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궁중 연회 연향

難勝 2011. 4. 15. 05:02

 

 

 

조선 때의 궁중 잔치인 연향은 진작, 진찬, 진연, 진풍정 등으로 구별이 된다.

 

1) 연향의 유래

회례연·양로연·진연 등의 특징을 살피기 전에, 진연과 같은 계통의 연향을 뜻하는 용어인 진풍정(進豊呈)·진찬(進饌)·진작(進爵) 등의 개념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진풍정이라는 용어는 조선초기에 격식에 구애됨이 없이 연향을 올린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성종대(1469-1494)에 진풍정이 진연이란 용어로 대체되면서 진풍정은 드물게 쓰였다. 성종대 이후의 진풍정은 조선초기의 진풍정 용례와는 달리 성대한 연행을 뜻했으며, 진연이란 용어와도 서로 통용하여 쓰였다. 중종대(1506-1544)부터는 진풍정이 격식과 규모를 갖춘 연향이란 의미로 활발히 쓰이고, 여전히 진연과 통용되었는데, 대비전에는 진풍정이란 용어를, 임금에게는 진연이란 용어를 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진연은 때로는 '연향을 올린다'라는 광범위한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효종대(1649-1659) 이후, 그 이전과 달리 진연이 진풍정보다는 작은 규모의 연향을 뜻했으며, 영조대(1724-1776) 이후 진찬과 진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진연보다는 작은 규모의 연향을 뜻했다. 즉 진풍정·진연·진찬·진작이 연향 규모의 차이에 따른 용어로 확립된 것은 효종대 이후부터이며,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 네 종류의 연향은 조선후기에 모두 격식을 갖춘 예연(禮宴)이었다.

 

각 연향의 개념을 살펴보자면, 회례연은 인군과 신하가 화합하여 일체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군신통연(君臣通宴)이고, 양로연은 노인을 우대하여 베푸는 연향이며, 사객연은 사대교린을 위해 사신에게 베푸는 연향이다. 진연은 의정부 육조의 신하, 종친과 의빈의 친인척, 공신들이 왕실과 한 집안사람처럼 친애의 정을 표하는 연향이다. 이런 연향의 특징은 의식에도 반영되어 회례연과 진연에서는 먼저 임금에게 헌수(獻壽)한 후 셋째 잔부터 인군과 신하가 같이 술을 마시며, 양로연에서는 노인을 공경하여 대접하는 의미로 첫잔부터 같이 마신다. 회례연·진연·양로연은 인군과 신하사이의 예이므로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릴 때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올리지만, 사객연은 나라와 나라사이의 예이므로, 중국사신을 상국(上國)의 손님으로서 예우하여 상석(上席)인 동쪽에 위치하게 하고 임금은 서쪽에 위치하여서 서로 술과 음식을 읍하여 서로 권유하며, 제거(提擧) 및 제조(提調)기 과반(果盤)과 탕(湯)을 올릴 때, 임금에게는 꿇어앉아서 올리지만 사신에게는 서서 올리어, 임금에 대한 예와 사신에 대한 예를 분명히 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궁중연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연락(宴樂)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회례연은 인군과 신하의 정을 통하게 하여, 신하는 인군을 위해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하고, 인군은 허심탄회하게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양로연은 임금이 솔선하여 노인을 공경함으로써 백성들이 효심을 감발(感發)시키고, 진연은 문무백관과 왕실의 친인척 및 공신들이 한 집안사람처럼 친애의 정을 두터이 쌓아 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하며, 사객연은 이웃나라와 우호를 증진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궁중연향은 사회통합의 기능을 가졌으며, '예악에 의한 교화정치'의 일환이었다.

내연과 외연에 대해 살펴보면, 종래에 내연을 '대비나 중궁 또는 명부(命婦) 등의 여자를 위한 잔치'로, 외연을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를 위한 잔치'로 이해했었으나, 여러 사료들을 재검토해 본 결과 종래의 정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연과 외연의 정의를 회례·양로연의 경우와 진연의 경우로 나누어서 다시 정의해보도록 하겠다.

 

회례연과 양로연의 경우는 내연은 여성이 주축인 연향, 외연은 남성이 주축인 연향이다. 진연의 경우는 내연은 대비·왕·왕비·왕세자·왕세자빈·공주를 포함한 왕실 가족과 봉호를 가진 여성인 명부가 주축이 되는 연향으로 종친·의빈·척신 등의 왕실 친인척이 참여하기도 하며, 외연은 실질적으로 정치를 주도하는 군신(君臣)이 주축이 되는 연향으로 왕비나 명부 등 여성이 참여하는 경우가 없다.

 

 

2) 연향의 변천

성종 16년(1485)에 편찬된『경국대전』을 보면, 진연은 1년에 여러 차례 거행하고, 회례연과 양로연은 대략 1년에 한 차례 거행한다고 명시했는데, 명시한 대로 연향이 조선조 말까지 재최되었는지, 아니면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연향 개최에 대한 빈도수가 중종대와 선조대(1567-1608)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서로 다르므로, 이를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어 살펴보았다.

 

연산군대(1494-1506)까지는 회례연과 양로연은 대체로 각각 정조(正朝)와 9월에 정기적으로 열었고, 진연은 한 해에 여러차례 열었다. 중종대 이후 회례연과 양로연은 흉년 등의 이유로 정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진연 또한 드물게 베풀었으나, 대비전에 올리는 것만큼은 1년에 한차례 여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행하려고 노력했다. 선조대 이후부터는 정조(正朝)에 정기적으로 회례연을 여는 관례가 사라졌고, 양로연 또한 정기적으로 여는 관례가 사라지고 경사(慶事)와 함께 베풀었으며, 진연도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는 경우에만 베풀었다.

 

 

3) 연향 변천의 동인

조선은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예와 악에 의한 교화정치를 표방했다. 조선왕조를 유지해 가는데 주요한 버팀목으로 구실을 한『국조오례의』에 연향이 실려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연향 또한 교화정치의 한 일환으로 행해졌다. 연향은 사회구성원간의 유대를 돈독히 해주는 기능을 했고, 춤과 노래와 악기가 연주되는 주요한 문화공간이었다.

 

세종대(1418-1450)에 예조·의례상정고·집현전을 중심으로 의례를 정비하면서 연향의례가 마련되었으니, 회례연은 매년 정조(正朝)에 행하고, 양로연은 매년 가을에 행하며, 진연은 명절과 생신 및 경사(慶事)에 행했다. 이러한 관례가 연산군대까지는 대개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종대 이후 성변(星變)·흉년·여역( 疫)등의 재변을 이유로 부득이 회례연과 양로연이 자주 정지되었고, 한 해에 여러 차례 행해지던 진연 또한 드물게 베풀어졌다. 선조대 이후부터는 정초에 회례연을 행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양로연은 정기적으로 개최해야한다는 인식이 사라지고, 경사와 함께 행해져 아주 드물게 베풀어졌다. 진연 또한 경축할 일이 있는 특별한 경우에 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아주 드물게 베풀어졌는데, 예를 들면 선조 재위 42년과 효종 재위 11년 동안에 각각 한차례의 진연만 행했고, 현종 재위 16년 동안은 단 한차례도 행하지 못했으며, 숙종 재위 47년 동안은 6번의 진연(진풍정 포함)을 행했을 뿐이다.

 

연향을 특별한 경우에만 베푸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는 것과 더불어, 조선후기에는 진연을 행한 후 으레 서울과 지방의 노인에게 쌀과 음식을 내려주고 가자(加資)를 해주며, 전세(田稅)와 환곡을 줄여주는 등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 온 백성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대동 축제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중종대 이후 연향을 드물게 베풀게 된 데는 우선 성리학을 체득하여 실천적 측면을 중요시 여김에 따라 검약(儉約)과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정신이 바탕이 되었으며, 흉년과 같은 재변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사(人事)의 잘못을 꾸짖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잘못을 임금과 신하의 부덕(不德)에서 찾는 유교적 재이관(災異觀)의 심화와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