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 한국여성지성사의 샛별
임윤지당(任允摯堂ㆍ1721-1793)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철학자였다. 어찌 윤지당 한 사람에 그칠까마는, 윤지당이 자기의 문집 초고를 지계로 올려 보내며 쓴 글을 읽으면, 조선 시대에 이런 여성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여성 지성사(知性史)가 새삼 놀랍다.
"나는 어려서 성리학이 있음을 알았다. 자라서는 그것을 좋아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라는 데 구애 받지 않고 마음 속으로 방책(方策)에 실려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연구했다. 그러기를 수십 년 하고 나니 뭔가를 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글자로 쓰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에 묻어 두고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두고 보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초목과 같이 썩어 버리고 말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는 여가에 틈을 내어 글로 썼더니 어느 사이에 큰 두루마리 하나가 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40편인데 첫머리 '송씨 아내의 전(傳)'부터 '안자의 즐거움(顔子所樂論)'이란 8편의 글은 내가 시집오기 전에 지은 것이고, '자로를 논함(子路論)' 이하는 중년과 만년에 지은 것이다. 내 지식의 뿌리는 얕고 보잘것없으며 글재주는 짧고 모자라서 오묘한 뜻을 밝히지도 못해 뒷날에 남길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죽은 뒤에 이것이 항아리 덮는 종이나 되고 만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것을 한 책자로 엮어 아들 재준에게 준다. (하략)" (이혜순ㆍ정하영 역편,《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산문편, 이화여자대학출판부)
조선 여자로 '성리학'을 말하는 일만으로도 전례를 보기 어려운 일인데, 윤지당은 어려서부터 이 성리학을 알았다니 학문적 자각이 놀랍다. 더구나 자라서는 학문을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렇게 수십 년 홀로 정진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문집으로 묶어 아들에게 보내며 이 글을 남겼다.
물론 그미는 기호학파의 두드러진 철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누이이고, 그의 격려를 받으며 공부했다. 그러나 학문은 홀로 갈고 닦는 연찬의 과정이며, 이 글 속에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게다가 성리학(性理論)은 물론, 성리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심성 수양의 실천적 모습들이 스스로 쓴 글들에 돋보인다. 더구나 시집 온 18살 전에 벌써 전기와 논문 8편을 썼다 했고, 결혼한 지 8년 만에 홀로된 어려운 평생을, 주경야독으로 문집까지 남긴 학문적 열정은 가히 한국 여성 지성사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그 오라버니 녹문도 중국의 철학자 "정자(程子) 집안의 따님은 대수롭지 않다"고 평했다는 지성이다.
윤지당은 반세기 뒤에 강정일당(姜靜一堂ㆍ1722-1832)이라는 후배를 촉발한 바 있지만, 이제 인문학은 여성들의 학문이 되었다는 말이 윤지당의 후예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꿈을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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