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양녕대군과 기생 정향 이야기

難勝 2011. 4. 12. 20:15

 

 

 

양녕대군과 기생 정향 이야기

조선시대 설화집 기총문화에 실려있는 옛 이야기입니다.

 

양녕대군(讓寧大君)과 기생 정향(丁香)

 

양녕대군은 바로 태종대왕의 맏아들이었다. 처음에는 세자에 책봉이 되었으나 둘째 동생에게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같은 덕이 있음을 보고 첫째 동생인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함께 왕위를 양보하기로 하였다. 양녕대군은 곧 질병이 있음을 핑계로 호방한 무리들을 모아 토끼를 몰고 여우를 잡는 등 날마다 사냥을 일삼았고, 효령대군은 날마다 승려들과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시를 청하는 권선문(勸善文)을 써 주고 쌀과 재물을 모으는 등 불도(佛道)를 신봉하였다. 이들 형제는 이렇게 하여 결국 왕위를 셋째에게 양보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세종대왕으로서 진정 동방의 성인(聖人)이었다. 또한 두 대군에게는 형으로서 아우인 문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백(泰伯)과 우중(우仲)과 같은 덕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종 임금이 즉위한 뒤로 덕정(德政)이 펼쳐져 시화 연풍(時和年豊)하고 백물 창무(百物暢茂)하여 팔도 백성들에게는 모두 화락지풍(和樂之風)이 있었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세종 임금에게 아뢰었다.

“평안도는 바로 해동의 명승지라, 산천이 수려하여 경치가 몹시 아름답습니다. 신(臣)은 서너 달 말미를 얻어 한번 평양의 을밀대(乙密臺)에 가서 기자(箕子)의 유허지(遺墟地)를 보고 그 길로 성천(成川)으로 가서 무산(巫山) 열 두 봉우리의 선경(仙景)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이 소원이옵니다.”

“평안도는 본시 화류지향(花柳之鄕:色鄕)이니 혹시 주색에 몸을 상할까 싶으므로 감히 허락하지 못하겠습니다.”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시니 신은 주색을 조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술은 광약(狂藥)이니 입에 대면 마음이 상하고 색은 요사한 여우에 가까우니 눈에 접하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비록 조행이 있는 군자라 하더라도 미혹되지 않을 자 적은데, 하물며 풍정(風情)이 호탕한 연소한 남자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색을 조심하겠다는 말씀을 저는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양녕대군은 계속 아뢰었다.

“전하께서 우애하는 정의로 이처럼 지나치게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우러러 성교를 체념(體念)하여 위로는 하늘을 속이지 않고 안으로는 마음을 속이지 않고 천만 번 근신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세종 임금은 양녕의 뜻을 막기 어려움을 알고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말했다.

“만일 색을 조심하고 탈없이 돌아오신다면 제가 반드시 친히 숭례문(崇禮文) 밖에서 영접하여 3일 동안 잔치를 베풀겠습니다.”

양녕대군은 황공하여 감격함을 이기지 못했다.

“성상의 뜻이 이처럼 간절하신데 어찌 감히 분부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내 양녕대군은 세종 임금에게 하직하고 나서 즉시 엄중한 내용을 적은 공문을 연로변의 각 고을과 평양 전체의 수령들에게 띄웠다.

“노소를 막론하고 명색이 여자라는 것과 청탁(淸濁)을 막론하고 명색이 술이라는 것을 만일 내 눈 앞에 가까이 있게 하면 해당 수령은 관직을 삭탈하고 삼공형(三公兄:고을의 호장·이방·수형 리의 세 관속)은 모두 매로 쳐 죽일 것이다.”

 

각 고을 수령들은 이 공문을 보고 모두들 두려워하였다.

“대군의 위엄이 참으로 무섭다. ”

아전들은 온통 벌벌 떨면서 곧 연로의 백성들에게 분부하였다.

“대군이 행차할 때에는 비록 늙은 부인이나 거지 여자라 하더라도 구경하지 말고, 시골에서 만든 막걸리를 각별히 경계하라.”

 

세종 임금은 양녕대군을 보내놓고 나서 속으로 생각하였다.

'형님은 연소한 풍류객으로 평안도 같은 아름다운 지방을 가셔서, 아무리 좋은 산천경개가 있다 하더라도 술 한 잔 못 마시고 여자 하나 가까이 못하고 돌아오신다면 뒤에 반드시 일생을 두고 한으로 여기실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평안도의 각 고을에 밀지를 내렸다.

“나의 형님께 만일 수령이 일등가는 기생을 동침시켜 집을 떠나 억제하기 어려운 풍정을 풀어드리고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술을 대접하여 쓸쓸한 나그네의 회포를 달래준다면 그 수령은 두 계급을 올려 차서에 관계 없이 발탁해 쓰리라.”

 

평안도 수령들은 이미 주색을 가까이 대지 말라는 양녕대군의 공문을 받았고, 또 미색을 동침시키라는 세종 임금의 분부를 받들었으므로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진퇴양난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계책이 서지 않았다. 임금의 분부를 받들지 않으면 문책이 없지 않을 것이고 만일 대군의 위엄을 범한다면 죽음이 당장 닥칠 것이니,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감사와 서윤(庶尹:평양시장)이 여러 기생에게 물었다.

“너희 중에 누가 한번 대군을 모실 수 있겠느냐?”

“주린 범의 아가리는 그래도 가까이할 수 있지만 대군의 위엄은 범할 수 없습니다.”

모두들 머리를 흔들었다. 재주가 뛰어난 정향(丁香)이란 기생이 있었다. 나이는 겨우 열여섯 살로 미색이 평안도에서 으뜸이고 또한 기특한 꾀도 있었는데, 그녀가 자청하고 나섰다.

“제가 한번 대군을 모셔서 명승지라 이름난 곳을 무색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 꾀를 말해주니, 감사와 서윤은 무척이나 기특하게 여겼다.

 

이튿날 객사(客舍)의 정남쪽에 담 한 곳을 허물되 마치 비바람에 손상된 것처럼 꾸미고 담밖에 또 집 한 채를 수리하여 정향이 거처할 집으로 만들었다. 또 통인(通引:잔심부름하는 어린 아전)중에서 용모가 제일 아름다운 자를 골라 의복을 곱고 단정하게 입혀놓고 대군의 행차를 기다렸다.

 

어느 날 양녕대군이 평양에 당도하였다. 10리나 뻗은 백사장에 푸른 버들은 숲을 이루고 비단처럼 빛나는 물결이 일고 있는 맑은 강에는 갈매기가 헤엄치듯 날고 있으며, 어부들의 노래소리와 목동들의 피리소리는 여기저기에 들렸다. 양녕대군은 대동문루(大同門樓)에 올라가 창문에 기대서서, “참으로 이른바 제일강산이로구나.”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객사로 돌아올 때 네거리의 좌우에 웅장한 집들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한 사람도 엿보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 경계가 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객사로 들어와 앉아서 사방의 산들을 두루 바라보니 안계(眼界)가 몹시 아름다웠다. 남쪽 이웃 북쪽 집이며 동쪽 마을 서쪽 집들이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데 피리소리와 노래소리가 요란스러웠건만, 대군이 앉아 있는 곳만은 너무도 고요하여 흥미가 한푼어치도 없었다.

 

조금 후에 감사가 앞으로 와서 절을 올리고 큰 상을 내왔지만 진수성찬인데도 별맛이 없었다. 감사가 공수하고 말했다.

“달콤한 홍로주(紅露酒)와 계당주(桂糖酒)는 비록 이 지방의 아름다운 술이오나 엄한 공문이 내려진 마당이라 감히 올리지 못하옵고 오직 밥알이 뜬 향기로운 단술을 대신 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스럽습니다.”

“술은 금했지만 단술이야 뭐 상관이 있겠소.”

 

드디어 한 잔을 들이키니 맛은 극히 달고 취하는 기운 또한 얼얼하였다. 양녕대군은 오랫동안 적적하던 끝이라 비록 속임을 당한 줄을 알면서도 탓하지 않고 결국 몇 잔을 기울이고 말았다. 감사가 감영으로 돌아가고 날은 어두워지자, 밥짓는 연기가 성안에 가득하고 담이 허물어진 곳에서도 저녁 연기가 일어났다. 두세 명의 통인이 좌우에 모시고 서 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의복이 선명하고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양녕대군은 그 아이를 몹시 사랑하여 물었다.

“네 나이 몇인고?”

그 통인은 꿇어 앉아서 대답하였다.

“15세이옵니다.”

양녕대군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사는 서울에는 본래 인물이 많으나 일찍이 이와 같은 아이를 보지 못하였다. 남자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데 하물며 여자야 오죽하겠는가. 평양에 인물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구나.'

조금 후에 담이 무너진 곳으로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닭다리를 물고 앞으로 달려와서 양녕대군이 앉아 있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여자가 장대를 들고 고양이를 쫓아서 거의 뜰 가운데 이르렀다가 좌우에 있는 나졸(羅卒)들이 큰 소리로 꾸짖자 멈추었다. 양녕대군이 나졸을 시켜 그 여자를 끌어오게 하니 나이는 17~18세쯤 되어보였는데 용모가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소복을 입고 뜰 아래에 꿇어 앉아서 울며 하소연했다.

“소녀는 금년 18세이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산 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저 요망한 고양이가 죽은 남편의 상식(上食)에 쓸 닭다리를 물고 가기에 분한 나머지 지엄하신 분이 마루 위에 계신줄도 모르고 그만 이렇게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을 목숨을 살려주시기 비옵니다.”

 

꾀꼬리처럼 혀를 교묘하게 놀리니 아름다운 목소리가 구슬퍼 말마다 애처롭고 소리마다 슬펐다. 구름 같은 머리는 치렁거리고 구름 같은 눈물은 뺨을 적시니, 예쁜 자태와 고운 말소리가 철석 간장을 녹였다. 양녕대군은 이미 그 통인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또 그 누이의 용모를 생각하던 터라 그녀를 살려줄 작정으로 다시 물었다.

“과연 관가에서 엄하게 경계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는냐?”

 

그 통인은 또 대답했다.

“평양 성안 사람들은 모두 대동강물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고운 옷 입고 물긷고 빨래하는 여인들이 줄을 잇는데 오희(吳姬)와 월녀(越女)의 어여쁜 자색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차하실 때 한 사람도 얼굴을 보인 자가 없었던 것은 실제로 관가의 단속이 엄하였기 때문입니다. 팔자 사나운 누이가 망각하고 죽을 죄를 범하였으니 하늘을 어찌 원망하며 사람을 어찌 탓하오리까? 소인이 대신 뜰 아래에서 죽어 누이를 대신하여 속죄하고 싶사옵니다.”

“그렇다면 본관의 죄가 아니고 네 누이가 망각한 탓이구나.”

 

이때는 춘삼월 호시절이라 성에 가득한 화려한 집에 푸른 대나무와 붉은 살구꽃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병풍과 같았다. 길고 짧은 노래소리가 구슬프고 호방한 관현악기 소리들이 집집마다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노래하고 거문고 뜯는 기녀들의 번화한 때임을 알 수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물매 양녕대군은 나졸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두셋 통인들만 거느리고 한 자루 촛불과 더불어 객사에 외로이 앉아 있으려니, 생각나는 것은 오직 고양이를 쫓아온 젊은 여인뿐이었다. 여러 통인들은 병풍 뒤에서 쓰러져 자고 한 통인만이 모시고 서 있으니, 양녕대군은 그 통인과 가까이 앉아서 물었다.

“너희 집은 어떠한고?”

“부모는 다 작고하시고 집도 매우 가난합니다.”

“그렇다면 너의 의복이 어찌 그렇게도 몹시 아름다우냐?”

“소인은 다른 형제는 없고 누이와 함께 저 헐어진 담 밖에서 살고 있사옵니다. 누이의 바느질 솜씨가 평양성에서 제일이므로 남의 옷을 지어주고 품값을 받아 연명하고 있사옵니다. 소인이 입은 의복도 누이의 솜씨로 지은 것으로 남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양녕대군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자색이 아름답고 재주가 특이하니 참으로 훌륭한 여자인데 다만 팔자가 기구한 것이 애석하구나!' 하고 다시 물었다.

“너의 집은 크냐?”

“담 밖에 달팽이 껍질만한 집이 바로 소인의 집이옵니다.”

 

조금 후에 담 밖에서 나던 노래소리와 거문고 소리가 점점 멎고 사람의 말소리와 말의 울음소리도 그쳤으므로 밤이 이미 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곁에 있던 통인도 머리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양녕대군은 뜰 위에서 배회하다가 이내 뜰을 내려가 마당에서 산보를 하였다.

 

이때는 달빛이 낮처럼 밝고 북두칠성이 난간에 비껴 있었다. 소복에 아름다운 자태가 끊임없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울며 하소연하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완연하였다. 잊으려고 해도 잊기 어려웠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이 났다. 결국 아무도 모르게 결심했다. “내 한번 그녀의 집을 보리라.”

 

그런데 막상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나아가지 못하고 혹 남이 알까 싶어서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때는 자정이라 온 천지가 고요하였다. 양녕대군은 결심을 하고 드디어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옮기면서 열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두 걸음 옮기면서 천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발을 들어 사뿐히 걸었으나 오히려 신발소리가 났다.

 

그래서 아예 신까지 벗어버렸다. 담이 허물어진 근처에 이르러 보니, 과연 통인의 말처럼 달팽이 껍질만한 작은 집이 있었다. 양녕대군은 그 집이 고양이를 쫓아온 여인의 집임을 알고 사립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니, 등불이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드디어 창문을 뚫고 들여다 보았더니, 그녀가 등불 아래에 혼자 앉았는데 분명 선녀의 풍도가 있었다. 참으로 이른바 물고기가 놀라고 꽃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미색이었다. 양녕대군은 일견에 춘심(春心)이 동하고 광혼(狂魂)이 촉발하여 냅다 방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려 대군을 보니, 용의(容儀)는 장엄하여 만 길의 산악과 같고 기상은 청수(淸秀)하여 천 길의 무지개와 같았다. 놀라 떨며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실낱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야밤에 과부의 방을 들어오는 것이오?”

“별사람 아니라 바로 저녁에 온 대군이니라.”

그녀는 더욱 황송해 하였다.

“대군행자는 그 얼마나 귀하신 분인데 이처럼 누추한 곳을 다 오시다니요? 더욱 황송하옵니다.”

“대군도 사람이니 겁낼 필요 없느니라. 연약한 몸을 상할까 염려스럽구나.”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는데 몸이 상하는 것을 어찌 염려하오리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애걸하였다.

“소첩은 바로 양가(良家)의 딸이옵니다. 지아비가 죽던 날 곧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소첩이 죽으면 죽은 지아비의 혼령과 나이 어린 동생이 의탁할 곳이 없겠기에 생각 끝에 죽지 못하고 우선 동생이 장가들기를 기다리며 아픔을 참고 수절합니다. 어찌 대감께서 여기에 오셔서 저를 떨게 하실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사옵니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사옵니다.”

“내 네 동생의 말을 들어 너의 높은 절개와 문벌을 알았노라. 그러나 내 하찮지 않은 몸으로 이미 여기에 왔는데 어떻게 차마 허행(虛行)할 수 있겠느냐?”

“소첩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대감의 존귀함을 모르오리까? 다만 소첩의 지아비가 나이 겨우 10여 세로 부부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혼례를 올린 지 몇 달 만에 갑자기 죽었는데 지금 거의 반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몸을 돌아보면 큰 인륜이 이미 정해졌기에 한번 죽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삼가 비옵건대, 대감께서는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어 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도록 해주옵소서. 사람이 비천하다 하여 가문의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양녕대군은 드디어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위로하였다.

“높구나 그 절개! 애석하구나 그 용모! 나이 지금 몇인데 이처럼 가련한 인생이 되었는고? 너는 지금 청춘이고 나도 소년이니라. 네 청춘의 나이로 어찌 차마 백 년을 헛되이 늙을 수 있겠으며 내 소년의 기개로 어찌 차마 좋은 밤을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느냐?”

 

그녀는 울면서 애걸하였다.

“변절하는 날이 바로 지아비를 배신하는 날이옵니다. 지아비를 배신한 여자를 어디 쓰겠습니까? 달게 죽겠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벽에서 은장도를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다. 양녕대군은 황급히 그 칼을 빼앗아 던지고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하여 다시 그녀의 뜻을 떠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병이 날 것인데 어떻게 하지? 너는 과연 나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을 셈이냐?”

 

그녀는 길게 한숨 쉬고는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서 말했다.

“황공 황공하옵니다. 천첩의 몸을 돌아보면 곧 벌레만도 못하온데 대군께서 천상의 신선처럼 강림하셨으니 이보다 존귀한 분이 없사옵니다. 이처럼 목숨 운운하신 분부가 계시는데 어찌 감히 소첩의 천한 몸으로 대감의 목숨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지금 엄한 분부를 받으니 황공 황공하옵니다. 만 번 죽어도 어찌 사양하겠사옵니까? 오직 대감의 분부대로 하오리다.”

 

양녕대군은 크게 기뻐하고 드디어 그녀와 동침을 하였는데, 마치 후한(後漢)의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天台山)에서 약을 캐다가 선녀를 만난 것과 같았다.

겨우 견권한 정을 나누자마자 혹시 통인이 알아차릴까 엿보았으나 은밀히 내통해준 기별에 의하여 감사와 서윤은 이미 대군의 동정을 알고 있었다.

 

대군이 객사로 돌아간 뒤에 정향은 곧 관가로 들어가서 대군의 동침한 사실을 낱낱이 고하였다. 감사와 서윤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행해진 일은 증거가 없으니 네가 반드시 양녕대군의 필적을 얻은 뒤에야 상감에게 아뢸 수 있다.”

그러자 정향이 말했다.

“원컨대, 사또께서 대군의 행차를 만류하여 며칠만 머물게 해 주시면 자연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감사는 응낙하고 이튿날 들어가서 문안을 할 때 조용히 대군에게 말했다.

“소신이 관할한 평양성 안팎에는 유람할 곳이 많으니, 원컨대 며칠 머무시어 두루 산천을 구경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녕대군은 속으로 밤에 있을 일을 생각한지라 기쁜 기색으로 답하였다.

“나의 이번 걸음은 본시 경치를 유람하기 위한 것이오. 도백의 말씀이 정말 나의 뜻에 합치하오”

 

드디어 며칠을 머물면서 낮에는 밤을 기다리고 밤에는 매양 그녀의 집에 갔다. 은밀이 나누는 애정이 단술 같고 꿀 같았는데 정향은 잠자리에서 또 온갖 교태로써 대군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대군은 날로 더욱 빠져들어서 이미 10여 일이 된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때는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계절이 되었다. 양녕대군은 다음날 성천(成川)으로 떠나려고 마음 먹고 밤에 정향의 집에 가니, 정향은 잠자리에서 양녕대군에게 말했다.

“대감께서 돌아가시는 날 소첩은 서울로 따라가서 밥짓고 물긷는 여비가 되어 일생을 마치기를 원하옵니다.”

“안 될 말이야. 내가 상감께 하직인사를 드릴 때 친히 색을 조심하라는 상감의 분부를 받았으니, 전일의 엄한 공문은 이 상감의 분부 때문에 내려진 것이다. 지금 너와 이 좋은 만남을 가진 것은 실로 상감의 분부를 어기는 짓이야. 체모를 손상하여 내 마음이 두렵고 부끄러운데 어떻게 데리고 갈 길이 있겠느냐?"

 

정향은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첩의 일생은 이로부터 그릇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운입니까? 위엄이 겁나 실절(失節)을 하였으니 비록 지하에 간다해도 다시 지아비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마치 담 밑의 꽃 한 가지가 농락을 당해 문득 진흙 속의 쇠잔한 꽃이 된 것과 같사옵니다. 살아서는 의지할 데가 없고 죽어서는 돌아갈 곳이 없어 공연히 주인 없는 의로운 넋이 되겠으니 어찌 망극하지 않겠사옵니까? ”

 

이내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대군의 앞가슴에 비비면서 목이 메도록 울었다. 흐느끼는 숨소리는 입 안을 벗어나지 않고 우는 소리는 실낱과 같아 곧 끊어질 듯하였다. 양녕대군은 정향의 등을 어루만지고 정향의 눈물을 씻어주면서 백방으로 위로하였다.

“헛되이 슬퍼하여 꽃 같은 얼굴을 상하게 하지 말라. 생전에 어찌 서로 만날 날이 없겠느냐?”

"소첩은 이미 따라갈 길이 없고 대감께서도 다시 오실 날이 없을 것이니, 생전에는 다만 애닯은 생각으로 지새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봄꽃과 가을달은 공연히 창자를 에는 빛이 되고 조각구름과 쇠잔한 비는 부질없이 넋을 사그라지게 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긴긴 세월을 어떻게 보내겠사옵니까? 소첩이 듣기에 서울은 인물의 고장이라 대감집의 법으로 매양 얼굴이 아름다운 양가의 딸들을 뽑아 후궁에 채워놓는다 하는데, 대감께서 한 번 돌아 가신 뒤에 금수(錦繡) 속에 노시고 분지(粉脂) 가운데 빠지신다면 어찌 다시 소첩을 생각하시겠습니까?

무염(無鹽:醜婦) 같은 소첩은 공연히 황천의 외로운 넋이 될 것인데 어찌 슬프지 않겠사옵니까? 어찌 애처롭지 않겠사옵니까?”슬픈 태도와 애처로운 말은 장부의 심장을 가를 만하였다. 양녕대군도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애정어린 눈물을 떨구려 하면서 억지로 말을 하였다.“너는 어찌 가련한 형상을 하여 나의 마음을 산란케 하느냐?”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말해 무엇하오리까? 원컨대, 소첩을 위해 정을 표시하는 물건을 하나 주시어 후일에 마음을 위로할 자료로 삼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야 어렵지 않지. 노래를 불러줄까? 시를 지어줄까?”

“노래는 기녀들이 하는 일이니 원치 않사옵니다. 원컨대 시 한 수를 얻어 대감의 안색을 대신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양녕대군이 즉시 종이와 붓을 찾으니, 정향은 붓과 벼를 받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종이는 쉽게 찢어지니 소첩이 시집올 때 채색 치마의 속폭에 써서 평생 동안 닳지 않고 찢어지지 않게하여, 죽은 뒤에 구덩이에 같이 묻힐 수 있는 자료가 되게 해 주옵소서.”

“뜻 있는 말이구나. 애석한 정이구나.”

 

양녕대군은 드디어 사운(四韻) 한 수를 치마의 속폭에 썼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한 번의 이별로 음성 용모 듣고 보지 못하리니 -別音容兩莫追

초대(楚臺) 어느 곳에서 좋은 때를 찾을고 -楚臺何處覓佳期

곱게 단장한 얼굴 누가 보리요 -粧成 面人誰見

수심에 잠긴 붉은 낯은 거울만이 알리라 -愁殺紅顔鏡獨知

밤달이 수놓은 베개 엿보는 것도 미운데 -夜月猶嫌窺繡枕

새벽 바람 무슨 뜻으로 비단 휘장을 걷는고 -曉風何意捲羅

 

끝 귀에 이르자 잠시 붓을 멈추고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소첩의 이름은 바로 정향이옵니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썼다.

 

뜰 앞에 다행히도 정향나무 서 있는데 -庭前幸有丁香樹

어찌 춘정(春情)으로 굳이 꺾지 않으리오 -把春情强折枝

 

치마폭에 아직도 여백(餘白)이 있으므로 양녕대군은 또 오언(五言)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이별하는 길엔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別路香雲散

헤어진 정자엔 조각달만 걸렸어라 -離亭片月鉤

가련타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에 -可憐轉輾夜

뉘 다시 그대 수심 위로해 주리 -誰復慰殘愁

 

또 이별의 슬픔을 담은 시 九難歌를 그녀의 치마폭에 써 주고는 정향에게 건네주어 간수하게 하였다.

 

留別丁香九難歌

 

難難.

爾難我難.

我留難爾送難.

爾南來難 我北去難.

空山夢尋難 塞外書寄難.

長相思一忘難 今相分再會難.

明朝將別此夜難 一盃永訣此酒難.

我能禁泣眼無淚難 爾能堪歌聲不咽難.

誰云蜀道難於乘天難 不如今日一時難又難.

 

어렵고 어렵구나.

너도 어렵고 나도 어렵구나.

나는 머물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 어렵구나.

너는 남으로 오기 어렵고 나는 북으로 가기 어렵구나.

공산(空山)에 꿈 이루기 어렵고 변방에 소식 전하기도 어렵구나.

임 생각 잊을 일이 어렵고 오늘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도 어렵겠구나.

내일이면 이별이니 이 밤 지내기 어렵고 한잔이면 이별이니 이 술 들기도 어렵구나.

내 울지 않아도 눈물 금키 어렵고 네 노랫소리 목메이지 않기도 어렵구나.

뉘라서 촉도길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 하더냐.

그보다도 오늘 이별이 더 어렵고 또 어렵구나.

 

이날 밤은 이별 생각에 잠겨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닭은 벌써 세 번이나 울고 밤은 5경(更)이었다. 양녕대군은 드디어 객사로 돌아왔고 이튿날 곧 성천으로 향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난 뒤에 정향은 즉시 관가에 들어가 그 치마를 보였다.

 

감사와 서윤은 크게 기뻐하고 곧 채함(彩函)을 구해 치마를 담아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 임금은 친히 채함을 열어 치마에 적힌 시를 보고 크게 기특히 여겼다.

“이것은 과연 형님의 필적이다. 형님께서 사랑하신 여인을 어찌 기적(妓籍)에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즉시 평양에 공문을 띄워 정향을 태워 오게 하고 미리 집 한 채를 지어 정향의 처소를 만들어 놓고 대기하라.”

 

얼마 후에 정향이 당도하여 궁궐에 들어가서 상감을 뵈었다. 세종 임금이 그녀를 보니, 하얀 손이며 붉은 얼굴이 참으로 국색(國色)이었다. 대군과 인연을 맺은 일을 물으니, 정향은 그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세종 임금은 파안대소했다.

“기특하구나. 기특도 해. 참으로 재간 있는 여자로구나.”

 

그리고 우선 정향을 궁중에 두고 양녕대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궁중의 여러 하인들은 모여서 정향을 보고 아연 실색하며 큰 소리로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서로 돌아보며 말했다.

“참으로 낙포(洛浦)의 선녀(仙女)로구나.”

 

한편, 양녕대군은 성천에 가서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들러 다시 정향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객사에 들어가서 보았더니, 일전에 허물어졌던 담은 이미 높이 쌓아져 다시 통행할 길이 없었고, 시중 들던 통인도 교체되었다. 양녕대군은 속으로 되뇌였다. '담이 이미 높이 쌓여졌으니, 마루 밑의 미친 고양이는 다시 반찬을 훔치지 못할 것이고, 마루 위의 미치광이 손님은 다시 향기를 도둑질하지 못하겠구나.' 양녕대군은 자연 심기가 좋지 못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몰래 중얼거렸다.

“아! 정향은 필시 내가 온 줄을 알 것이다. 몇 길 단장(短墻)이 문득 3천리의 약수(弱水)가 되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호사다마(好事多魔)로구나. 정향의 간장이 반드시 거의 끊어지리라.”

 

이튿날 드디어 서울로 향하였다. 양녕대군은 객사의 문 밖을 나와서 수레의 휘장을 높이 걷고 사방으로 성 안을 바라보았으나 정향이 거처하는 달팽이 껍질만한 집은 큰 집에 가리어서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양녕대군은 속으로 탄식하였다.

'저번 성천의 행차가 과연 영원한 이별이었으니 정향의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었구나. 아! 정향은 필시 담틈으로 나의 행차를 바라볼 것이니 갑절 슬프구나.'

 

며칠 후에 양녕대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기별을 알리자, 세종 임금이 연달아 문안을 보내는 승지(承旨)와 중사(中使)의 발길이 길에 끊이지 않았고, 색을 조심했다는 보고가 전해지자, 세종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태상(太常:奉常寺)과 아악서(雅樂署) 그리고 열읍(列邑)의 명기(名妓)들에게 명하여 미리 음악을 익히고 또 잔치를 베풀 제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양녕대군의 행차가 이미 모화관(慕華館)에 당도하자, 세종 임금은 드디어 숭례문 밖에 행차하여 양녕대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양녕대군이 이르러 관군(官軍)의 용위(容威)가 성대함을 보고서 상감이 친히 임어(臨御)하심을 알고는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한 중사가 진문(陣門)에 서서 왕명을 전하였다.

“말에서 내리시지 말고 속히 오시도록 하라.”

 

그리고 역졸(驛卒)에게 분부하여 조금도 멈추지 말고 빨리 달려 들어오게 하였다. 양녕대군은 말에서 내리려 하였으나 되지 않자, 그대로 곧장 숭례문 앞에 이르러 비로소 수레에서 내려서 몸을 굽히고 들어가 절을 하였다. 세종 임금은 마루로 나가서 혼연히 맞이했다.

“먼길에 평안히 갔다 오시니 천만 다행입니다.”

 

양녕대군은 엎드려서 아뢰었다.

“외람되이 성상의 염려를 입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세종 임금은 양녕대군을 불러 앞으로 오게하여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 앉아서 서로 오랫동안 이별한 회포를 풀었다. 직분으로는 비록 군신(君臣)이나 정리로는 실로 골육(骨肉)이었다. 그러므로 형제간의 화락한 정리는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세종 임금은 평안도의 산천풍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또 은근히 떠보았다.

“천태만상의 꽃떨기 속에 가셨다가 한 가지도 꺾지 못하고 돌아 오셨으니, 후회하시는 마음이 없으십니까?”

양녕대군은 엎드려서 대답했다.

“성상의 분부가 지중하시온데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또 아예 보지 않는 편이 낫겠기에 기생배들을 처음부터 근접하지 못하도록 엄금하였으니, 미색(美色)이 있고 없는 것을 원래 알지 못하매 자연 후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에 앞서 세종 임금은 양녕대군의 두 시를 악부(樂府)에 내려 관현(管絃)에 올리고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불러 익히게 하였다. 이때 정향은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면서 비단옷에 고량진미를 먹었으므로 옥처럼 빼어난 용모가 전보다 백배나 수려해져서 전일의 정향이 아니었다. 이날 세종 임금은 정향더러 여러 기생들 속에 끼어 앉아서 양녕대군의 동정을 보게 하였는데, 양녕대군은 임금과 가까운 자리에서 감히 눈을 돌려 훔쳐보지 못하는지라, 밤낮으로 이어진 연회였지만 낯이 오히려 익지 못하였다.

 

또한 천만 뜻밖의 일이라 전연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세종 임금은 술상을 올리게 한 다음, 악공은 음악을 연주하고 기생들은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기생들은 양녕대군의 시를 노래하고 또한 오언절구를 가지고 화답하였다. 양녕대군이 그 노래를 들어보니 바로 자기가 정향에게 준 시였다. 크게 의심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가 어떻게 여기를 왔다지? 옛말에 「시인의 의사는 일반이다」하였으니 혹시 옛날 사람이 먼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 시를 지은 것이겠지?'

 

그러면서 멍청하니 반나절이 되도록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한 기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녀와 같은 자태는 사뿐 나는 꾀꼬리의 맵시도 따르지 못하였다. 그녀는 다시 휘장 뒤로 들어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춤을 추었다. 춤소매가 너울너울 좌우로 회전할 때마다 문득 치마폭에 쓰인 시가 보이니 바로 자기의 필적이었다. 양녕대군은 술잔을 들어 마시려다가 상 위에 놓고 황망히 자리에서 떠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소신이 평양에 갔을 때 과연 저 기생과 며칠 밤을 동침하였습니다. 성상을 속인 죄는 족히 논할 것도 없거니와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상의 얼굴을 대하오리까?”

양녕대군은 이내 엎드리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세종 임금은 바삐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형님의 과실입니까? 제 죄입니다. 탓하지 말아주소서.”

 

그리고 그 밀교의 내용을 말해주고 억지로 양녕대군을 끌어다가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정향에게 명하여 양녕대군의 앞에 가서 절을 하게 하였다. 정향은 살짝 부끄러움을 띤 모습으로 구름 같은 머리를 반쯤 옆으로 드리우고 곁에 모시고 섰다. 그 고운 맵시와 천연스런 태도는 비할 수 없이 감동을 주었으니 옛날의 사랑과 새로 솟아난 정이 전보다 열 배나 더하였다. 세종 임금은 웃으며 말했다.

“형의 과실이니 아우의 죄니 하는 것은 족히 논할 것이 없고 정향이 재주와 지혜로써 우리 형제의 낙을 도왔으니 참으로 재녀(才女)이면서 기교한 자입니다. 오늘 보심이 전일 밤에 담을 넘어가 훔쳐보시던 것에 비해 어떠하신지요?”

양녕대군은 남은 부끄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아 빙긋이 웃으며 엎드려 대답했다.

“앞에 경계하고 뒤에 생각해주는 것은 성상의 간절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황송함과 감격함이 아울러 지극하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세종 임금은 정향을 앞으로 불러서 금은보화를 후하게 상을 주고, 휘장이며 그릇이며 쌀이며 베 등 여러 물품을 새로 지은 집에 가득 채우고 정향으로 하여금 그 집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부귀영화가 한 세상을 울렸다. 이날 여러 신하들은 마냥 즐기다 떠났고 양녕대군은 사은숙배하고 물러갔다. 양녕대군은 드디어 정향과 함께 곧 새로 지은 집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희롱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느냐? 너무도 교활하구나.”

정향은 엎드려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했다.

“소첩은 밀지를 받들고 부득이해서 한 일이었으나 실로 교만한 죄가 많았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대감께서는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소서.”

"허물어진 담으로 고양이를 쫓아서 뜰에 들어섰을 때에도 오히려 너를 죄주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이제는 정이 이미 무르익고 사랑이 이미 깊었거늘 어찌 죄줄 생각이 있겠느냐?”

 

양녕대군은 이내 다가가 정향의 허리를 안고 말했다.

“네가 나를 속인 꾀는 비록 한(漢)나라 때 여섯 번 기이한 꾀를 낸 진평(陳平)의 재주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성천에서 도로 평양으로 갔더니 헐어진 담이 높이 쌓아져 있더라. 다시 너를 보지 못하니 이별의 쓰라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어 마치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았느니라.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을 돌아보고 한갓 마음만 상했을 뿐이니라. 뜻하지 않게 이제 홀연히 서로 만나니 마치 황천의 사람을 만난 것과 같구나.”

정향은 대답했다.

“모두가 성은이옵니다. 그러나 천첩은 복이 과하여 재앙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양녕대군은 웃고 드디어 정향과 더불어 잠자리에 들어 함께 즐겼다.

애정은 날로 깊어지고 자녀도 많이 낳고 함께 부귀를 누리며 백년해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