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사천목씨(泗川睦氏)

難勝 2011. 3. 9. 05:42

 

 

사천목씨(泗川睦氏)

 

▣ 유래

시조 : 목효기(睦孝基)

시조 목효기(睦孝基)는 고려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사람으로 선대부터 사천에 살고 있었다. 그 형제의 우애가 돈목하여 성씨를 목씨라하고 후손들이 본관을 사천으로 하였다.

 

▣ 인물

시조 목효기(睦孝基)의 아들 목덕창(睦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목덕창(睦德昌)의 아들 목준평(睦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 했다. 진사(進士) 목충달(睦忠達)의 아들 목인길(睦仁吉)은 공민왕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와서 시조의 11세손 목세칭(睦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목첨(睦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 었는데 그 중 목서흠,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으로 유명했던 목수흠(睦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 때의 목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목사 (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목장흠(睦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목대흠(睦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인 목대흠에게 입양된 목행선(睦行善)은 인조 때 등과 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 다.

 

목서흠의 아들 목내선(睦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목장흠의 손자 목창명(睦昌明)은 숙부인 목내선(睦來善) 과 함께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 유명했으며, 목조우(睦祖禹)의 아들 목만중(睦萬中)은 영조와 순조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목행선(睦行善, 1609 己酉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목만중(睦萬中, 1609 己酉生) : 문과(文科) 정조10년(178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목철경(睦哲卿, 1609 己酉生) : 문과(文科) 성종10년(1479) 별시 병과(丙科)

목장흠(睦長欽,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선조32년(1599) 정시 병과(丙科)

목서흠(睦敍欽, 1572 壬申生) : 문과(文科) 광해군2년(1610) 알성시 병과(丙科)

목임중(睦林重, 1638 戊寅生) : 문과(文科) 숙종16년(1690) 정시 을과(乙科)

목시경(睦時敬, 1638 戊寅生) : 문과(文科) 영조13년(1737) 중시 을과(乙科)

목용석(睦用錫, 1798 戊午生) : 문과(文科) 순조27년(1827) 정시 을과(乙科)

목인재(睦仁哉, 1790 庚戌生) : 문과(文科) 헌종6년(1840) 식년시 병과(丙科)

목내선(睦來善, 1617 丁巳生) : 문과(文科) 효종1년(1650) 증광시 병과(丙科)

등 모두 111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34명, 무과 2명, 사마시 75명)

 

▣ 항렬자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3世孫은 22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의 옛 행정구역명으로 신라시대에 사물현(史勿縣)이라 불리우다가 757년(경덕왕 16)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었이고 고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사주(泗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진주의 관할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사천현으로 개칭되었다. 동성(東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에서 경상남도 사천군으로 이관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사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곤양군이 사천에 폐합되었다. 1925년 읍내면이 사천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에 읍으로 승격했으며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사천목씨는

1985년에는 총 1,690가구 6,939명,

2000년에는 총 2,492가구 8,18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異說

당나라 8학사 귀화성씨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신라 왕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당나라 태종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위· 방· 홍· 기· 목· 은· 갈· 봉)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도 하는 說로, 

서기 850년(신라 문성왕12) 신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글 잘하는 학사(學士)를 초빙하여 예악을 가르치겠다 하자, 당나라에서 8학사를 보내어 가르치도록 하였다는데 8학사는 은(殷)씨. 홍(洪)씨. 기(奇)씨. 길(吉)씨. 봉(奉)씨. 목(睦)씨. 방(房)씨. 위(魏)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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