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땅(可居地)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를 써서 삶의 지리학을 시도한 실학자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가거지'를 큰 주제로 사대부(士大夫)의 살 만한 땅을 논했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발달한 풍수지리(風水地理)와 함께, 사찬(私撰) 인문지리지로 역사적 저작을 남겼다.
"무릇 살 터를 잡는 데에는 지리(地理)를 첫째로 삼으며, 생리(生利)가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은 인심(人心)이며, 다음이 산수(山水)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가 모자라도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좋더라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 없으며, 생리가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수 없다. 지리와 생리가 갖추어 좋더라도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며, 근처에 볼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性情)을 원만히 할 수 없다.(<복거총론(卜居總論)>)
18세기 전반기 이익(李瀷) 문하의 실학자로, 정계에서 몰려난 경기 남인인 그는 새로운 가거지를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중환은 일찍이 24살에 과거에 합격하고, 32살에는 정 5품 병조좌랑(兵曹佐郞)의 벼슬에 올랐으나, 보름 뒤에는 당쟁에 휘말려 쫓겨나고, 36살에는 목호룡(睦虎龍)의 일당으로 구금되고 절도(絶島)에 유배되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 덕분에 전라도와 평안도를 뺀 온 나라를 유랑하며, 그는 사대부의 가거지를 모색했고, 발로 뛰는 지리학자로 이 책을 써냈다. 그런데 가거지가 '지리ㆍ생리ㆍ산수'와 함께 '인심'을 중요 요소로 든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처가 쪽의 풍수가[地官] 목호룡과 20대부터 명당을 찾아 나라 안의 산과 들을 헤맨 사람이지만, 이 책에서는 죽어 묻힐 묘소가 아니라 양택(陽宅), 곧 살 만한 땅에만 관심을 두었다. 사대부뿐이 아니고 모든 백성이 살 만한 땅을 찾아 쓴 글이 '복거총론'이고, 그 중에도 '인심'의 결론은 그의 정치평론이며, 삶의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시골에 살려면 인심이 좋고 나쁜 것을 따질 것 없이 같은 당색(黨色)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고, 문학을 연마하는 일을 닦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택하는 것만은 못하니, 문을 닫고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며 혼자 자신을 잘 수양한다면 비록 농민이 되든 공장이가 되든 장사아치가 되든,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인심>)
'인심'이 아니라 '도심(道心)'을 말하고, 혹은 실심(實心)을 말해온 사대부들이 퇴폐하여,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이라면 인심을 논할 것도 없다는 역설. 사대부라면 오늘날의 사회 지도층? 인심은커녕 민심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가거지라는 결론.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수경 스님 소식이 잠시 요즘 인심을 상징하는 듯 허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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