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불심(多情佛心) / 박종화 지음
노국공주의 태어난 생년일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원나라 황제인 순제의 동생 위왕의 딸이었다. 당대 제일의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는 꽃다운 나이에,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고려 충목왕의 둘째 아들 강릉대군과 정략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기상이 높은 것에 저으기 안심했다. 그녀는 첫날밤에 남편에게 당신이 그저 그런 인물이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찬 면모가 있었다. <다정불심>에서는 사냥을 즐기는 당대의 명사수로 묘사되는 여걸이었다.
1351년 강릉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남편을 따라 고려로 돌아와 왕비가 되는데, 어진 성품과 뛰어난 지략으로 왕을 보필했다. 왕께서 지기이자 사부로 생각할 만큼 공주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변정도감을 만들어 억울하게 전답을 빼앗긴 농민들을 구제하도록 간했으며, 원나라에 빼앗긴 쌍성을 되찾으려 할 때 왕이 군량미를 백성에게 거두려 하자 그리하면 백성들의 원망을 산다며 원에서 가져온 어마어마한 양의 패물들을 내놓아 그것으로 군량미를 삼았다. 단호한 계책으로 원에 빌붙은 간신배 기철 일당을 처단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흥왕사의 반역 때는 반역도 50명 앞에 혈혈단신으로 나서 왕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치마두른 요순 임금과도 같다며 공주를 극찬했고, 그런 노국공주에 대한 왕의 사랑도 지극했다. 시집오고 10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어 새 왕비를 간택하라는 왕의 모친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공주는 고려의 사직을 위해 몸소 후궁을 간택해 왕의 침소에 들게 하는 믿기 힘든 어진 성품을 보였다.(지금 기준으론 어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왕은 다른 여인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아 결국 새로 얻은 혜비는 본의 아니게 평생 수절을 해야 했다. 1365년 그렇게도 바라던 임신을 했지만 결국 난산 끝에 영영 이승 세계를 떠나야 했다. 인간 세상의 용, 봉황과도 같았던 절세가인이었기에 하늘도 그 재주를 질투한 것이리라...
공민왕의 아명은 왕기였다. 부득이 원나라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당대에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평생 예술가로 살고 싶어 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왕으로 살아야 했다. 초기에는 노국공주와 더불어 의욕적인 개혁을 펼쳤으며, 우리 역사상 마지막으로 북벌을 추진했던 왕으로 남을 정도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아끼던 노국공주를 잃고 정치에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된다.
그는 노국공주의 시신이 썩어가는 악취를 풍길 때까지도 그녀를 떠나지 못했고, 나라의 국력을 소진할 만큼 어마어마한 대공사를 펼쳐 그녀의 무덤을 만들었다. 공주를 잃고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방황하자 왕의 모친께서는 궁궐에 미모가 뛰어난 다른 여인들이 많다며 재가를 권유했다. 그러자 왕은 눈물을 흘리며 '공주만 한 여자는 없소이다' 하였다.
왕은 우연히 기이한 중 편조를 만나게 되는데, 편조는 섭혼술로 공주의 혼을 데려올 수 있다고 호언했다. 공주의 영혼을 몇 번 대면한 왕은 편조를 크게 신뢰해 모든 실권을 준다. 나중에는 신돈이라는 속명과 함께 섭정왕의 자리까지 내렸다. 그러나 실상 공주의 영혼은 공주와 닮은 반야라는 천한 여인이었다. 왕은 반야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으니 이이가 바로 훗날의 우왕이다.
그러나 왕은 결단코 반야가 공주의 혼인 줄로 믿고 동침을 하였기에, 진실이 밝혀지자 다시는 반야를 보지 않는다. 이 반야가 홀로 왕을 짝사랑하며 외로워하다 마침내 자결하는 대목하는 대목 또한 구슬프다.
왕은 신돈이 노국공주의 무덤을 넓히는 데 반대하자 누명을 씌워 그를 살해한다. 여러 가지 악행도 많았지만 큰 뜻을 품었던 신돈마저 잃자 왕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왕은 술에 절어 음탕한 행동들을 일삼다 마침내 비명에 살해된다.
지엄한 왕의 신분으로 한 평생을 노국공주에 대한 정으로 살았던 전무후무한 이 사나이를 기려 책에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삽시간 일이었다. 왕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넋은 날아 그리운 공주를 찾았으리라!
다정(多情)이 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뒷사람들은 왕을 가리켜 공민(恭愍)이라 불렀다."
<다정불심>은 역사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애정소설이다. 1940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작품에 내재된 불후의 낭만성과 끊을 수 없는 정에 대한 애절함이 당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으리라...아니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으니, 언제 어느 곳에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엔 은근한 정이 함빡 가득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는 문학평론가 윤병로 님의 해설이 실려 있다. 그는 이 작품이 한 마디로 공민왕이 오랑캐 땅에서 맺은 한 번의 사랑이 그 자신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쳤다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고 썼다. 한 마디로 졸견이다.
<다정불심>에서 월탄 박종화 선생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깟 역사적 교훈 나부랭이가 아니다. 월탄 선생은 남녀 사이의 지극한 정이란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지, 간장을 녹여내도록 슬픈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믿는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정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정에 대한 보고서라 하겠다.
정이 있어 슬프지만, 그럼에도 끊을 수 없는 것...대관절 정이란 무엇이길래 사바세계와 저승세계도 갈라놓지 못하는가. 정이란 사람의 얄팍한 지식 위에 있는 법이기에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작품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은 공민왕이 아내의 무덤에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이다. 지엄한 왕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망극한 일인데, 하물며 그림까지 직접 그리다니...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공민왕이 아내의 무덤에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니 그 그림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그는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생전에 그려주지 못한 걸 애석해 하며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붓놀림 하나하나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화폭을 채워 간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월탄 선생의 붓마저 혼신의 힘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 노국공주 초상화는 훗날 연산군이 보고 공주에게 반할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실전된 상태이다. 이게 남아 있으면 오죽 좋았으랴. 한숨만 나올 뿐이다. 공민왕의 그림은 지금 <천산대렵도>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많은 눈물을 흘리며 본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낡은 표현도 있지만 작품 속의 사랑은 전혀 낡지 않았다. 1천 년의 사랑이 지금까지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처럼 또 다른 1천 년이 지나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리라 믿는다.
염량세태의 세상 속의 나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을 보며 많은 걸 느낀다. 사람들 입성이며 먹는 건 예전과 비할 수 없겠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니 옛사람 정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잔술에 쓰러져 눈을 뜨면 1천 년 전이었으면 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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