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도(牧牛圖, 일명 십우도)
사찰에 가면 주로 전각 옆이나 뒤에 목우도牧牛圖(십우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불교가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라 할 만큼 "마음의 수행"에 열심인데 이 그림은 그 수행의 각 단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유래와 의미를 찾아보자.
알고 본다면 더욱 그 그림에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목우도의 유래
왕노사, 즉 남천보원의 牧牛 공안은 선사들의 수행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는데, 송고시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목우도도 그려져, 각 대에 모두 이에 대한 화답시가 있으며, 아울러 멀리 일본에도 전해졌다.
소를 기른다는 뜻은 마음을 길러 도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오등회원》에서는 이 공안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천보원이 상당하여 이르기를: 왕노사가 어릴 적부터 소를 한마리 길러 왔는데, 시내 동쪽에서 풀을 먹이려 하니 다른 나라 왕의 수초를 뜯어 먹게 되고, 시내 서쪽에서 풀을 먹이려 하니 또 다른 나라 왕의 수초를 뜯어 먹게 된다. 분수에 따라 조금만 먹이는 것만 못한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도다.
이후 목우공안이 각지에서 크게 유행하여 찬미하는 게송을 제창한 사람도 많았으며, 보명선사에 이르러 그림으로 그려졌는데, 길들이는 열 개의 단계로 나누었으며, 아직 기르지 않는 단계에서부터 함께 잊어버리는 단계까지 각각 게송을 가지고 각 단계의 경지를 밝혔다.
•첫째 단계: 소를 치기 전(미목)
사납게 뿔을 치켜 들고 마음대로 포효하며, 계곡으로 산으로 분주히 달려도 길은 오히려 멀구나. 한 조각 검은 구름이 골짜기 입구를 가로지르니, 걸음마다 아름다운 싹을 범한 줄 누가 알리오?
해설~소가 아직 코뚜레를 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포효하면서 아름다운 벼와 싹을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달린다. 사람의 심성도 탁마와 함양을 거치지 않았을 때는 비록 본성이 본래 선하지만, 항상 욕심이 지혜를 어둡게 하여 날로 악해지는데도 자신은 알지 못하므로,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소가 난폭하게 뛰어다니는 것을 가지고 비유하였다. 따라서 아직 길들이지 않음을 첫 단계로 삼았다.
•둘째 단계; 처음 길들임(초조)
새끼줄을 가지고 곧장 코뚜레를 하고, 한 차례 날뛸 때마다 아프게 채찍을 내리친다. 여태까지의 나쁜 성질을 통제하기 어려워, 오히려(여전히) 소치는 아이는 힘을 다해 끄는구나.
해설~소가 처음 코를 꿰이면 나쁜 성질이 여전히 남아서 미쳐 날뛰기를 그치지 않는데, 소치는 아이가 힘을 다하여 견제해야만 악을 선으로 바꾸어 논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처음 수행하는 참선인이 심성을 길들이는 것은 참회하는 공부와 극기하는 수단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완고한 본성을 없애고, 한편으로는 선을 따라 향상하려는 원력을 증가시킨다.
•세째 단계: 통제를 받아들임(수제)
점차 길들여져 날뛰는 것을 그치니, 물을 건너 구름을 뚫고 걸음걸음 따라온다(간다). 고삐를 잡은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지만, 목동은 하루종일 스스로(저절로) 피곤함을 잊는다.
해설~소가 코를 뚫리고 통제를 받은 후에는 다시는 포효하고 날뛰지 않으며, 감히 논밭을 범하지 않는데, 이로써 사람이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조복시킨 후에 선을 따르고 악을 버림을 비유하였다. 하지만 [마음의 주인] 즉 심령의 주재는 여전히 감히 방종하지 못하고 걸음걸음 조심하는데, 마치 목동이 구름을 뚫고 물을 건넘에 소의 뒤를 따라가면서 고삐를 쥔 손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목동은 하루를 마쳐도 피곤함을 모른다]는 것은 도를 향해 자득하는 것은 전적으로 억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네째 단계: 고개를 돌림(회수)
날이 지나고 공들임이 깊어감에 비로소 머리를 돌리니, 미쳐 날뛰는 마음씀이 점차 부드러워진다. 소치는 아이는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여전히 고삐를 맨 채로 둔다.
해설~점차 공을 들여 심성이 점차 통제를 받아 열악한 근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이에 악을 고쳐 선으로 향하는 것이 곧 「고개를 돌린다」는 말의 뜻이다. 「날이 지나고 공이 깊어져 비로소 고개를 돌린다」는 것은 곧 이를 가리킨다.
머리를 돌리기 전에는 마음이 사물에 의해 부려져서 바깥으로 치달리고, 머리를 돌린 후에는 악한 생각이 모두 소멸하고, 악이 있으면 곧장 다 알게 된다.
선으로 향하는 공부가 깊어지면 마침내 미쳐 날뛰는 심성을 통제할 수 있는데, 마치 소가 코를 뚫려 통제를 받아 야성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것이 「미쳐 날뛰는 마음이 점차 부드럽게 길들여진다」는 말의 뜻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양지가 이제 주인이 될 수 있지만, 아직 이 마음이 이미 순수하게 선하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고, 억제하는 공부를 여전히 버릴 수 없는데, 마치 소가 비록 이미 통제를 받지만 여전히 나무에 묶어두거나 우리에 가둬 둘 필요가 있어, 소치는 아이는 감히 소가 자유롭게 달리도록 내버려 두지는 못하는데, 이로써 야성이 다시 발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소치는 아이는 아직 완전히는 소를 믿지 않고, 여전히 고삐를 묶은 채로 둔다」고 하였다.
•다섯째 단계: 잘 길들여짐(순복 )
푸른 버들 그늘 아래 옛 시냇가에서, 놓아 두거나 불러 들임이 전혀 힘들지 않도다. 날은 저물고 푸른 구름 아래 아름다운 풀밭에, 목동은 돌아오면서 굳이 이끌 필요없네.
해설~사람의 심성이 통제와 함양을 거쳐 나쁜 성품이 완전히 제거되고 선한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면, 인심의 동향은 천리와 양지의 올바름에 합치되어, 수행과 억제에 의하여 억지로 작위할 필요가 없이 법도를 넘어서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소가 이미 잘 길들여져 채찍과 고삐를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풀어놓고 불러들일 수 있으며 그리고 돌아갈 곳을 아는 것과 같다. 마음이 이르러서는 선함에 머무르는 것은 마치 소가 목동의 견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날이 저물어 푸른 하늘 향기로운 풀밭에, 목동은 돌아가면서 구태여 끌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러한 경계를 노래한 것이다.
•여섯째 단계: 걸림 없음(무애)
공터(넓은 평지)에서 편히 잠자니 마음이 자유롭고, 힘들여 채찍질하지 않으니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소치는 아이는 푸른 소나무 아래 편히 앉아서, 피리소리 오르내리니 즐거움이 넉넉하네.
해설~심성이 이미 길들여져도 아직 힘써 행하는 단계에 있으면, 마치 목동이 소를 치면서 고삐는 비록 제거했지만 채찍은 여전히 남겨 두어 이로써 소가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걸림이 없는 단계에 이른 후에 소는 더 이상 외양간에 가둬 기를 필요가 없고, 심지어는 공터에서 편히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래도 잃어버리거나 남의 곡식을 먹을 염려가 없어서, 또한 채찍으로 구속하거나 감독하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목동 즉 마음의 주인은 이 때 이미 마음이 한가하여 푸른 소나무 아래 편히 앉아서 채찍을 놓아 두고 단소를 비껴 불며 태평가를 연주하니 아주 기분이 좋다. 그러므로 「목동은 푸른 소나무 아래 편히 앉아 피리를 불며 즐거움이 넉넉하다」고 하였다.
•일곱째 단계: 흐름에 맡기다(임운)
버드나무 아래 봄 물결은 저녁놀 비쳐있고, 아지랭이 향기로운 풀은 마냥 푸르르다. 배고프면 밥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때에 따라 지나가니, 바위 위의 목동은 깊은 잠이 들었구나.
해설~걸림없는 단계에서는 심성은 이미 순전히 선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심주 즉 목동은 보살피고(지켜보고) 있다. 흐름(운명)에 맡기는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는 무엇을 하여도 모두 천성의 자연스럼을 발휘하여 조금도 힘써지 않는다. [버드나무 우거진 물가에 봄물결은 저녁 노을 비추고 있는 가운데][맑은 연기 향기로운 풀이 푸르고 푸른] 즐거운 경지가 있다.
소는 이미 목동 즉 심주의 어떠한 보살핌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배고프면 밥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자연히 도에 합한다. 목동은 바위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하나같이 소에게 맡겨 두어, 이미 마음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덟째 단계: 서로가 잊어버림(상망)
흰 소는 항상 흰구름 가운데 있고, 사람이 절로 무심하니 소 또한 그러하다. 달이 흰구름을 뚫고 나오니 달 그림자도 희고, 흰구름과 밝은 달이 서에서 동으로 간다.
해설~소가 이미 길들여져 흐름에 맡겨두는 단계에 이르러면, 비록 이미 나쁜 성품(습성)은 전부 소멸했지만, 이로써 목동의 악한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지극한 선에 이르렀음을 비유하는데, 하지만 소와 목동은 여전히 대립한다. 서로 잊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소는 이제 순백하여, 본성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고 순전히 선하니, 흰 소와 흰 구름은 전혀 구분이 없게 되어(한 색이 되어), 「흰 소는 항상 흰 구름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목동은 이미 소의 생각 즉 심성을 조복하려는 생각을 간직할 필요가 없고, 소 또한 목동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심성이 이미 자연히 도에 합치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절로 무심하고 소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는데, 소와 목동이 서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도는 부지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다. 이 때는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도 전체가 드러나며」 「자성」이 드러난다.
달은 [자성]을 대표하고, 흰 구름은 현상을 대표하는데, 자성은 현상으로부터 묘용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달이 흰구름을 뚫고 나오니 구름 그림자가 희다]고 하였다. 사람과 소가 서로 잊어버리고 밝은 달 흰 구름 아래 동으로 가거나 서로 가거나 뜻과 같지 않음이 없고 자재하지 않음이 없다.
•아홉째 단계: 홀로 비춰봄(하나임을 관조함)(독조)
소는 어디 가고 목동은 한가한데,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이 푸른 봉우리 사이에 있네. 밝은 달 아래 손뼉치고 큰 소리로 노래하며, 돌아오니 아직 하나의 관문이 남았네.
해설~체로부터 용을 일으키니 체와 용이 한가지이다. 사람과 소가 서로 잊음으로부터 소가 이미 보이지 않음에 이르르니, 즉 한 점 신령스런 빛이 위아래를 환하게 비추어 조금의 찌꺼기도 없으니, 마치 외로운 구름이 종횡으로 흩어지고 뭉쳐짐이 막힘이나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소는 어디 가고 목동은 한가한데, 한조각 외로운 구름이 푸른 봉우리 사이에 걸렸네」라고 하였다.
소를 치는 것이 이 경지에 이르러면 이미 성공한 것인데, 사람이 심성을 길러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용을 포섭하여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여, 아직 내가 있고 나의 견해가 있으니, 최후의 한 관문을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오니 아직 한 관문이 남았다]고 하였다.
•열째 단계: 둘 다 사라짐(쌍민)
사람과 소가 보이지 않고 종적이 묘연한데, 밝은 달은 빛을 머금고 만상은 공적하다. 만약 그 가운데 분명한(확실한) 뜻을 묻는다면, 들꽃과 향기로운 풀은 저절로 총총하다.
해설~이 때는 이미 최후의 한 관문을 돌파하여 소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완전히 우주대전의 자성에 의해 포섭된 것이다. 이 때 목우도에서는 오직 한 큰 동그라미가 있는데, 마치 보름달과 같고 다른 형상은 없다. 이것은 곧 「자성」을 대표한 것이며 만상을 포섭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소는 보이지 않고 행방이 묘연한데, 밝은 달은 빛을 머금고 만상이 공적하다」고 하였다. 이 둘 다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러, 만약 궁극적 경지를 묻는다면, 현상계,색계의 일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즉 「들꽃과 향기로운 풀이 저절로 무성하다.」 참선인이 도를 구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도를 깨닫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다.
도를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고 나서는,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보임과 「쉼」을 거친 후에는 산을 보면 여전히 산이고, 물을 보면 여전히 물이다. 여기서 「들꽃과 향기로운 풀이 저절로 무성하다」는 것은 바로 이 최후의 경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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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도와 게송은 두 가지 다른 그림본이 유전되고 있다.
하나는 아직 소를 치지 않음(미목)으로부터 둘 다 사라짐(쌍민)에 이르는 것(위에 서술한 것)이고,
또 하나는 소를 찾음(심우)으로부터 시장에 들어가 팔을 드리움(입전수수)에 이르는 것이다.
두 가지 다 열 개의 그림과 열 개의 게송을 가지고 있고, 앞에 것의 소는 검은 색에서 흰 색에 이르고,
뒤에 것의 소는 시종 완전히 흰 색인데 담긴 뜻이 각기 다르다.
나중에 일본으로 전해져서, 일본의 일산국사가 화답한 십우도는 뒤의 것이다.
일산국사는 게송들 앞에 하나의 작은 서문을 달았다.
<<십우도는 옛 스님(고숙)이 길(조리.도리)이 없는 가운데 길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논한다면 눈썹을 덜고 더해도 벌써 어긋난다. 하물며 깊고 옅음과 순서의 구분이 있음에랴(있겠는가)? 그러나 성인께서 가신지 오래될수록 법은 당연히 위태롭게 되고, 근기에 우열이 많고 기틀의 작용(기용)에 빠르고 느림이 있어서 또한 일괄적으로 정할 수 없으므로,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베풂으로써 이끌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을 만든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은미한 뜻을 궁구하여 각자 안락하게 쉬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신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이 후세에 퍼져서, 여러 스님들이 게송으로 화답한 것이 자못 많은데, 지금 이 산승은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여러 스님의 뒤에 덧붙여 쓰니(뒤를 이으니), 보는 사람들이 비웃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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