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불교 포교에 앞장선 거돈사(居頓寺)
박 형 진(전 원주문화원장)
거돈사 앞에 정산초등학교 분교자리가 있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살지 않고 모두가 약속이나 한듯 도회지로 떠났기 때문에 아동이 없어 폐교된지 이미 오래이며 지금은 목재소가 들어서서 옛추억도 아른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때는 이 근처에 100여호 이상이 거주하여 아동이 많은 관계로 이 산간 오지에 초등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순박했던 전형적인 농민의 마음 즉 농심(農心)이 있었기에 뜻있는 사람들이 터를 기증하여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폐교된 초등학교 안에 가로 78㎝, 세로 53㎝, 길이 6m85㎝의 육중한 사각형 기둥이 있으니 그 무게만해도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름아닌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법천사와 거돈사 당간지주 이야기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많은 군중을 집합하여 부처님에 대한 강의 즉 설법(說法)을 할때 부처님의 괘불(掛佛)을 걸어놓을때 두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걸어놓던 것으로 이로 인하여 큰 법회(法會)를 열다보니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사람이 많이 모여 큰 소리가 오고가면 야단법석이 났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많이 모여 부처님의 진리를 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개가 있어야할 당간지주가 하나밖에 없고 또한 거돈사 입구에 세워져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이미 천여년전의 일이라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촌로(寸老)들에 의하여 전해내려오는 야사가 있으니 참으로 재미가 있다. 당간지주 한개는 부론단강을 지나 사기막이라는 동네가 산속에 있는데 옛날에 사기를 구웠던 까닭에 사기막이라고 동리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기막 앞에 큰산이 있는데 돌산이라 그곳에서 당간지주를 채취하여 한개는 옮겨 지고 나머지 한개는 지금도 사기막동리 앞산에 다듬어진 그대로 남아있다.
이를 옮기기 위하여 일을 시작할 때, 한 남매가 있어 누나는 법천사 당간지주를, 남동생은 거돈사 당간지주를 세우게 되었다.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누나되는 사람이 요령을 부렸다. 남동생이 “누나 당간지주를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묻자 누나의 대답이 “원체 크고 무거운 돌이라 힘이 센 장정을 많이 구하여 힘쓰는 음식을 잔뜩 먹어야 하는데 콩을 볶아서 많이 먹여야 된다”고 심술궂게 일러 주었다.
순진난만한 동생은 누나의 말을 그대로 듣고 시키는대로 하였다. 장정들이 볶은콩을 워낙 많이 먹고 목이 마르니까 찬물을 많이 마신 관계로 모두가 설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모두가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거돈사 당간지주는 겨우 한개만 거돈사옆 지금의 정산초등학교 본교자리에 옮겨 놓았고 다른 한개는 엄두도 못내고 그대로 원자리인 사기막 앞 산에 그대로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누나는 동생을 속이고 무사히 당간지주를 옮겨 놓았기에 법천사에는 당간지주 2개가 나란히 천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조고 조상님들이 왕래하며 기도하는 모습은 물론 임진왜란때 왜놈에 의하여 가엾게도 그 많은 법천사 법당을 비롯한 중후한 모든 건물이 불타 재로 변해 버리고 말때 어찌 돌로 된 당간지주라 한들 눈물을 안흘리고 통곡하지 않았겠는가.
이 이야기는 정산드리 156에서 오랫동안 이 동리 이장을 역임하고 있는 윤혁섭씨의 증언에 의하여 엮었다. (전화 765-5411)
<원주 투데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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