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마음의 병 - 사람좋은 서방 이야기

難勝 2011. 3. 6. 06:15

 

 

사람 좋은 서방 이야기

 

옛날 어느 곳에 성질머리 고약한 마누라와,

그 마누라에게 시달리느라고 몹시 피곤하게 사는 사람 좋은 서방이 하나 있었다.

오죽했으면,

서방이라는 사람이 아내 몰래 한숨을 내놓으면서 이런 혼잣말까지 했을까.

"악처 시하에 지옥이 따로 없다더니 옛말이 그르지 않구나."

 

그러나 그런 서방에게도 오래간만에 좋은 날이 올 모양이었다.

마누라가 이름 모를 병으로 몸져눕더니,

아무리 약을 써도 백약의 보람이 뒤쪽으로 나는 바람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영영 이별하는 마당인데 덕담 좀 해주면 좋으련만,

마누라는 마지막 숨을 모으면서도 베갯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서방을 몰아 세웠다.

"나 죽는 것은 서러울 것 하나 없어도, 어느 년 좋은 일 시킬 생각을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소.

하지만 나 죽는다고 당신 좋아할 것 하나도 없을 것이니 그리 알아요.

귀신이 되어 당신 발꿈치에 묻어 다닐 테니까,

행여 나 없다고 술집이나 노름방을 기웃거리거나, 다른 여자에게 한눈 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그리고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서방은,

밖으로 드러내 놓고 그러진 않았겠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음직하다.

"더러운 아내, 악한 마누라가 빈 방보다 낫다고 한 놈이 어느 놈이여."

 

 

 

그랬다.

서방은, 아내 세상 떠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고부터 슬금슬금 노름방도 기웃거리고, 친구들로부터 공술도 더러 얻어 마시고, 여자들 엉덩이도 더러 곁눈질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생각에 머물 때만 겨우 용서받을 수 있는 짓들이었다.

 

서방은,

술에 취할 때면 바른말도 곧잘 했다.

세상 떠난 아내도 술에 취해 있을 때만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은 취한 김에 이렇게 중얼거려보았다.

"무엇이 어째?

귀신이 되어 내 발꿈치에 묻어 다녀?

아나, 뒤꿈치 여기 있다.

 

어디 묻어 다녀봐라."

아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말이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어느 날 밤 꿈에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는 꿈속에서도 아주 종주먹까지 들이대면서 서방을 볶았다.

"잘한다, 잘해.

생각이야 어떻게 했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겉으로는 안 그러더니 이제 아주 막 가는구나.

세상에, 노름판을 기웃거리지를 않나, 술에 취하지를 않나, 남의 여자를 기웃거리지를 않나, 무엇이 어째? 아나, 뒤꿈치?

어디 당신의 그 잘난 발뒤꿈치 좀 구경합시다."

 

꿈에서 깨고 잠에서 깨어난 서방은 식은땀을 흘리며,

꿈속에서 아내가 붙잡았다 놓았던 발꿈치를 만져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발뒤꿈치가 몹시 아팠다.

 

서방의 자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때부터, 세상 떠난 아내는 남편의 꿈에 밤마다 고정 출연하다시피 했다.

어쩌다 공술 몇 잔 얻어먹은 날 밤, 노름판 기웃거린 날 밤이면 어김없이 꿈속에 나타나 한바탕 들볶고 갔다.

 

길 묻는 아낙네 길 가르쳐주었다고 꿈속에 나타나 타박하지를 않나,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는 일을 제때 못하면 그것도 못한다고 또 꿈속에 나타나 다그치지를 않나,

죽은 아내가 정말 '귀신같이' 알고 들볶는 바람에 서방으로서는 검은 머리가 하룻밤 사이에 모시 바구니가 될 노릇이었다.

 

견디다 못한 서방은 사람의 일을 잘 아는 것으로 소문난 도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내 생전에 구박받던 이야기, 사후에는 꿈속에서 시달리는 이야기를 도사에게 모조리 하고 나서, 속이 시원해진 김에 이런 말까지 보태어서 했다.

"아내가 죽으면 나을 줄 알았더니 차라리 살아 있는 편이 나았을 걸 그랬습니다.

죽은 제 아내, 정말 왜 이러는 것입니까?

죽어서 망령이 되더니, 제 쌈지에 든 돈 액수까지 귀신같이 세고 있는 데야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이런 마음도 먹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저승에서 제 아내 만날까봐 그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제 아내는 살아서는 원수 노릇을 하더니 죽어서는 애물단지 노릇을 합니다.

저는 살아도 지옥이요 죽어도 지옥이니,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도사는 가만히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도사는 손에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도사는 그 주머니를 서방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서방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짐작도 못하겠느냐?"

"만져보면 안됩니까?"

"만져보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주머니 끈을 풀어보면 안 된다."

 

서방이 주머니 겉을 쓰다듬어보고는 대답했다.

"잘그락거리는 것이, 조약돌인 것 같습니다."

"잘 알아맞혔다. 몇 개인지 짐작하겠느냐?"

"세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세어보아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그 주머니를 집으로 가지고 가거라.

가지고 가서 벽에다 매달아두어라.

주머니 끈을 풀어보아서는 안 된다.

조약돌의 수를 헤아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을 떠난 자네 아내는 오늘 밤에 당장 꿈에 나타나서 날 만났다고 그대를 다그칠 것이다.

다그치거든, 조약돌이 모두 몇 개냐고 물어보아라.

다시 한 번 이르거니와 절대로 주머니 끈을 풀고 조약돌을 세어보면 안 된다.

그대의 아내가 꿈에 나타나거든 몇 개인지 알아맞히라고 해보아라.

아내가 숫자를 알아맞혀도 날 찾아오고, 알아맞히지 못해도 다시 날 찾아오너라."

 

서방은 집으로 돌아와 도사가 시키는 대로 그 주머니를 벽에다 매달아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도사가 시키는 대로 주머니 끈도 풀지 않았다.

따라서 서방도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조약돌의 수는 알지 못했다.

 

아내의 망령은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꿈에 나타나 서방을 다그쳤다.

"그래, 도사 찾아가면, 내가 어 뜨거라 할 줄 알았소?

무엇이 어째?

살아서는 원수더니 죽어서는 애물단지라고?

저승에서 나 만날까봐 죽지도 못하겠다고?

도사가 준 그 주머니나 좀 구경합시다.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걸로 나를 몰아낸답니까?"

 

이번에는 서방도 지지 않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래, 주머니 여기 있다.

무엇이 들어 있는 줄 알기나 하고 그러는가?"

"공기만한 조약돌이지 무엇이겠어요?"

아내의 망령이 반문했다.

 

"잘 아는구먼. 그러면, 자, 어디 대답해봐.

몇 개냐?

이 주머니 안에 든 조약돌이 대체 몇 개냐?"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몇 개냐고 묻는 순간, 아내의 망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서방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밤에도,

사흘째 되는 날 밤에도 아내의 망령은 서방의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납던 꿈자리가,

나흘째 되는 날 밤부터는 사납기는커녕 꿈조차 꾸어지지 않았다.

 

서방은 도사를 찾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얘기했다.

그러고는 대체 무슨 기막힌 술법을 썼기에 그렇게 악마구리 같던 아내가 다시 꿈에 비치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도사는 웃으면서 사람 좋은 서방에게 말했다.

"꿈속에 나타난 아내는 그대의 진짜 아내가 아니고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낸 가짜 아내다.

그대 마음이 만들어낸 가짜 아내이기 때문에 그대가 아는 것만 알 뿐이다.

그대가 모르는 것은 가짜 아내도 알지 못한다.

그대 쌈지에 든 돈의 액수까지 꿈속의 아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 돈의 액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대가 나에게서 주머니를 받아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 주머니에 조약돌이 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역시 그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 주머니 속의 조약돌이 몇 개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는 그대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가 조약돌이 몇 개냐고 묻는 순간 그대 아내는 사라졌다.

왜 사라졌겠는가?

그대 마음이 만들어낸 가짜 아내였기 때문이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 그대는 깨달았다.

그대가 모르는 것은 아내의 망령도 모른다는 것을......

 

꿈속에 나타난 아내는 아내의 망령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뒤로는 잠자리가 그렇게 편안해진 것이다.

 

가거라.

이제는 그대의 아내가 꿈을 빌려 그대에게 시비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꿈은 개인의 신화요,

신화는 집단의 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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