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仁烈王后]
1594(선조 27)~1635(인조 13).
조선 제16대 인조의 비(妃).
조선 인조(仁祖)의 비(妃)로, 성(姓)은 한씨(韓氏), 본관은 청주(淸州),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한준겸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을 때인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인동(仁洞)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綾陽君:인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하여지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비(王妃)가 되었다. 왕후는 성품이 인자하여 인조를 도와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았다고 한다. 1651년(효종 2) 휘호(徽號)를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추상(追上)하였다. 인열왕후의 슬하에는 효종(孝宗)·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 4형제를 두었다. 능(陵)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는 파주 운천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영조 7) 교하로 이장하였다. 1758년(영조 34) 영조(英祖)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인열왕후탄생고기비문(仁烈王后誕生故基碑文)' 비석(碑石)을 지금의 원주시 인동 왕비각(王妃閣)에 세웠는데,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비각(碑閣)은 물론 비석까지 파괴되었다. 그후 최근에 청주한씨 문중에서 '인열왕후탄생지비(仁烈王后誕生地碑)' 비석을 원주고등학교 앞 공원에 다시 세웠다.
인열왕후탄생지비(仁烈王后誕生地碑)
강원도 원주시 개운동 415 원주고등학교 앞
이 비는 여지도서(輿地圖書), 관동지(關東誌),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 원주군읍지(原州郡邑誌), 한문본강원도지(漢文本 江原道誌)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다만 표제가 조금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한 인열왕후 비에 대한 것이다.
유 래
비각은 6. 25 전쟁 때 파괴되었고, 최근에 청주한씨 종친회에서 뜻을 모아 비를 새로 제작하여 건립한 것이다. 인열왕후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장릉에 모셔져 있다.
업 적
인조의 비 명덕 정순 인열왕후는 한씨이시며, 본관은 청주다.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문익공 한준겸의 따님으로 선조 27년(1594) 7월 1일 원주 읍내의 우소에서 탄강하셨다. 광해군2년(1610)에 가례를 행하여 처음에 청성현 부인으로 봉하여지고, 1623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 13년(1635) 12월 9일에 창경궁의 여휘당에서 승하하시니 춘추 42세였다. 효종2년(1615) 휘호를 명덕정순으로 추상하였다. 인열왕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3년째에 원주에서 출생하여 7년 전쟁속에서 초년을 보내었고, 왕가로 출가해서는 영창대군 폐서인 살해사건, 김제남 사사, 인목 왕후 서궁 유폐사건을 겪으면서 인조2년(1624)에는 이괄의 난을 당하였다.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조정이 공주로 피난을 가는 참변을 겪었으며, 1627년에는 청나라가 3만 대군으로 침입하여 조정은 강화로 피난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는 등 전국이 전운에 감싸였다. 화전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화해가 성립되어 형제의 의를 맺고 물러가게 되었으니 정묘호란으로 5년에 걸친 싸움으로 인적,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처럼 인열왕후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셨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생활 필수품의 궁핍으로 손수 길쌈에 힘썼고, 검소한 생활로 만백성의 모범이 되었다.
◈ 仁烈王后誕生地碑는 興地圖書, 關東誌, 奎章閣圖書, 原州郡色誌, 漢文本江原道誌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다만 義題가 "御書碑閣"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仁烈王后誕生地碑"로되어 있기도 하고,"御書碑閣乃仁烈王后誕生地"로 되어 있는 등 표제는 다르나 내용은 동일한 인열왕후 구허비로 이들 글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제16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인 장릉(長陵)의 비문]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사 적 : 제 203 호
長陵의 특징
仁祖(인종 ; 1595-1649, 재위 27년)과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長陵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후 곁에 인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영조(英祖)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은 합장릉으로 천장(遷葬)할 때 다시 만들어졌고,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의 화문(花紋)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문 내용
仁祖大王妃 仁烈王后(인조대왕비 인열왕후)
역문(譯文)
생각컨데 한씨는 덕을 쌓은 서원(청주의 옛 명칭)에서 계출하였는데 위엄스런 정령이 거듭 沙麓의 상서를 (사록은 중국 하북성 대명현에 있는 산으로 춘추시대 진나라 때 그곳이 무너지고 645년 뒤에 귀녀가 태어 났다고 한다. 이 사록의 정령은 태음의 기운인데 음이 양웅으로 되고 오행의 토화가 상승되어 무너지며 한나라의 "원후전"에 의하면 그런지 80년후에
귀녀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사록의 상서라 하면 전의하여 왕후를 탄생시킨 것을 뜻하며 서원의 한씨 즉 청주 한씨 집안에서는 전부터 누차 왕비를 배출했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발하여 대개 일컫기를 우리 동방의 摯莘(지재)라 한다.
("지"는 폐백을 가지고 가서 귀녀를 맞아 온다는 뜻이고, "신"은 귀녀가 나는 지명이다. 하나는 중국 협서성 합양현에 있던 나라로 주나라 문왕의 비 태사가 났고 다른 하나는 산동성 조현에 있었는데 하나라 우임금의 어머니 출생지이다)
그 선조에 휘 란이란 자가 있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평정시키고 관직이 태위(3공의 제1위로 태사와 같다)로써 삼중대광에 이르렀으며 이로부터 높은 벼슬이 연이어 5대에 이르도록 宰執의 지위를 서로 이어 내려 왔다. 우리 왕조에 들어 와서는 휘 상경이 있어 개국공신에 책훈되고 서원부원군에 봉해 졌으며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는데 다시 2대를 내려와 문정공 계희가 의정부좌찬성에 서평군으로 봉해지니 왕후에게는 6대조가 된다.
고조부는 휘 승원으로 정선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증조부 휘 여필은 중추부경력으로서 증 영의정이며 조부 휘 효윤은 경성부판관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고(부친) 위 준겸은 出將入相(출장입상)의 덕업이 있어 여덟 품계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5도도원사에 이르렀는데 國舅(국구; 임금의 장인)에 대한 사례로 서평부원군으로 진작되고
령돈녕부사가 되었다. 배위는 회산부부인 황씨로 창원 본관의 큰 씨족인 예조좌랑 증 참판 휘 성의 딸인데 만력 갑오(선조 27년, 단기 3927, 서기 1594) 7월 정축일에 왕후를 탄생하였다.
왕후는 태어 나면서부터 다른 바탕을 지녀 망령된 유희를 하지 않고 말하는 모습, 움직임과 그침이 예사 아이들과 거리가 멀었으며 태어나서 얼마지 않아 모친인 황씨가 별세하자 조금 자라면서부터 부친인 서평군을 섬김에 있어 조석으로 문후하는 일을 반드시 여러 오라비와 형들보다 앞서 하였다.
병오년(선조 39년)에 왕후는 13세였는데 마침 처자를 간택하는 일이 있게 되자 선조대왕께서 그 현숙함을 아시고 우리 전하에게 맞을 것을 명하시었다.
그리하여 納幣(납폐)를 행하였으나 이때 선조께서 승하하시게 되어 3년간의 국상 기간이 끝난 경술년(광해군 2년, 단기 3943, 서기 1610) 9월에 친영을 행하고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다.
처음에 왕후가 집에 있을 때에 하루는 밤에 자다가 가위가 눌린 듯 놀라 소리치니 서평군이 진정시키고 물은즉 왕후가 꿈 이야기를 하는데 "집의 지붕이 쪼개어 열리고 하늘로부터 해와 달이 내려와 품속으로 들어와 안겨서 놀라 소리 쳤다" 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 친영에 응해야 할 터인데 瘡疹(창진; 부스럼과 가려움증의 피부병)이 심하여 매우 염려스러웠는데 서평군이 꿈을 꾸니 선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근심하지 말라, 질환이 저절로 나으리라" 하시더니 과연 그와 같이 되니 서평공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원종대왕이 정원군으로 잠저에 계실 때 왕후가 입문하여 높이 받들어 모시되 은의가 사친보다 더하게 하시었다.
능창군의 화가 일어나자 ***(원종의 아들, 인조 아우 전으로 왕기를 타고 났다고 하여 중부인 광해군의 시기를 받다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 한다는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사형 당함) 내외의 이권을 노린 무리들이 뇌물을 탐하여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왕후께서는 혼수로 가져 온 진귀한 보물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고 가족을 지키니 원종께서 가상히 여겼다.
계해년(인조원년, 단기 3956, 서기 1623)의 정사(인조반정)의 거사에는 밀모에 참여하여 은밀히 도운 것이 많았는데 주상께서 보위에 오르자 왕후도 곧바로 책봉되었다.
을축년(인조 3년)에는 천자도 중귀인(내관) 왕민정과 호량보를 보내 우리 전하를 책봉하고 아울러 왕후에게도 고명과 관복을 보냈다.
왕후가 이미 장추궁(후한의 궁궐 이름인데 황후가 거처 했으므로 황후궁을 이르는 말)에 정위하여 일국의 모의로서 密勿(밀물; 임금 곁에서 부지런히 힘쓰며 나라의 기밀에 참여함)하며 陰敎(음교; 보이지 않은 보좌)를 편 것이 3년이었는데 을해년(인조 13년) 겨울에 남아를 탄생(넷째 아들 용성대군) 하시었으나 그 아들을 잃으니 심히 상심하여 發熱作疾(발열작질;병이 생겨)하사 마침내 위중해지더니 그 해 12월 초9일에 창경궁의 려휘당에서 승하하시매 춘추가 42세였다.
유사가 시법에 따라 의논하여 인덕을 베풀고 의리에 복종하였다 하여 가로되 "인"이라 하고 공이 있고 백성을 안심시켰다 하여 "열"이라 일컬는 존호를 올려 "인열"이라 하고 이듬해 4월 을유일에 장릉에 장사 지내니 릉은 파주 북쪽 십여리 정도에 있는 甲坐寅向(갑좌인향)의 언덕이다.
왕후는 자성이 유순하고 정청하며 어질고 효성은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인목대비(선조의 계비 김씨)의 성품이 엄하였는데 왕후가 공경과 효성으로 섬기고 곁에 두고 쓰는 것들에 모두 극진한 예와 뜻을 다하여 받드니 양궁간의 자애와 효성에 시종 간격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비기 승하하시자 애모로서 예를 다하였다.
성상을 섬김에는 공경과 순종으로 일관하고 주상께서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불상한 기미가 보이면 앉은 채로 날을 새기를 기다리고 일에 따라서는 箴規(잠규; 바늘로 찌르는 말과 같은 잠언으로 경계하고 규찰하여 보살핌)를 다하여 더욱 잘 되도록 도운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한번은 覆舟圖(복주도)를 보고 계시자 왕후께서 진언하기를 "상께서 이를 보시면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생각하시고 그저 헛된 완구로 삼지 마소서" 하였다.
상께서 간혹 궁안의 동산을 고치고자 하나 왕후가 기뻐하지 않으니 공역을 그만 두게 하신 것이 여러 차례였다. 또한 言官을 특별히 遞職(체직; 바꾸다) 시키려 하자 "그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그 벼슬이 諫官(간관)의 명분인데 이를 조치하심에 있어 공의를 따르지 아니 하신다면 전하의 군덕에 누가 되고 언로가 방해 될까 두렵습니다" 하셨다.
내외의 분수에는 더욱 엄격하여 조정의 정사와 바깥 일에는 더불어 듣지 않았으며, 친정을 위하여 은택을 희구한 적이 없으며, 친속들이 여러 차례 관직 임명의 추천 명단에 올라 낙점을 받지 못해도 말 한마디 않았으며 관직을 얻은 자가 있어도 왕후가 또한 이를 알지 못하니 주상께서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궁안이 정숙하고 화목한 가운데 잘 정비되어 있게 하고 움직임과 용모와 말씀이 저절로 의칙에 맞았으며 단아한 뜻으로 청렴하고 검약하며 화려한 수식을 좋아하지 않고 저축하고 갈무리는 일 또한 일삼지 않았다.
여러 아들을 자애하심에 지극하였으나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옳고 방정하게 하였으며 친척을 두루 賑恤(진휼; 구휼하다)하되 항상 안을 먼저 우선하고 바깥을 살폈다.
아랫사람들을 거느림에 너그럽고 공평하였으며 엄격하되 은혜로움이 있었다.
숙의 장씨가 들어옴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우흡하였으니 이처럼 아래까지 미치는 인덕에 사람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심한 추위와 더위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병사의 노고를 진념하시어 때때로 음식을 하사하셨다.
이에 승하하시던 날에는 비록 궁벽한 여염의 부녀자도 분주히 달려와 호곡하고 애모하였다.
왕후는 세 아들을 탄육하셨는데 세적으로 儲貳(저이; 동궁을 이르는 말, 당시의 세자인 소현세자)로 게시고 다음은 봉림대군(효종대왕) 淏(호)이고 다음은 인평대군이다.
왕세자는 대사헌 강석기의 딸을 맞이하였고 봉림대군은 신풍군 장유의 딸을 맞이하여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인평대군은 교리 오단의 딸을 맞이하였다.
신이 보건데 예전에 제왕이 일어남에는 반드시 후비의 현철함이 있어 내치를 돕고 보살폈던 고로 十亂(십란; 주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열명의 난신인데 그 가운데 문왕의 어머니가
들어 있다) 의 열에 부인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공손히 생각컨데 우리 전하께서 穆淸(목청; 하늘)의 명을 받들어 종묘와 사직을 전안시킴에 왕후께서 하늘이 짝해 주신 배필로서 홍업을 긴밀히 돕고 문채를 머금으신 배덕으로 곤극의 지위를 순승하셨으니 장차 효도하고 공경하는 가르침과 자애롭고 어진 풍화가 훈승되고 창달하여 관저의 협화가 이루어지고 인지의 바람이 일어나 우리 동방이 태평하고 아름다운 이룸을 볼 것이었는데 뫼언덕과 같이 높은 수명을 내리는 것을 하늘이 끝내 아끼고 말았으니 오호,,, 애통하도다.
신 유(지은이)는 공경히 교지를 받들어 그 덕망과 행실을 차례로 엮어 현궁(임금의 무덤)의 돌에 새겨 길이 보이게 끝이 없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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