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해설사 자료실

원주시 일산동(一山洞)

難勝 2011. 3. 28. 19:55

일산동(一山洞)

 

통 : 14  반 : 86
 

인구 : 남자 4,716  여자 4,747   계 : 9,463  세대수 : 3,831<2007년>기준
 

[위치]
일산동은 시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동으로서 동쪽은 중앙동, 서쪽은 단계동, 남쪽은 원인동, 북쪽은 학성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유래]
원주 서남방의 백운산 줄기가 이 지역에서 일자(一字)로 마무리되었다 하여 일산(一山)이라고 불리워졌다 한다.


[연혁]
1914년 원주군의 행정구역이 10개면으로 확정되면서 일산동은 본부면에 속하였다. 1938년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함으로써 원주읍이 14개 정으로 구분되어 일산동은 상동리(上洞里)와 하동리(下洞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정(錦 )이라 하다가 1946년 정을 동으로 개정하면서 원주읍 일산동이 되었고 1955년 원주시 승격과 동시에 일산동이 설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이사항]
도시기반시설이 거의 완비된 원주시의 중심동으로 상가와 주택지가 혼재되어 있고 인구 고밀도 지역이다. 농협과 원주우체국 등 금융기관 다수가 소재하고 있고 중앙시장과 자유시장, 지하상가가 인접하여 있어서 경제활동 인구가 많은 전형적인 상업지역의 특색을 띠고 있다.


[지명]
▲감리교부근 [마을]
[위치] 제일감리교회 부근의 마을을 말한다.
[유래] 감리 교회당이 있어서 불리워졌다.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 [건물] → 포정루

▲강원감영 청운당 [건물]
[위치] 일산동 54-1번지에 있는 강원감영터 안에 있는 건물을 말한다.
[내용] 조선시대 강원감영에 부속되었던 건물로 아전들이 사무를 관장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청운당은 ㄱ자형의 집으로 맞배지붕이며 한식골기와를 지붕에 얹었다. 장대석을 배열하여 기단을 구축하고 그 위에 건립되었으며 서쪽편에는 툇마루를 만들었다. 원형 또는 방형의 주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한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또 다른 한 면은 정면3칸, 측면2칸이다. 뒷면은 모두 5칸씩으로 이루어졌다. 청운당은 ㄱ자 집인 점과 툇마루가 달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객사터(客舍-) [터]
[위치] 일산동 54-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객사의 터를 말한다.
[유래] 조선시대 강원감영 객사가 있었다고 한다.

▲과수원골 [마을]
[위치] 동진골 위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 기독교병원 남쪽 뒤를 말한다.
[유래] 과수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관풍각터(觀風閣-) [터]
[위치] 일산동 54-1번지에 있는 관풍각의 터이다. 연못 가운데에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유래] 1796년(정조 20년)에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처음으로 창건하였던 정각이다. 이 정각은 감영 안에 있던 것으로 향토지에는 봉래각(蓬萊閣) 북쪽 연못 가운데 지었다고 하며 6 25 사변 이후 연못을 메꾸게 되자 헐었다고 되어 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지에도 도지 발간 때에는 이미 없어졌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때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각의 이름을 관풍(觀風)이라고 한 것은 관풍속찰(觀風俗察)에서 온 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 그 고을 사정을 잘 익힌다는 뜻에서 쓰는 것이다. 이런 이름은 일반 정각에는 쓰지 않고 관아에 있는 정각에만 썼는데 따라서 이 정각도 감영관아 정각의 하나였다.

▲국제아파트 [아파트]
[위치] 일산동 247-162번지, 옛 일산동 주공아파트 자리에 재건축한 아파트를 말한다.
[내용] 453세대로 1997-98년에 건립하였다.

▲군인극장 [극장]
[위치] 원주시청 북쪽에 있던 극장을 말한다. 현재 공공청사(원일프라자) 공사현장이다.
[유래] 1950년대 중반에 국방부에 의해 건립되어 주로 군인들의 여가와 문화공간 시설로 사용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고 이름만 남아 있다. 1992년 원주시가 국방부로부터 매입하여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해 오다가 2006년부터 공공청사(원일프라자)를 짓고 있다.

▲군인극장뒤 [마을]
[위치] 원주시청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유래] 군인극장 뒤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로(南山路) [길]
[위치] 법원에서 국제아파트, 일산초등학교를 지나 명륜1동에 이르는 3.9.km의 도로를 말한다.
[유래] 남산을 우회하여 통과하므로 남산로라고 하였다.

▲다박골 [마을]
[위치] 현재 일산초등학교와 원동 주공아파트 부근의 마을이다. 타박골, 저전동, 다복동, 박밭골, 탑전동, 탑앞골이라고도 한다.
[유래1]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서 다박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유래2] 남산에 탑이 있었고 탑이 있는 앞이 되므로 탑앞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여러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다복동(多福洞) → 다박골

▲동진곡(東辰谷) [마을] → 동진골

▲동진골 [마을]
[위치] 일산초등학교와 북원초등학교 사이로 현 우보삼성아파트 부근을 말한다. 동짓골, 동진곡이라고도 한다.
[유래1] 예전에 동지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던 곳이라 하여 동진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래2] 한 건장한 남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를 모르는 채 평생을 농사일만 하다 죽었다 하여 아이'童'자에 '眞'자를 사용하여 동진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동짓골 [마을] → 동진골

▲박밭골 [마을] → 다박골

▲봉래각(蓬萊閣) [정자] → 봉래각중수기
[위치] 선화당 연못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정자를 말한다.
[유래] {원주 원성향토지}에는 "1744년에 감사 申琓이 신축한 것으로 선화당 연못 가운데 있었으나 관풍각보다도 먼저 없어졌다"라고 되어 있고 원주군읍지에는 선화당 북쪽 연못 가운데 있는 작은 섬 위에 감사 신완이 갑자년에 세웠다고 되어 있다. 강원도지에는 선화당 북쪽에 있으며 숙종 갑자년에 감사 신완이 창건했으나 지금은 없다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와 관동지에는 정자의 크기는 6간이고 선화당 북쪽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 있었고 갑자년에 감사 신완이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정각의 창건은 1684년으로 연대가 추정되며 관아 영내에 있던 것으로 크기는 6간이고 연못 가운데 섬에 지어졌으며 창건기는 남아 전하는 것이 없다.

▲봉명루(奉命樓) [정자]
[위치] 모든 원주읍지에 객관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영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를 말한다.
[유래] 창건 연대와 내력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기문이나 시문도 남아 전해지는 것도 없어 연대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다.

▲부자촌(富者村) [마을]
[위치] 현 원주 기독병원 앞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유래] 일산동 기독 병원 앞에 있는 마을로 문화 주택이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평각 (浮萍閣) [정자]
[위치] 읍지들의 기록에는 원주 객관 동쪽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원주원성향토지'에는 선화당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 정자이다.
[유래] 원주 목사 李明漢이 세웠으며 영조 갑인년 李雨臣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 정각이 없지만 이 정각의 창건이나 중수는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곳의 관장으로 있을 때 이루어지곤 하였다.
오도일의 부평각 중수기에 '원주의 객관 동쪽에 浮萍이라 이름한 亭閣이 있고 이 정각이 못 가운데 조그만 섬에 있기에 부평이라 이름하였으며 이 정각은 白洲 李尙書가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서문거리(西門-) [길]
[위치] 원주시청 별관 서쪽에 있던 길이었다.
[유래]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서문이 있었다고 한다.

▲선화당(宣化當) [건물]
[위치] 일산동 54-1번지에 있는 강원감영터에 있는 고적이다.
[유래] 일산동 1번지에 있는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집무하던 정청(正廳)이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강원감영(江原監營)을 원주에 설치하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지은 객사(客舍)를 그대로 쓰다가 제 9대 성종(成宗)11년(1480)에 감사 권륜(權綸)과 목사(牧師) 이지(李 )가 신축에 착수하여 4년 후에 목사 김적(金象)이 준공하였는데 임진왜란에 전소되고 제 18대 현종(賢宗)때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재건하였다. 제 26대 고종(高宗) 32년(1895)에 강원 감영이 폐지되고 춘천에 관찰부(觀察府)를 둠에 따라 원주 진위대(原州鎭衛隊)가 사용하였다. 원성군 군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시군 통합에 따라 현재는 원주시청 별관이 되었다.
[내용] 규모는 정면 7간, 측면 4간이다. 기단의 높이는 평균 435mm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평면의 구성은 내진주(內陳柱)의 왼쪽에서 정면 3간, 측면 2간은 문짝이 없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오른쪽에는 정면 2간, 측면 2간인 방을 두었다. 내부 중간에는 다시 미서기문을 달아서 2개의 방으로도 쓸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마루방은 4면에 모두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단층집으로 중후한 느낌이 드는 건축물이다. 앞에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와 오층석탑(五層石塔), 좌불상(左佛像) 등이 있다.

▲신진아파트 [아파트]
[위치] 일산동 272-3번지, 국제아파트 앞에 있다.
[내용] 152세대로 1992년에 건립하였다.

▲쌍수대(雙樹臺) [정자]
[위치] 선화당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정자를 말한다.
[유래] 창건이나 철폐된 시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옛 읍지에는 객관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원주 원성향토지에는 시청별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A도로 [도로] → 원일로

▲오층석탑 [탑]
[위치] 강원감영터 안에 있는 석탑을 말한다.
[유래] [내용] → [유물 유적]

▲옥거리(獄-) [길]
[위치] 일산동에 있었던 길로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옥(獄)이 있었다고 한다.

▲우보삼성아파트 [아파트]
[위치] 일산동 333-3번지, 일산초등학교 서쪽에 있다.
[내용] 385세대로 1993년에 건립하였다.

▲원일로 [도로]
[위치] 우산철교에서 남부시장에 이르는 2.2km의 도로를 말한다. A도로라고도 한다.
[유래] 교통량이 가장 많고 일산동 지역을 가장 길게 지나므로 원일로라 하였다.

▲원일프라자 [유통]
[위치] 구 군인극장 자리에 짓고 있는 복합건물을 말한다.
[유래] 1992년 군인극장과 그 부지를 원주시에서 국방부로부터 매입,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해 오다가 2006년부터 공공청사를 짓고 있다.

▲원주기독병원 [병원]
[위치] 옛 원주시청 동쪽에 있다.
[내용] 1912년 앤더슨이 선교사로 부임하여 현 호텔부근에 적벽돌 2층건물을 짓고 '스웨든 감리병원'을 개설하였다가 1921-25년 동안에는 폐원하였다. 1925년에는 선교사 맥마니스가 다시 병원을 열었고 1933년에는 삼산의원에 매각되었다. 1959년에 미국 감리교와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가 50병상으로 개원하여 현재 1,000병상, 950허가병상의 규모로 영서지방 최대의 종합병원이다. 1976년 연세대 기독병원과 합병하였고 1978년에 원주의과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약 700명의 학생이 있다.

▲원주 YWCA [회관]
[위치] 옛 원주시청 동쪽 길 건너에 있다.
[내용] 1967년에 설립하였다. 직업훈련 및 훈련지도, 복지후생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원흥2차아파트 [아파트]
[위치] 일산동 355-1번지로 한국주택공사 강원지사 건너편에 있다.
[내용] 192세대로 1992년에 건립하였다.

▲이순학 기념비 [비]
[위치] 강원감영터 앞에 있는 기념비이다.
[내용] 당시 27사단 소속대위 이순학이 1964년 2월 22일 원성군 흥업면 대안리에서 송충 구제 작업을 하던 중 불의에 비행기가 추락되어 순사한 것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4년 11월 10일에 강원도 지사 박경원이 현 원주시청 별관 앞에 세웠다고 한다.

▲일산동 느티나무 [나무]
[위치] 선화당 뒤에 있는 나무를 말한다.
[내용] 1982년에 도나무로 지정되었다. 둘레 600cm, 높이 25m, 수령은 약 600년이다. 이곳에 과거 감영의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산동주민센터 [행정]
[위치] 일산동 219-17번지에 있다.
[내용] 1989년에 건립한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일산동 석탑재 [유물]
[위치] 강원감영 터 안 청운당 앞쪽 잔디밭에 있는 석조물 부재이다.
[유래] 강원감영 터 안의 청운당 앞쪽 잔디밭에 있는 석탑과 석불의 부재이다. 이곳에 옮겨지기 전에 감리교회 앞마당에 보존되었던 유물이다. 석탑이나 석불의 조성양식을 보면 모두 고려시대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산동 성당 [성당]
[위치] 일산동 239-1번지에 있다.
[유래] 1976년 이학근 신부가 부임하여 설정되었다.

▲일산동 지하도 [상가] → 지하상가

▲일산로(一山路) [길]
[위치] 옛 시청에서 기독병원을 거쳐 동창약국에 이르는 0.5km의 도로를 말한다.
[유래] 일산동을 통과하므로 일산로라고 하였다.

▲일산연립 [연립]
[위치] 일산동 247-137번지에 있다.
[내용] 60세대로 1985년에 건립하였다.

▲일산초등학교 [학교]
[위치] 일산동 278번지, 옛 원주시청 남쪽에 있다.
[내용] 1949년에 설립하였다. 현재 36학급에 약 1400명의 학생이 있다.

▲일산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유치원]
[위치] 일산초등학교 내에 있다.
[내용] 1981년에 설립하였다. 현재 원생 약 40명이 있다.

▲저전동(楮田洞) → 다박골

▲좌불상(左佛像) [불상]
[위치] 강원감영터 오층석탑과 함께 안치된 불상이다.
[유래] [내용] → [유물 유적]

▲지하도 [길] → 지하상가

▲지하상가 [길]
[위치] 1989년에 옛 원주시청 북쪽 아래 사거리 지하에 형성된 상가 및 민방위대피시설을 말한다. 지하도라고도 한다.

▲충열사지(忠烈祠址) [터]
[위치] '여지도서'에 의하면 총 건물 규모는 14간이며 관아 북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나 위치는 알 수 없다.
[유래] 고려시대 영원산성에서 합단과 싸워 승전한 원충갑과 임진왜란때 영원산성에서 전사한 김제갑, 여주목사 원호를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건립하였다 한다. 조선말 대원군 시대에 폐철된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특이사항] 충북 괴산의 김시민 장군을 봉안한 충민사 경내에 사당을 복원하였는데 이곳에 원주 충렬사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청음정(淸陰亭) [정자]
[위치] 객관 남쪽, 강원감영터 남쪽에 있던 정자를 말한다.
[유래] '원주원성향토지'에 '李光齊가 지었다고 하나 이미 없어졌다'고 되어 있다. 옛 읍지에도 이 정자의 창건과 폐철의 기록은 없고 다만 지금은 없어졌다고만 되어 있다. 고읍지에 이광제의 칠언절구 한 수가 기록되어 있다. '햇살이 퍼져 밤이슬 그치고 / 장미가 활짝 피어 뜰 앞은 밝다 / 일이 없어 난간에 기대 앉으니 / 꾀꼬리 노래소리 어디선가 들리네.'

▲친민당(親民堂) [건물]
[위치] 원주감영에 있던 동헌을 말한다. 6.25때 불타고 그 자리에 원주군청을 지었다.

▲타박골[마을] → 다박골

▲탑앞골 [마을] → 다박골

▲탑전동(塔前洞) [마을] → 다박골

▲포정루(布政樓) [건물]
[위치] 강원감영터 정문에 있다.
[유래] 선화당의 정문이다. 규모는 정면 3간, 측면 2간인 중층팔작지붕이다. 조선 현종원년(1660)년에 건립되었는데 6.25때 일부 파손된 것을 보수하였다. 원래는 포정루였으나 1896년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이전하고 나서 운주헌(運籌軒), 선위루(宣威樓)라는 현판을 달았다가 없어졌고 6.25이후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나 1991년에 다시 포정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다.

▲학성중학교 [학교]
[위치] 일산동 250번지에 있다.
[내용] 1956년에 설립하였다. 현재 30학급에 약 1360명의 학생이 있다.

▲환선정(喚仙亭) [정자]
[위치] 옛 감영 봉래각 옆에 있던 정자를 말한다.
[유래] 이 정자는 1746년(영조 병인)에 감사 金尙星이 창건한 것으로 창건기가 있다.


[유물 유적]
[오층석탑]
강원감영터 안에 있는 석탑으로 원래는 하동리 곧 지금의 중앙동 절터에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남산으로 옮겨졌던 것을 1962년 5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5호로 지정되었다.
1층 기단 위에 짜 올린 5층의 탑신부로 구성되었는데 상당히 큼직한 기단부와 이 위의 적당히 체감된 옥개석과 탑신이 얇고 평판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어서 불상과 함께 이 당시 석탑양식의 수준작으로 평가된다.
옥신과 옥개의 크기와 높이가 올라 갈수록 조금씩 작아져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약간 휘어져 내리고 끝 부분에서 조금 치켜졌다. 처마선은 아래쪽은 수평이나 윗쪽은 전각 부분에서 약간 반전되었다. 모서리의 수직선은 안쪽으로 비스듬하며 옥개석에 다른 장식은 없다. 이 오층탑은 전체적으로는 고려 때의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좌불상(座佛像)]
강원감영터 안에 있는 오층석탑과 함께 안치된 불상으로 원래 원주시 중앙동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고 다시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가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2구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한 것이어서 원래의 모습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불신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깨어진 두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므로 둘다 비로자나석불상으로 추정된다.단정한 체구, 세련된 형태, 통견의의 평행옷주름 등 신라말의 비로자나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생각된다.
머리를 새로 만들어 놓아 동체와 잘 어울리지는 않으나 원형을 찾아본 의미에서는 그런대로 주의를 끈다.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이 좌상에서 대좌가 완전하므로 고려초기 불상좌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석불좌상은 1971년 12월 16일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었으며, 깨진 불두는 춘천의 강원도 향토관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봉래각 중수기]
김상성(金尙星)의 중수기(重修記)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래(蓬萊)라는 것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난(鸞)이 높이 나르고 선인(仙人)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곳이니 세간에 어찌 신선이 있으며 이런데도 각(閣)의 이름을 봉래(蓬萊)라 한 것은 어인 까닭인가. 못을 팠다하여 영주(瀛洲)라 이를 수 없고 조산(造山)을 했다하여 방장(方丈)이라 이를 수 없으며 그 한 옆에 작은 정자 한 채 지었으나 이것이 은대(銀臺)나 금각(金閣)이 아닌데 봉래라고 정각을 이름한 것은 맞지 아니한가?
아! 영동(嶺東)의 산수는 수려하다. 삼일사선(三日四仙)은 바다의 봉래요, 금강 설악은 산의 봉래이다. 이런 곳을 다스리는 사람 또한 신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니 이곳의 누대정각들은 봉래 아닌 것이 없으니 이런 곳에 봉래각이 있다하여 불가하다 하겠는가? 봉래는 지난날 진황이 찾다가 찾지 못하였다. 동방삭이 한나라 무제에게 이르기를 신선은 누각에 살기를 좋아하며 조용한 것을 즐긴다 하였다. 천하에 신선이 없으면 몰라도 신선이 있다고 하면 이곳 외에는 신선이 있을 곳이 없다. 이 각의 단청이 낡아 신선이 좋아하지 않을 듯하여 내가 단청을 새롭게 하여 정각의 면모를 일신한 것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중수를 마치고 벽에는 양봉래(楊蓬萊)의 원화동천(元化洞天)의 글씨를 걸고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에게 명하여 봉래산수(蓬萊山水)를 그려 놓았다. 맑은 날 밝은 달이 뜰 주위가 고요할 때에는 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찾아든 손님과 그 속에서 소요하면서 노래부르는 사람의 관동곡(關東曲)을 들으며 술이라도 한잔하면 옆 사람도 알지 못한 사이에 신선이 되어진다. 아-.'

[전설]
[강감찬]
선화당 뒤편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고려말에 당대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공사로 이곳에 들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에 고을 원은 극진한 대접으로 그를 환영했다. 여름철 후덥지근한 여름밤이라 조용한 가운데 편안히 자도록 해야겠는데, 객사 바로 옆 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소란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아 이를 안 원님은 하인을 시켜서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보초를 세우고 연못에 돌을 던지며 개구리들이 울지 못 하게 하였다. 하인은 열심히 초저녁부터 주워온 돌을 던졌지만 개구리들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원님의 명을 받은 하인은 걱정 끝에 큰 장대를 가져와 호롱불을 비추어 들게 하고 두들겨 보았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장대로 몇 마리를 죽이기는 했으나 헤아릴 수 없는 그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막는다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하인은 걱정이 되었다. 이튿날 원님에게 꾸중들을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든지 막아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계속 팔매질도 해보고 장대도 휘둘러보았으나 개구리들은 조롱이나 하듯이 계속 울어대었다. 강감찬은 방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는 책상 위에 있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을 들고서는 부적을 몇 자 적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슬며시 연못 한 모퉁이에 떨어뜨리고서 열심히 개구리를 쫓고 있는 하인을 보았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와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편안히 잤다. 이튿날 아침 원님이 아침문안을 드리러 와서 물어보니 강감찬은 푹 잘 잤다는 것이었다. '실은 하인을 세워 개구리를 쫓게 하였지요' 원은 생색을 내며 말하였다. '그래요, 고맙소' 강감찬은 자기가 부적을 써서 개구리가 소리를 못 내게 하였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번 다녀간 후부터는 어쩐 일인지 다시는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