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호로자식과 화냥녀의 유래

難勝 2011. 3. 21. 05:56

 

호로자식과 화냥녀의 유래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며 너무나 슬프게 생각했던 첫 번째 장소가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에 모셔진 단종의 왕릉이 장릉(莊陵)이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호랑이 같은 숙부 수양대군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강원도로 유배 당하여 사약을 받게되고 사후 모셔진 곳이 청령포 장릉이다.

 

반역의 무리로 몰릴까봐 시신도 거두지 못하는 살벌한 상황속에서 엄홍도 라는 분이 목슴을 걸고 몰래 암매장 하였다가 먼 훗날 다시 곱게 모셔진 곳이 지금의 청령포 장릉이 된다.

 

나이 어린 임금께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드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돌아오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애절한 시가 유명하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구중궁궐에서 곱게 자란 어린 임금은 홀로 깊은 산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충신들이 자기를 모시러 오지않나? 정다운 왕비가 자기를 찾아 오지않나? 애타게 기다리는 심정을 토한 자규시 또한 듣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멘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限)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 뿌린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왜 듣지 못하는고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

 

여진족을 벌벌 떨게 했던 김종서장군도, 만고충신 황보인, 성삼문, 박팽년 같은 사육신들도

왕권을 탐하는 수양대군 앞에서 어린 단종과 함께 이슬로 사라져 간 것이다.

 

두 번째는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에 있는 長陵이다.

이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을 당한 제12대 임금인 인조와 인열왕후가 모셔진 곳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아버지인 선조를 도와 민병도 모집하고 군수물자도 조달하는 등 난 수습에 많은 일을 했고 즉위해서는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복원하고 대동법 실시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탄 "신 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등을 재편하고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때 쓰이는 등 치적도 쌓았으나 당파싸움에 휩쓸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아버지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정적을 숙청하는 등 민심을 잃으니, 서인파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기를 들어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반정을 일으키게 되고,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政)이다.

 

서울 중구에“세검정”이 있는데 이귀, 김류 등이 이곳에 모여 사전모의를 하고 결의를 다졌으며 반정이 끝난 후 이곳에서 피 묻은 칼을 깨끗이 씻었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서울 중구 자하문 밖 상명여대 부근에 있다.

 

때는 중국에 명국(明國)과 청국(淸國)이 같이 있던 때였으니 광해군은 두 나라와 적당히 자주적 실리적 외교로써 양국을 자극하지 않고 지냈으나, 그것이 못 마땅했던 반정세력들은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정권을 잡자 친명배금, 즉 명과 친하게 지내고 청을 배척하므로써 이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마침내 청 태종이 12만의 군병을 이끌고 쳐들어오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강화로 들어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여 1만3천여명의 군사로 45일을 항전하다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항복을 하니 삼전도(지금의 서울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신하로써,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을 하는데, 이 때마다 머리를 바닥에 부딛쳐 소리가 나야하니 인조의 이마에는 선혈이 낭자 하였다 한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일이라 하여 “병자국치” 라고 하는 것이다.

 

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헌등 신하들을 볼모로 수십만 백성들을 포로로 청국으로 끌고 갔다. 백성 포로들 중 거의 대부분이 여자들 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잡혀가던 대신 김상헌의 시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전쟁이 끝났다고 좋아는 하였지만 그 이튿날부터 궁궐 앞에는 “내 마누라를 찾아주오”“내 딸을 찾아주오”“우리 며느리 찾아주오”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청국에 청원하였으나 청국은 한 사람당 적지 않은 보상금을 요구했다.

하루 빨리 식구들을 찾아오려는 백성들은 재산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하여 찾아오게 되었다.

 

수 많은 여자들이 오랫동안 청에 있다오니 유교의 나라에서 정숙하게 살던 것과는 달리 오랑캐들의 노리개로 살다와서 그전과 다르게 이혼을 요구하는가 하면, 性의 기교를 부리며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가 문란해질 지경이 되어 급기야 대문을 걸어 잠그고 밖을 외출 할때는 눈만 보이게 치마 같은 것을 둘러쓰게 하였다.

 

청국을 다녀 온 수많은 환향녀(還鄕)들이 이렇게 논란이 되면서 사회의 문제가 되자 나쁜 인식들이, 행실이 좋지 못해 음란한 여자들을 환향녀의 발음 나는 그대로 “화냥년”이라고 욕처럼 부르게 되었다.

 

거기에다 많은 시간을 청국에서 지내다 보니, 임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출산하여 낳은 자식들 또한, 버림 받은 어머니 밑에서 아비 없이 자라다 보니 못 배우고 행실이 좋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이때부터 “애비 없는 호로자식(胡虜子息)”이라는 용어가 쓰게 되었다.

배운데 없고 막되게 굴며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을 싸잡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 많은 인조임금도 반정으로 왕위에 등극했기에, 자기 아버지를 대원군에서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여 지금의 김포시 풍무동에 모셨으니 그곳이 3번째 장릉(章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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