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허난설헌의 꿈과 세 가지 한(恨)

難勝 2011. 3. 7. 06:02

허난설헌의 꿈과 세 가지 한(恨)

 

조선 선조 때 학자 초당 허엽(草堂 許曄)과 후처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봉(篈) 균(筠)과 초희(楚姬ㆍ1563-1589)는 모두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남매 문인이었다. 동시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상 속에서 부딪치다가 모두 일찍 세상을 버리는 치열한 삶들을 살았다.

 

그 가운데 허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초희는 무한한 꿈과 넘치는 자의식 속에 세 가지 한(恨)을 품고 27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난설헌은 여덟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는 천재로, 일찍부터 신선세계를 꿈꾸었다. 열너덧살에 안동 김씨 명문가의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지만, 그는 난설헌이 죽던 해에야 겨우 문과에 합격했다는 평범한 남자로, 이들 부부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임진왜란 이전 시대를 살았던 난설헌은 자의식이 넘치는 이른바 세 가지 한을 가졌다고 전한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녀야 하는가. 셋째, 수많은 남자 가운데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16세기의 끝자락을 산 깨어있는 조선 여성으로 난설헌의 이런 생각에는 어디까지나 중국과의 관계, 혹은 남편과 자식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의식이 뚜렷이 배어 있다.

 

 

최초로 조선 여성 지성사(知性史)의 체계를 세운 이혜순(李慧淳) 교수는 조선 후기 여성 지성사를 여는 인물 김호연재(金浩然齋ㆍ1681-1722)를 중심으로, 임병양란(壬丙兩亂)을 한국 여성사의 한 획기(劃期)로 삼은 바 있다(<조선후기조선여성사>ㆍ이화여여자대학교출판부ㆍ2007).

 

그러나 예술 작품사의 면에서라면 조선 후기의 시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가 난설헌의 시를 규수시(閨秀詩)의 으뜸으로 꼽았고(<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5수), 중국에서는 <열조시집(列朝詩集)>에 난설헌 시 19편이 소개됐으며, 1606년에는 <난설헌시집>이 간행됐다. 일본에서도 1711년 난설헌시집이 간행되는 등 그의 한 많은 짧은 생애에 비하면 그의 이름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떨쳤다. 여기 한두 수 한시 작품을 소개한다.

 

 

봄비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 제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 우에 지네

 

(春雨暗西池 輕寒襲羅幕 愁意小屛風 墻頭杏花落)

 

수양버들 가지에(楊柳枝詞)

 

안개랄까 봄비에 어리운 버들

해마다 가지 꺾어 가는 임 줬네

봄 바람은 이 이한(離恨) 모르노란 듯

낮은 가지 휘둘며 길만 쓰나니

 

(楊柳含煙溺岸春 年年攀折贈行人 東風不解傷離別 吹却低枝歸路塵)

 

(안서 김억(岸曙 金億)의 <조선여류 한시선역, 꽃다발>에서)

 

'봄비'에서는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는" 아픔이 있고,

'수양버들 가지에'서는 "해마다 가는 님"과 "이한(離恨)" 곧 헤어짐의 '한'이 있다.

첫째는 조선이라는 소천지(小天地)에서 태어난 것.

둘째는 女子로 태어난 것.

세째는 남편인 김성립과 결혼 한 것...

 

난설헌의 세 개의 한은 그대로 한국 여인의 한일 터이며,

이 한을 품으며 풀어가며 한국 여인은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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