하며 그 게송을 외웠는데, 마침 한 사미승이 그 게송을 외우면서 노 행자(盧行者)가 방아를 찧고 있던 방앗간 앞을 지나갔다. 노 행자가 그 계송을 들어보고, 그것이 견성(見性)한 사람의 글이 아 니니, "나에게도 한 게송이 있는데, 나는 글자를 모르니 나를 위해서 대신 좀 적어다오"하고 게송을 읊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이 게송(偈頌)이 신수 상좌 글 옆에 붙으니 대중이 모두 놀라 서로들 웅성거렸다. 오조대사께서 그 소란스러움 때문에 나오셔서 그 게송을 보시게 되었 다. 보시니 그것은 진리의 눈이 열린 이의 글귀라, 대중이 시기하여 해칠 것을 염려하셔서 손수 신짝으로 문질러 버리면서 말씀하셨다.
"이것도 견성한 이의 글이 아니다."
다음날, 오조대사께서 가만히 방앗간에 오셔서 방앗대를 세번 치고 돌 아가셨는데, 노 행자가 그 뜻을 알아 차리고 대중이 다 잠든 삼경(三 更)에 조실방으로 갔다. 오조 대사께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가사(袈娑)로 방문을 두르시고는 금강경(金剛經)을 쭉 설해 내려가시는데, '응당 머 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어다(應無所住 而生其心)'하는 귀절에 이르 러서, 노 행자가 다시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오조대사께 말씀드리기를,
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本無動搖
何期自性 能生萬法
어찌 제 성품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나고 죽지 않음을 았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구족함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본래 흔들림 없음을 알았으리까
어찌 제 성품이 능히 만법을 냄을 알았으리까
하니, 오조께서 노 행자가 트게 깨달았음을 아시고 법(法)을 전하셨 다. 이렇듯 육조 대사는 행자 시절에 두 번 열리셨던 것이다. 그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보면 두번 세번 깨달으신 분이 부지기 수다. 설봉(雪峰) 선사도 암두(岩頭) 선사께 혼이 나 다시 깨치셨고, 임제(臨濟) 선사도 그런 적이 있었고... 몰록 구경법은 하나이니, 최상승의 향상구가 열리면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없는 돈오돈수이지. 향상구를 알면 그것이 바로 구경법이기 때 문에, 모든 법이 그 가운데 전개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있다.
그런데 향상구 밑에 여래선(如來禪)이 있고 법신변사(法身邊事)가 있 어서, 우리가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경계에 소견(所見)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스승없이 공부하는 이 중에는 법신변사를 알아 가지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착각하여 구경법으로 삼는 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향상(向上)의 진리의 법에 설해놓은 것에는 도저 히 앙망불급(仰望不及)이다.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또 향상의 진리를 깨쳐야만 구경법에 이른다.
자고로 고인네들이 두번 세번 깨달았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향상구만 해결이 되면 모든 공안(公案)을 다 알게 되어 있다. 지상에 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산 상봉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상하가 다 내려 다 보이는 것과 같이, 향상구를 투과(透過)하면 모든 공안이 다 그 아 래에 있다. 그러나 향상구를 모르면 견성이 아니고, 부처님과 조사의 전지(田地) 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향상구를 알아야만 비로소 부처님과 조사의 전지에 이르러 대자재인 (大自在人)이 된다. 수방자재(收放自在) 여탈자재(與奪自在) 살활자재 (殺活自在), 거두고 놓고 주고 빼앗고 죽이고 살리는,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춘다는 말이다. 이러한 향상의 안목을 갖춘 연후에야 제불 제조(諸佛諸祖)께서 안주(安住)하는 무념무심(無念無心)의 경지를 수 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문 :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그렇다면 조실 스님께서는 향곡 큰 스 님께 전법게(傳法偈)를 받으실때, 향상구를 아시고 받으셨습니까?
답 : 허허. 몰랐다면 어찌 법을 전하셨겠느냐. 내가 스물네 살때 선산 도리사에서 첫철을 났다. 그때 일곱 분이 함 께 지냈는데, 그 분들 중에서 지금 학산 스님이라는 노장님이 전라도 어느 토굴에 계시고, 나머지 분들은 타계(他界)하시거나 속가(俗家)에 가고 안 계시지. 공부인은 본시 모든 반연(攀緣)이 다 끊어져야 하고, 방선(放禪)을 했다고 해서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해서도 안되고, 항시 화두와 씨름하여 자나 깨나 그 일념(一念)에 잠겨야 된다. 그래야만 화두가 무르익어져서 흐르는 물과 같이 끊이지 않고 지속이 된다.
일념삼매(一念三昧)에 푹 빠져서 모든 분별(分別)을 다 잊어버린 가운 데, 흡사 돌사람(石人)과도 같고 나무사람(木人)과도 같이 되었다가, 거기에서 문득 살아나야 대용전창(大用全彰)이 된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곳에서 공부를 애쓰다가 사견(邪見)으로 '알았다'는 한 생 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것을 점검받겠다고 제방(諸方)선지식들을 두루 참방(參訪)해 보았는데 그 분들 대부분이 문답을 전개하는 과정 에서 '옳다','그르다'하는 점검을 바로 해주시지를 못하더라. 그런데 월내(月內)향곡(香谷)선사께서는, 물음에 답을 하면 말이 떨어지자마 자 그것이 옳은 답인가, 그른 답인가 척척 칼질을 하셨다. 그래서 '제 방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칼을 쓰시는구나' 싶어 어느 선지식보다 도 신망(信望)이 많이 갔지.
그러나 '알았다'는 이 고집덩어리 하나를 들게 되면, 그것을 놓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엊그제도 몇년 전에 여기서 살았던 수좌 한명이 자기 딴에는 '알았다'고 점검받겠다고 왔더라. 그래서 쉬운 공안(公案)을 하나 던져보았는데, 엉뚱한 소리만 하길래,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니 다시 공부해라." 하고 바로 일러 주었거든. 그런데도 자기 고집만 세우고 가던데, 그 병이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3년 허송세월을 했었지. 만약 그때 가는 곳마다 아니 다 라고 방망이를 내렸었더라면, 아닌 줄을 알고 즉시 놓아버렸을 것 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안하무인이 되어 세월 을 헛보냈던 게지.
그러다가 스물 여섯살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정진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마을이건 절집이건 생활이 몹시 어려웠던 때라 모든 것이 귀 했다. 그 추운 곳에 이불도 없고 좌복도 하나여서 잘 때는 그 좌복때 기를 배에다 앉고 잤었다. 그런데 그 곳이 얼마나 추웠느냐하면, 방에 숭늉을 놔두면 그 숭늉이 꽁꽁 얼더라. 문단속도 허술하고 나무도 풍 족하질 않고 하니. 그 당시에 그 곳에서 한 열명 남짓 지냈는데, 지금 해인사 부방장이신 혜암 스님, 활안 스님, 월현 스님이 지내셨고 그리고, 젊은 우리 또래 들이 살았다. 한번은 일주일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그때는 다 들 40대 전이라서 장군죽비를 때리면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는 판이 라. 어떻게나 때리던지, 모두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았다.
하루는 유달리 겨울 날씨가 푸근해서 선방 옆마루에 혼자 아침 햇볕 을 벗하고 있다가 문득 자기사(自己事)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내가 참으로 견성을 해서 고인네와 같이 낱낱 법문 당당한가?' 하고 내가 나 자신에게 묻는데, 거기는 조작과 거짓이 통할 리가 없지. 그래서 ' 내가 이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한다면, 나를 속이고 모든 사람을 속이 는 것이요, 세월 낭비요, 말이 아니니,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 어느 선지식을 찾아가서 지도받아야 되겠는가? 언하(言下)에 흑백을 칼질해 주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나의 전 생애를 걸고 공부해 야겠다고 마음먹고, 해제하자 마자 바랑을 짊어지고 도반 스님 몇몇과 함께 월내 향곡선사 회상을 다시 찾아갔다. 그 곳에서 향곡선사로부터 새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화두를 받았 다. 그 화두를 한 2년 들었을 게야. 그 2년동안은 모든 반연과 가고 오는 것을 다 잊어 버리고 해제도 상관하지 않고 화두와 씨름했지. 그러다가 그 화두가 해결되니, 종전에는 문답하면 허튼 소리만 나오던 것이 그때야 비로소 바른 소리가 나오더라. 그러나 비로소 바른 답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마조(馬祖)선사의 '일 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일면불은 천 팔백세까지 장수하는 부처 님, 월면불은 단 하루 수명의 부처님)'공안에는 막혔다. 그래서 그 화 두를 들고 다시 5년 동안 신고(辛苦)하다 해결해 냈지. 그리하여 마침 내, 고인들께서 베풀어 놓으신 중중(重重)의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 리는 바 없이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문 : 제 경우는 '삼서근'화두를 참구하고 있는데 만일, '삼서근'화두가 타파되지는 않았으니까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입니다만, 타파되 었다고 하더라도 '일면불 월면불'화두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답 : 그것은 화두 참구하는 심천(深淺)에 달렸다. 화두일념이 지속되 고 의심이 아주 철두철미해서 온 대지가 의심덩어리가 되는 일념무심 삼매(一念無心三昧)에 깊이 들어가서 깨닫게 되면, 그 때는 향상구(向 上句)가 열린다. 그렇지 않고 홀연히 아는 수가 있다. 홀연히 아는것 은 힘이 미약해서 모든 공안을 바로 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무심삼매 에 며칠이고 몇 달이고 푹 빠진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되어야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에 올라서게 되는 법이지.
문 : 무심삼매(無心三昧)라는 말씀과 오매일여(寤寐一如), 숙면일여(熟 眠一如)라는 말씀하고는...
답 : 다 자나 깨나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도 내 가 말했던 것처럼, 흡사 석인(石人), 목인(木人)과 같이 모든 분별이 다 마비된 상태다. 전후지분별(前後之分別)이 다 끊어져 시간이 흐르 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몸뚱이까 지도 다 잊어 버리는 상태라는 거지, 그 상태에서는 온 천지가 화두가 되어 오로지 화두 한 생각, 의심 뿐이다.
문: 스님의 첫 오도송(悟道頌)인 '자개주장기인회(這箇柱杖幾人會) 삼 세제불총불식(三世諸佛總不識)...'하는 그 오도송도 확철대오(廓撤大俉) 한 오도송입니까?
답: 허허허허, 그것은 내가 '확철대오한 오도송이다','아니다'하는 것 보다 안목이 열린 이는 보면 다 안다. 그것은 '향엄상 수화' 화두가 열려 견처(見處)가 나서 지은 것이고, '일면불월면불'을 깨닫고는 '일 봉타도비로정(一棒打倒毘盧頂)'으로 시작되는 오도송을 지은 것이다. 두 오도송이 그러한 기연(機緣)이 있지.
문: 스님께서는 '일면불 월면불' 화두를 참구하실때 오매일여(寤寐一 如)가 5년 동안 지속되셨습니까?
답: 아니, 그리 지속된 것은 아니다.
문: 화두일념에 간단(間斷)이 있게 되면 화두가 해결될 수 없는 것 아 닙니까?
답: 그렇지, 그렇지. 일념(一念)이 간단없이 지속되어야만 깨달음이 온 다는 것은 철칙이다. 그런데 지속되는 그 기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 며칠이거나 몇 달이거나 몇년이거나, 사람에 따라서 다 다 른데, 내 경우는 그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문: 예전 선지식들께서는 화두를 주실 때,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 게끔 고려해 주셨던 것 같은데, 요즈음 스님들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기계화되 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의심도 크 게 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맞지 않는 화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스님, 옛날 그 천 칠백 공안 외에 의심이 굉장히 많이 갈 수 있는 것으로 상대방의 근기에 맞게끔 다른 것을 창조해 주시면 안 되는지, 그것 좀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의심이 일고 일지 않고, 의심의 강도가 강하고 약하고 하는 것의 원인은 화두상에서 찾는 것은 분별이다.
선지식이 참학자(參學者)에게 천 칠백공안 중의 한 화두를 주나, 의심 을 물어서 한 마디 던져주나, 상대방이 얼마만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십분 신(信)을 갖고 참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공부가 화두나 선지 식이 이것 저것 일러주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몰록 지금도 고인들께서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셨던 것과 같이 참 학인이 와서 부처님의 근본대의(根本大意)를 묻는 다든가 조사서래의 (祖師西來意)를 묻는다든가 하면, 응당 한마디 일러주지. 그러면 그것 을 참구의 분(分)으로 삼으면 되는데, 그러한 자세로 공부하려는 이가 없거든. 다들 "화두 타러 왔습니다"하니 계제따라 화두를 일러주는 것 이지. 그러나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의심이 일고 일지 않고의 문제는, 일러주는 화두가 어떤 화두인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 신심(信心)있게 받아들이고 실답게 참구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절대 화두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 그래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심이 돈발(頓發)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기연(機緣)이 없겠습니까?
답 : 그것은 정말 의심이 나서 찾아와 물으면 그렇게 한 마디 던질 거 아니냐. 그러면 받아 가지면 되지. 이 공부는 무슨 요행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대도(大道)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선지식이 던지는 법문 한 마디가 금쪽 같은 법이다. 그러한 신심(信心)에서 묻는다면, 한 마디 던졌을 때 몰록 의심삼매(疑心三昧)에 들 수가 있다.
문: 잘 알겠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향엄상수화' 화두를 타파하시고 다른 공안에는 다 막힘이 없으셨는데 '일면불 월면불'공안에 막혀 다 시 5년 동안을 참구하셔서, 그 화두를 해결 해 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면불 월면불'화두를 해결하시기전에 다른 공안(公案)들에 대해서 아셨다는 공부 분상이, 혹시 일면불 월면불을 해결하시고 난 후에 달라지지는 않으셨습니까?
답 : 달라진 것은 없지. 백천공안(百千公案)에는 고인네들이 여래선(如來禪)을 알아서 여래선 도리를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법신변사(法身邊事)를 알아서 법신의 변사를 베풀어놓은 대문도 있고, 최초구(最初句), 말후구(末後句)를 알 아서 그것을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향상구(向上句), 향하구(向下句) 를 베풀어 놓은 것이 있고,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三句)를 베풀 어놓은 것이 있다.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인 향상구가 해결되면 다른 것은 다 자연히 알 게 되어 있지만, 최고봉에 올라서기 전이라도 앞에서 열거한 작은 봉 우리들에 올라서서 진리의 부분 부분들을 볼 수가 있다.
문 : 향상구라는 것이 천 칠백 공안 중에 어떤 공안이 아니고...
답 : 그렇지. 진리의 최고봉(最高峰)이다.
문 : 공안(公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시지요?
답 : 그렇지, 아니지. 진리의 최고 봉우리라는 말이다.
문 : 잘 알겠습니다. 교리(敎理)에서 말하는 십지보살지위(十地菩薩地 位), 등각(等覺), 묘각(妙覺)과 관련지어 볼때, 향상구는 어떤 것을 제 창한 것입니까?
답 : 향상구는 부처님의 구경열반법(究竟涅盤法)이니 묘각의 경계로 보면 정확하다.
문 : 과거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까지 조사(祖師)들께서는 여래선(如 來禪) 도리로 인가(印可)를 하시고 전법(傳法)을 해 오셨습니다. 그런 데 지금에 와서는 조사선(祖師禪)을 제창하시고 향상구를 타파해야만 진리의 최고봉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 하시는데, 그렇다면 과거 십삼 조사들께서 깨치신 살림살이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렇지도 않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세번 특별한 법문을 하셨다. 한번은 인천(人天)백만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좌정(坐定)하고 있을 때,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께 우담바라꽃을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받아서 아무 말 없이 대중에게 보이셨고, 한 번은 또, 법회일 에 모든 대중이 법문을 들기 위해서 다 운집(雲集)해 있었는데 맨 마 지막으로 가섭 존자(迦葉尊者)가 들어오니,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시 기 위해서 법상에 좌정해 계시다가 자리의 반을 비켜 앉으셨다.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고는 선뜻 그 자리에 가서 앉으니, 부처님 께서 가사를 같이 두르시고 대중에게 말없이 보이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일주일 후에, 교화(敎化)를 위해 타방(他方)에 가 있던 가섭존자가 돌아와, 부처님의 시신을 향하여 위 요삼잡하고 합장 예배를 올리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사생 (四生)의 자비스런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항상 법문하시기를, '생노병 사(生老病死)가 원래 없다.'하시더니, 이렇게 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칠푼 두께의 금관 속에서 두 발이 쑥 나왔다. 그래서 가섭 존자 가 다시 합장 예배를 올리니, 두 발은 관속으로 들어갔다.그러더니 관 이 그대로 중천(中天)에 떠올랐는데 이때, 지혜삼매(智慧三昧)의불꽃 이 일어 허공 중에서 화장(火葬)되었다.
이것이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꽃을 들어보인 뜻은 무엇이며, 자리를 나누어 가사를 같이 두르고 앉 으신 뜻은 무엇이며 또, 두 발을 내미신 뜻은 무엇이냐? 모든 후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깨달아 거기에서 백천 공안(百千公案)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삼처전심 외에 또 특이한 것을 보 이셨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설법을 마치시자 청법(聽法) 대중이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는데, 한 여인이 부처님 근좌(近座)에 좌정한 채 자리를 뜰줄 몰랐다. 문수보살이 그 광경을 보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대중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어찌하여 저 여인은 자리를 뜨지 않고 저렇게 앉아 있습니까?"
"저 여인이 정(定)에 들어 있으니, 문수 너의 신력(神力)으로 저 여 인이 정에서 나오도록 한번 해 보아라."
말씀이 떨어지자 문수보살이 신통으로 백천 문수를 허공주에 나투 고, 위요삼잡을 하고, 탄지(彈指)를 해보았는데, 여인은 정에서 나오 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그 광경을 지켜 보시고는, "문수야, 네가 비록 백천신통묘용(百千神通妙用)을 나투어도 너의 신력(神力)으로는 저 여 인을 정(定)에서 나오게 할 수 없다. 하방(下方) 42국토를 지나가면 망명초지보살(罔明初地菩薩)이 있는데, 오직 그만이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망명 보살이 땅에서 솟아나와 부처님께 예배 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입정(入定)한 여인을 가리키시며, "저 여인이 정에 들어 있으니, 망명 네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해 보아라."하시 니, 망명 보살이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을 세번 튕기자. 여인이 바로 정에서 나왔다.
또 하루는, 부처님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말 없이 앉아 계신데, 문수 보살이 나와서 예 삼배(禮三拜)를 올리고는
"자세히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그러면, 문수 보살은 과거 칠불(過去七佛)의 스승이며 백천신통을 나 투었는데도 무엇이 부족하여 그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끔 하지 못했으 며, 어찌하여 망명은 초지 보살인데도 탄지(彈指) 세번에 여인을 정에 서 나오게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문수 보살은 무엇을 보았기에 부 처님께서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의 법이 이와 같다."고 하였느냐?
부처님 당시에도 이러한 공안(公案)이 벌어졌는데, 삼처전심(三處傳 心)은 알기 쉬워도 이 '여인출정화(女人出定話)'나 '관 법왕법여시(觀 法王法如是)'는 알기 어려운 공안이다. 이것을 알면 향상구(向上句)를 알게 된다. 중국의 위대한 도인들도 이 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바로 알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 처님과 같은 법을 써서 백천 공안(百千公案)을 베풀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향상구가 제창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이 견성법(見性法)이라 하는 것은, 내 살림이 따로 있고 네 살림살이 가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의 견성이 나 모든 후래인(後來人)의 견성이나 다 성품, 즉 마음땅을 본 것을 말 한다. 백천 공안은 모두 이 가운데서 베풀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성품 을 바로 보게 되면, 한번 봄으로 인해서 모든 공안을 다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백천 공안의 낙처(落處)를 척척 꼬집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방중(房中)에 봐라. 다 같은 출가승(出家僧)인 비구, 사미로 이렇 게 한방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지만 한사람 한사람이 다 모습도 다 르고 이름도 다르다. 백천 공안도 그와 같이 모양이 다 다르고 이름 도 다 다르다. 우리가 어떤 사람 이름을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데 다른 사람이 "제가 아무개입니다" 한다면 통하지 않는다. 백천 공안도 이치가 그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념삼매(一念三昧)에 푹 빠졌다가 일기일경(一機一境) 에 홀연히 개오(開悟)하면 고인과 더불어 동일한 안목(眼目)을 갖추게 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서 고인네 살림살이를 내 살림으로 만들어야 할것 아닌가.
문 : 그런데 제가 어리석어 가닥을 제대로 못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조사선(祖師禪)이 곧 여래선(如來禪)이고 여래선이 곧 조사선인 것이니, 그것은 고인들이 자재처(自在處)를 식파(識坡)하면 된다.
문 : 건강문제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깨닫기 전에 건 강관리를 어떻게 하셨으며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하시고 계시는가, 지 금도 화두를 들고 계시는가 궁금합니다.
답 : 이 몸뚱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병이 있기 마련 이다. 누구나 다 소소한 병은 있기 마련이니, 그렇게 알고 이 몸뚱이 에 애착(愛着)을 두지 말아야 한다.
몸은 배탈이 날 수도 있고 신경통도 생길 수가 있고 감기도 앓을 수 있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착실히 화두를 챙기면서 소일을 하 면, 위장병도 나을 수 있고 신경통도 나을 수 있고 감기도 나을 수 있 는 법이다. 수좌들에게 생기는 위장병은 대체로 잔뜩 먹고 조는 데서 온다. 적당 히 한 칠부 팔부 먹고 어깨와 허리를 쭉 펴고 반듯하게 앉으면, 설사 졸음이 오더라도 고개만 끄떡하다 말지 허리가 구부정한 자세는 되지 않는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고개가 앞으로 많이 수그러지게 되면 오 장육부에 부담을 줘서 병을 만들게 된다. 그러니 항상 바른 자세를 취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몸뚱이라는 것은 '내가 약하다', '무슨 병이 있다'고 하여 거기에 집착하면 더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몸이 약하다거나 조그만 병이 있는 것은 아예 마음에 두지 말고 무심(無心)으로 돌려 버리고 화두에 안주(安住)할 것 같으면, 고요한 일념이 지속되는 데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소소한 병은 자연히 잊어 버리게 된다. 병에 대한 집착에서 생각이 떠나 버리기 때문에 자연히 좋아지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좌선하는 자세가 바르면 건강상의 장애 뿐만 아니라, 화두 참 구할 때 오는 장애들도 다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망상도 사라져 버리 고, 혼침도 달아나 버리고 그렇다. 그래서 이 공부하는 이는 자세가 아주 중요하다. 처음 한철만 잘 길 들여서 바른 자세를 갖추어 놓으면 일생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다. 오래 앉아 있어도 끄떡 없고, 앉아 있을 때 다리 아프면, 아래 위 다 리 바꾸는 것은 아무 상관 없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것만 취하지 말고 고루고루 먹고 과식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견성지인(見性之人)은 공부를 마쳤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않 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경계를 일상생활에 항시 수용하는 것이다. 깨 달은 살림이 그대로 생활화된다는 말이지.
문 : 특별히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답 : 그렇지,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고 깨달은 경계가 일상생활에 그 대로 살림살이가 되어 버리지.
문 : 스님께서는 화두를 목전(目前)에 두라고 하셨는데, 목전에 둔 화 두 있고 화두 드는 사람 따로 있고 하면 둘로 쪼개지는 것 아닙니까?
답 : 둘로 어떻게 쪼개져?
문 : 화두를 목전에 두라고 하였으니까, 목전에 둔 화두 따로 있고 또, 참구하는 나 자신이 따로 있게 되니, 둘로 쪼개지는 것 아닙니까?
답 : 아니, 온 정신을 목전에 두라는 말이지. 목전에 두는 것이 숙달 되면 앉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걸어갈 때도 그렇고, 누울 때도 그렇 고, 어느 때건 화두 한 생각 모으기가 쉽다. 그렇지 않고 생각을 머리에 두면 상기(上氣)되어 참선을 할수가 없고, 또, 시야를 다른데 두면 견문(見聞)에 끄달려 화두 한 생각 모으기가 어렵다.
문 : 제 소견으로는 화두가 어디 머무는 바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됩 니다.
답 : 응?
문 : 어디 한 군데 주(住)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답 : 아니, 그렇지 않아. 항시 화두를 목전에 두어 생각을 모아야 된 다.
문 : 그리고 또,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하시 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의리선(意理禪)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답 : 아니지. 내가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할 때의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는, 사량(思量)으로 화두를 헤아리거나 이치로 따지라는 것이 아니라, 화두 전체를 분명하게 챙기라는 말이 다.
"조사(祖師)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이렇게 화두 제목이 분명하면서 의심이 쭉 지속되면 다시 화두를 챙 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화두가 희미해지고 혼침이 오고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르면 화두를 다시 챙겨야 한다. 분명하게 챙겨야 다른 번 뇌, 망상, 혼침이 달라들지 않는다. 그렇게 화두를 챙기고 의심을 짓고, 챙기고 의심을 짓고, 그렇게 계속 애쓰다 보면 진의심(眞疑心)이 발동걸릴 때가 있다. 그 때는 한 번 화두를 챙겨들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게 되므로 굳이 다시 챙길 필요가 없다. 이렇게만 화두를 든다면 공부를 바로 지어가는 것이다.
문 : 한 생각이 지속되면 화두를 다시 챙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지 요?
답 : 그렇지. 다시 챙길 필요가 없지. 그대로 지속이 되니.
문 : 그것이 화두를 '관(觀)하라'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신가요?
답 : 아니지. '관하라'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화두는 고요히 관(觀)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의심이 생명이다. 몰록 진의심이 돈발(頓發)하여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들게 되면 모든 바깥 경계뿐만 아니라 참구하는 나 자신까지도 없어지고, 온통 의심덩어리뿐이게 되는 것이 다. 대상도 주체도 없는 의심덩어리 그 자체다. 문 : 그런데 이것이 분별심(分別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화두일념 이 지속되는데도 자꾸 '이것이 진짜 의정(疑情)이 아니지 않나?'하는 의심이 일어 다시 반성하곤 하는데,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되는 것 입니까? 답 : 혼침, 망상 없이 화두가 분명하면서 의심이 지속될 것 같으면 그 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다.
문 : '의심하고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의심과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생각은 화두 전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하고, 의심은 그 내막의 뜻 을 몰라서 그것을 알고자 간절히 의심하는 것이다. "달마 대사께서 서역에서 동토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데, 조주 선사께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셨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한 화 두 전체가 분명해야 하고, 분명한 그 가운데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 라 했는고?'하는 의심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 그 두 가지가 상반(相伴)되지 않으면 수레의 외바퀴와 같이 아무 활 로가 없다. 제목이 분명하지 않고 의심만 지으면 나중에는 멍하게 되 어 아무 것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생기가 없지. 마찬가지로 화두 제목만 있고 의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부에 힘이 없고 아무 진척 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고인들께서도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 다고 하셨다. 그러니, 모두 해운정사 금모선원(金毛禪院)에서 실답게 정진하여, 몰 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한국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게끔 한 번 열심히 해보자.
신미년(辛未年) 동안거 금모선원 정진대중과의 문답
문 : 저는 지금까지 이 참선 공부는 어떤 화두를 듣든지간에 밑바닥 까지 완전히 깨닫는 상태가 온다면 확철대오(廓撤大悟)까지 가는 것 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향곡(香谷) 큰스님께 찾아 가셔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타 2년 만에 해결해 내셨는 데,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5년을 참구하셔 서 비로소 막히는 바 없이 상통(相通)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화두로 완전히 깨치지 못하신 원인은, 화두상에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입니까? 만일 화두상에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이라면, 참학자(參學者)가 애초 부터 얕은 것보다는 깊은 것을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답 : 화두에는 법신변사(法身邊事)의 화두가 있고, 여래선(如來禪)의 화두가 있고, 향상구(向上句), 향하구(向下句)의 화두가 있고, 최초구 (最初句), 말후구(末後句)의 화두가 있고,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 (三句)의 화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항시 최고의 진리의 화두를 간택 해 주지, 법신변사와 같은 화두로 간택(揀 澤)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역대 조사 스님네들을 보건대, 두번 세번 깨달은 이들이 부지 기수이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면, 일념무심(一念無心) 삼매(三昧)에 들 어가서 삼칠일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일년이고 흐르는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되면 더 깨달을 것이 없이 여지없이 깨닫게 되는데, 일념무심 삼매가 안되고 홀연히 깨닫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런데 그것은 힘이 미약해서 낱낱 법문을 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 시 참구해야 된다. 두번 세번 깨닫게 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향상구, 향하구를 들어서 일념무심 삼매에서 해결이 된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깨달아 더 깨달을 것이 없다.
문 : 스님께서는 일념삼매(一念三昧)를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스님 께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셨습니까?
답 : 일념삼매나 오매일여나 다 일념(一念)이 지속된다는 그 말이다. 진의(眞疑)가 돈발(頓發)하여 화두일념이 현전(現前) 되면 그대로 삼 매(三昧)에 들어 자나 깨나 흩어지지 않고 지속된다.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이지.
문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천오백년 전에 새벽별을 보고 깨치신 그 경지와 스님께서 깨치신 경지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답에 털끝만큼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스님께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답 : 허허허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성품을 보았다는 것 아니냐. 석가모니 부처 님께서도 성품을 보셔서 각(覺)을 이루신 것이고, 역대 도인들께서도 다 자기 심성을 보셔서 깨달으신거고, 견성(見性)자리에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天魔), 외도(外 道)라 하지 않았는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면밀히 정법(正法)을 이어 온 선사로부터 인증(印證)을 받으라고 하셨던 것이고, 독불장군(獨不 將軍)으로 '내가 견성했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견성법 문중에서는 조작이 없고 거짓이 없게 하기 위해서 먼저 깨달 은 선사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하는 가풍(家風)이 서 있는 것이다.
문 : 스님께서 확철대오(廓撤大悟) 하셨다면 대기대용(大機大用)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셔서 걸림이 없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옛 조사스님네들이 뱉어놓은 찌꺼기들, '덕산탁발화(德 山托鉢]話)'니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 하는, 그러한 것 들이나 주창(主唱)할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 시대 상황에 맞고 이 시대 근기(根機)에 맞는 화두를 창안(創案)하셔서, 그것을 가지고 참 구케 하여 빨리 눈 밝은 납자(衲子)들을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답 : 허허. 그래서 법문(法門)할 때 내 말 안하더냐. 화두라는 것은 다 른 것이 아니다. 제불조사(諸佛祖師)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이 이 공안(公案)이다. 그러면 그 깨달 은 진리의 세계에 옛이 있고 이제가 있는가?
그리고 한번 생각해 봐라. 부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같은 훌륭한 제 자를 많이 못 만드셨겠는냐. 일생 데리고 다니셨던 아난존자(阿難尊 者)는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바가 없이 그렇게 총명했는데, 위대한 부처님이 무엇이 부족하셔서 아난을 견성도인(見性道人)으로 못 만드 셨겠느냐? 네 논리대로 하면,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얻 지 못했고 가섭존자의 방망이를 맞고 깨달았으니, 가섭존자가 부처님 보다 낫겠네?
그러면 이것은 어찌 생각하느냐?
부처님께서 그러셨다.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실 적에는 자신과 똑같 은 심안(心眼)이 열렸기 때문에,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 心)을 가섭에게 부친다.' 하셨다. 가섭존자는 또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난존자에게 법을 부치셨겠느냐? 서로 상통(相通)이 되니까 그런 것이지. 그것이 쭉 연달아 내려오는 것이 법맥(法脈) 아니냐. 왜 아무한테나 법을 전하지 않고 하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쭈욱 전해내려 왔겠느 냐?
사조(四祖)선사도 상통하는 이가 없어서 법을 전하지 못하고 계시다 가, 80대 노인이 와서 상통되었는데 너무 연로(年老)한지라 몸을 바꿔 오라하여 법을 전하신 것 아니냐. 그리하여 오조(五祖)선사는 육조(六 祖) 행자시절에 상통이 되니 법을 전한 거 봐라. 우리나라는 태고 보우(太古普遇)선사께서 고려 말에 송(宋)에서 법을 이어오셔서 쭉 전해내려 왔는데, 조선 중,후기 이후 근 백여년 간 단 절되었다가 경허(鏡虛)선사께서 다시 이어내셨다. 그 후대에 와서 향 곡(香谷)선사로부터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안목(眼目)을 갖추게 되었 지. 이것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호리(毫釐)의 착오가 없을 것이다.
문 :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향곡 큰스님으로부터 향상 구가 다시 신장(伸張)되었다고 하셨는데, 원래 부처님 정법(正法)이 돈오돈수(頓悟頓修)아닙니까? 향곡스님대에 와서 안목이 바로 부처님 의 정법 돈오돈수일텐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부처님 정법을 바로 잇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향상구가 돌아가신 향곡 큰스님에게서 펼쳐졌다고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답 : 그렇지, 향상구(向上句)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 까지의 우리나라 선사들은 향상구를 모르고 법신(法身)의 경계나 여 래선(如來禪)만 알았다. 태고 보우나 환암 혼수등 몇 분은 중국에서 직접 전해져서 안목이 있었지만, 그 후로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 고준 한 안목이 단절되었고,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향곡, 성철 두분 큰스님께서 향상구를 깨달으신 이후에, 다시 돈오돈 수 사상으로 전환되고 부처님의 근본 살림이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아는 이는 한 마디 들어보면 천리 밖에서도 그 사람 견처(見 處)를 환하게 안다. 모르는 이는 아무리 손에 쥐어 주어도 알 턱이 없 지만, 요즘 우리나라 근세 선사(禪師)들의 법어집이 많이 나왔지만, 들춰보 면 향상구를 제창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덕산탁발화'나 '일면불 월 면불', 이러한 고준한 법문을 들어서 제창한 이는 아무도 없거든, 그 것은 향상구를 모르기 때문에 제창하지 못한것이다.
알았나?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바보가 되어 참구하되, 다른 사람이 한 번 바보 가 되면 너는 열 번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 고 보면 환하게 알게 된다.
문 : 책에서 보니 성철(性徹) 큰스님께서 무엇을 물으셨는데 향곡 큰 스님께서 거기에 막혀 탑전에 삼칠 일간 정진하셔서 깨치시게 되었고, 거기서 깨치고 보니 방장스님 자신도 모르시는 것을 물으셨더라고 했 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 : 그것은 그대로다. "죽은 사람을 죽여 다 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 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殺盡人方見活人 活盡死人 方見死人)" 하는 법문이 있다. 방장스님께서 그것을 물으셨다.
거기에 향곡스님께서 막히셔서 몰록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들어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 모르고 정진하셨는데, 어떤 날은 탑 난간에 기대 어 참구하시던 중에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는데도 모르고 서 계 셨다는 게야. 그렇게 삼칠일 동안을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 영 등 신(等神)이 되어 자신의 몸뚱이까지도 잊어 버리셨다가, 도량을 걷는 중에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셨던 것이다.
깨달으시고보니 질문하셨던 방장스님께서 확실히 아시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방망이를 놓으셨다.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힘 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셨다. 그리하여 이 두분의 깨달음으로부터 한 국 선종사(禪宗師)에 다시 임제(臨濟)골수의 안목(眼目)이 재현(再現) 된 것이다.
문 :한 말씀 더 여쭙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만인을 상대해서 설하셨 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조금 쉬운 것 같은데, 이 공안법문(公案法門)에 들어와서는 도무지 깜깜해 알 길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생기 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얘기는 제가 부처님 말씀 중에서 깨달음에 대한 것을 착안(着 眼)해 본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눈에 있으면 보는 것이요
귀에 있으면 듣는 것이요
손에 있으면 잡는 것이요
다리에 있으면 걷는 것인데
사람이 다만 욕심에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스님의 법문 중에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공안법문들을 뚫어 서 진리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겠습니까?
답 : 나뿐만 아니라 조사(祖師)스님네의 법문은 아주 화살과 같이 찌 른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방편(方便)을 가지고 울어대는 어 린 아이들 달래시는 것이어서, 49년 설법(設法)이 모두 방편이지 법이 아니다. 반면 조사(祖師)스님들 법문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이 아주 아프게 찌르는데, 여기에서 참학자(參學者)가 의심이 일어서 일념삼매(一念三 昧)에 들게 되고 업(業)이 소멸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는 이는 도인스님네, 조사스님네의 일언반 구(一言半句)를 금쪽같이 여겨야 한다.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르고, 온전히 행하고,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지, 무슨 야호(野狐)의심 이 있을 것 같으면 선방에서 백년을 살아보아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니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면 철저한 신심(信心)으로 지 도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하늘을 찌를 듯한 용맹과 태산과 같은 부동 (不動)의 자세에서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된다. 만약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저렇게 해서 될까?'하는 의심을 갖는 다면, 그 사람은 천불 만조사(千佛萬祖師)가 출세(出世)해도 이 일을 성취할 수 없다.
부처님을 일생 따라 다니면서 모셨던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였는데, 부처님께서 열반 에 드신 후에 부처님의 참법문을 들을 수 없으니 가섭존자에게 가서 물었다.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欄迦娑) 외에 따로 전하신 법이 있습니까?"
이에 가섭존자가 아난을 부르자 아난이 대답하니, "문 앞에 찰간(刹 竿)을 거꾸러뜨려라."하고 가섭존자가 한 마디 던졌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졸다가는 떨어져 죽게 되는 아주 높은 바위위에 올라가서 용맹정진하여 그 도리를 깨달았다. "금란가사 외에 따로 전한 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문전의 찰간을 거꾸러뜨려라 했다.
이것이 바로 조사(祖師)의 말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방편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셨지 아프게 찌르지는 않으 셨거든. 바로 이 한마디가 해결되어서 아난존자는 가섭존자의 법을 전수받았다. 이 법은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 모든 도인의 살림살이가 다 동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이 계속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 이다. 그리고 이 선법이 십삼조사 이후로 더 흥하게 되었던 것은 마조(馬 祖)선사의 독특한 일미(一味), 모든 조사스님네들이 토하지 못했던 독 특한 일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밑으로 무수 도인이 쏟아져 나왔던 것 이다.
이 법은 소인배(小人輩)는 안되고 신심(信心)이 있고 그릇이 큰 사람, 도(道)를 구하는 간절한 일념에 불타는 사람이 들을 것 같으면, 선지 식의 한 마디에 마음이 척 열리게 되어 있다. 지금 다들 참선한다고 앉아 있지만, 마음 한가운데는 야호(野狐)가 수 십 마리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법문을 해 주어도 순수하게 들 어가지 못한다. 이 대도(大道)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텅텅 비워서 선 지식의 지도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그것이 그대로 자기 살림이 된다. 그래서 이 대도의 문에 들어 서려면 모든 지견(知見), 일체의 알음알 이를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말을 이야기로 날려 버리지 말고 마음에 바로 새겨서 실천에 옮긴다면, 아주 큰 소득이 있을 것이다.
문 : 해운정사 법당에는 지금 주세불(主世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보현보살, 문수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는데, 제가 듣기로는 이 주세불 때문 에 해운정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왜 주불(主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모셨습니까? 그리고 오분향례(五分香禮)에서 영산(靈山)당시의 아라한(阿羅漢)에 대한 예는 올리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시 는 것입니까?
답: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세불로 모셨다고 하는데, 그 관세음보살 머리 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지 않느냐. 십대제자와 모든 보살 들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 응화신(應化身)이다. 교화하기 위한 방편 응 화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화하는 분상에서 모든 응화신을 모시고 석가모니 부 처님을 봉안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는 것 아니냐. 그것을 모르고, 못 보니까 다들 야호(野狐) 소견으로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그러는 게야. 그리고 사판들이 예불문을 지을 때, 소승(小乘) 나한(羅漢)들을 조사 (祖師)스님들 앞에 두었다. 앞에 둔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 그래서 차 서(次序)에 맞지 않아서 내가 빼 버렸다. 그리고 소승들은 승가(僧伽) 에 속하면 되는 것이다. 문 : 잘 알겠습니다.
문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화두가 챙겨지고 그렇긴 합니다만, 공 부를 하다보면 자꾸 여자 생각이 나게 됩니다. 항상 화두를 놓지 않 고 열심히 참구하려고 노력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때도 화두를 챙기 다가 잠이 드는데, 잡결이라든지 저 자신도 모르는 결에 여자 생각이 일어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만 끊으면 화두가 일념으로 나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답 : 젊었을 때는 여색에 시간을 다 뺏긴다. 그것은 과거 다겁다생(多 劫多生)에 지어온 습기(習氣)로 인해서 사람이나 축생이나 다 그렇다. 중생(衆生)은 이 마음의 습기로 인해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서, 보면 마음이 동(動)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앞에서 내가 대발심자(大發心者)는 돈과 여색에 무심해야 된 다고 했지. 이것은 철칙이다. 돈과 여색에 무심하지 않으면 이 대도 (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다. 이 몸뚱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피고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리 천하일색 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생(生) 을 그 허망한 것에 빠져서 오늘 날까지 성불(成佛)하지 못한 것이 아 니냐. 그러니 금생에는 그러한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허망한 몸뚱이에 초연하리라'는 작심을 하고 생각생각 화두참구에 열을 올려 봐라. 그렇게 해서 힘을 얻어 일념이 현전(現前)되기만 하면, 그때는 그러한 잡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 화두 참구하는데 있어서 힘을 못 얻었기 때문에, 과거생에 지어 왔던 습기(習氣)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오르는 것이지. 그러니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챙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게 한번 잘 해봐라.
문 : 제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화두 두는 방법에서, 스님께서는 화 두를 목전(目前)에다 두라고 하시는데, 상단전(上丹田)이나 하단전(下 丹田)에 두면 안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화두를 머리에다 두게 되면, 애를 써서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모 르게 힘이 들어가고 기(氣)가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머리 가 천근 만근이 되어 화두참구하는 데 큰 장애가 와버린다. 그러나 힘을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눈 앞 1미터 아래에다 화두를 두 고 생각으로만 참구하면, 상기(上氣)되지 않고 편안하다. 또, 어떤 이들은 하단전(下丹田)에다 화두를 두고 참구하라고 가르치 는데, 물론 앉아 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24시간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 이 화두참구라는 것은 사위의(四威 儀) 가운데 무르익어져야 일념(一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사위 의 가운데 익어지지 않으면 일념이 지속되지 않는다. 일념이 지속되 지 않으면 깨달음이 올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한 고로 일상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고 참구(參究)하라는 것이다. 이 방법이 숙달만 되면 아주 간편하고 좋 다. 그렇게 알고 실천에 옮겨 열심히 하도록 하고, 더 묻고 싶은 이는 또 아침으로독참(獨參)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한다.
갑술년(甲戌年) 동안거 법보신문과의 문답
문 : 큰스님,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이 좋습니다. 요즈음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답 :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지냅니다. 그곳엔 수좌가 한 30여명 있는 데, 그들과 하루 4시간쯤 선방에서 정진하고, 아침공양 후에는 개별적 으로 수좌들을 맞아 답을 해주고 그럽니다.
문 : 큰스님의 출가 동기가 몹시 궁금합니다.
답 : 나의 출가 동기는 숙세의 두터운 인연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는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는데, 스물 한 살때 인가 마을 근처 해관암 (海觀庵)이라는 절에 설석우 스님이 정초 법문을 한다고 해서 찾아간 것이 출가 인연이 됐어요. 그런데 첫친견 자리에서 설석우 스님께서 내 나이를 묻고 이것 저것 물으시더니 "세상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하시는 거라. 그래 그 값진 생활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세상에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거듭 권유하십디다. 그래 그 길 로 스님들의 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후 환희심을 느껴 출가를 했었지.
문 : 은사 설석우 스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답 : 설석우 스님은 서른 일곱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한 큰스님입니 다. 출가 전엔 '설약국'이라고 해서 유명한 약방을 운영하셨고,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대선비였지요. 정화 이전 모든 사판승들도 ' 절집의 재상은 설석우 스님'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또 스님은 앞날 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분입니다. 금강산에서 6.25사변 직전에 지리 산 칠불사에 오셔서 대중과 함께 기거하시다가 당시 지리산 토벌 사 건을 미리 아시고 남해 해관암으로 ㅇ기셨지요. 나중에 해인사 조실 로 계셨고, 정화 후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셨습니다. 그후 동화 사에 주석하시며 많은 후학을 지도하셨지요. 특히 큰스님의 임종게 는 아주 좋습니다. 내 오늘 특별히 소개하지요.
주머니에 하늘과 땅을 잡아 넣어서 시방 밖에다 던져 버리고,
소매 가운데에 해와 달을 따 넣어 감춰버림이라.
종 한 소리 떨어지매 뜬 구름이 흩어지니.
일만 푸른 산봉우리 이미 다 석양이라.
囊括乾坤方外擲杖挑日月袖中藏
一聲鍾落浮雲散萬朶靑山正夕陽이라.
문: 큰스님과 향곡선사와의 인연은 어떤 계기로 맺어진 것입니까?
답 : 내가 스물 한살 때 중이 된 이후 석우 스님 밑에서 4년간 공부 를 한 후 선산 도리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망지견(妄知見)이 나서 월 내 관음사의 향곡선사를 찾아가 법을 물은 일이있었지요. 그게 인연 의 시작이 된 셈입니다. 당시 향곡선사께서 법을 물으시매, 답을 해 도 모두 다 아니라고 그래요. 그래도 제방(諸方)에서 계속 공부를 더 한 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겨울 안거를 나던 어느날, 그날은 유난히 날 이 따뜻했었는데 문득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생겨나요. '내가 공부 를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백지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 심을 하고는 향곡선사를 찾아가서 사생결단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 리고 화두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를 받아 참구를 했지요. 즉 '한 스 님이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입으로 가지를 문 채 매달려 있는데, 지 나가던 사람이 달마대사가 서역에서 중국에 온뜻을 물으니, 대답을 하면 떨어져 죽을 것이고 대답을 안하려니 모르는게 되고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내용의 화두지요, 이 화두를 2년간 참구하여 결국 해결을 했지요. 그래 향곡선사와 스승 제자가 되었습니다
문 : '한국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답 : 선법(禪法)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한국으로 전해졌는데, 당당 한 진미의 기풍은 오직 한 가닥 한국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 리나라 온 국민의 영광이지요.
문 : 큰스님께선 부처님 법을 이은 제 79조 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의 경우처럼 법맥을 잇고 있다고 말하는 스님이 또 있 는 줄 압니다. 이를 어찌 보아야 할까요?
답 : 법맥은 여러 갈래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조선사나 행사선 사 밑에도 여러 제자가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얼마만큼 날카롭고 바른 안목을 잇는 상수전법(上首戰法)인지가 중요한 것입니 다. 사자 굴에 사자 새끼가 나는 게 아니겠나.
문 : 큰스님, 깨달음이란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답 : 깨달음은 곧 견성(見性)이라. 심성을 보는 것이지요. 심성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8만 4천가지 법을 아는 것이거든. 견성하면 일체가 차 별이 없어서 천차만별이 다 한 가지라. 밝은 대낮에 사물을 보면 열 사람이 다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어두운 밤에 보면 다 제각기 보 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백일하에 심성을 본다면 일체 시비장단이 없는 것이라.
문 : 만약 큰스님의 깨달음의 경계를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 까?
답 : 오구진일(五九盡日)에 우봉춘(又逢春)이라. '오구가 다한 날에 또한 봄을 만남이로다'라고 말하겠어.
문 : 큰스님, 간화선(看話禪)이 아닌 염불선(念佛禪)이나 위빠사나선으 로서는 견성할 수 없습니까?
답 : 간화선에 비하면 우열의 차등이 있지요.
문 : 간화선이 최선이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 :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동시에 의심이 병행되거든. 제목과 함 께 의심이 오매불망하면 의심삼매, 일념삼매의 경계에 이르게 되고 그 럴 때 전후지(前後地) 일체분별이 사라지게 되지요. 의심과 화두 제목 은 수레의 양쪽 바퀴마냥 항상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 서 의심이 커지고 화두일념이 되면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라. 불조(佛 祖)가 다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다른 수행법은 이러한 생명력이 미약 하지요. 온천지가 의심 덩어리가 될때 크게 깨달음이 열리지.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는 원리가 다 여기서 나온 것이라.
문 : 염불이나 교학으로도 성불이 안되는 것입니까?
답 : 안됩니다. 절대 가능하지 않아요.
문 : 큰스님은 약 40여년간 출가 수행 해오셨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장애가 있었을 줄 압니다.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답 : 나는 수행 과정이 아주 순탄했습니다. 발심할때 좋은 스승(설 스 님)을 만나 신심을 길렀고, 마음 공부할 때 밝은 스승(향곡 스님)을 만나 철방망이를 맞았으며, 새상의 모든 습기가 근접할 수 없는 그런 수행 생활을 해 온 셈이지요. 아마도 절집의 좋은 인연은 나만한 사 람이 없을 것이라. 다 선근공덕(善根功德)을 타고 난 덕이라 생각됩니 다.
문 : 오늘날 젊은 수행자들의 수행 자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답 : 요즈음 수좌들은 끈기가 부족해요. 공부하는 동안은 바위어야 합 니다. 그러데 석달이 멀어라 하고 움직이려 하지. 다 깨달을 때까지 꿈쩍 않겠다는 근성이 필요합니다. 그래 앞으로 동화사 금당에선 5개 월 결제 1개월 해제를 할 생각입니다.
문 : 금당선원을 이끌어 나갈 계획이 있으시다면 밝혀 주십시오.
답 : 금당선원은 역대 선지식이 거의 다 수행하며 정지견(正知見)을 얻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참선 도량입니다. 그런데 여러사정으로 한 20여년 방치되어 있었지요. 나는 다시 금당을 선(禪)정진 도량으로 가 꿔나갈 것입니다. 금당에서 안목 있는 이가 많이 나올 것으로 믿습니다.
문 : 큰스님, 세속 생활을 하면서 참선 정진을 잘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답 : 참선엔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구분이 있을 수 없어요. 밥 먹을 줄 알면 누구나 참선을 할 수 있어요. 화두를 늘 간직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지. 방거사(龐居士) 같은 이도 있지 않습니까?
문 : 오늘날 종교 인구는 늘어가는데 사회는 갈수록 혼탁해 갑니다. 불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답 : 바른 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오직 참선법(參 禪法)만이 그 치유책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지도층부터 참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참선이 국민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먼저 깨 달은 선지식이 많이 배출되어야겠지.
문 : 큰스님과 늘 가깝게 교유하며 지내는 도반 스님이 계십니까? 답 : 뜻이 통하는 도반은 드물지요.
문 : 끝으로 후학들에게 경책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답 : 수행의 근본은 '나'를 앞세워선 안되는 것이지. 일체 시비를 모 두 놓아버리고 출가의 본분사에 전 생애를 쏟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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