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太極)
순환성지닌 원융무애 상징…불성과 밀접
감은사지 장대석 문양, 주돈이 태극도형보다 4백년 앞서
고대 한국인 정신세계가 창조…생명의 순환운동과 상통
우리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장식문양이 많지만 태극 문양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영역에서 애호되어 온 것도 드물 것이다. 능묘의 홍살문, 서원, 향교의 출입문 등 유교 건물을 비롯해서 성문이나 장대(將臺)의 판벽 등의 성곽건물, 부채, 무구(巫具), 악기 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 태극문양이 존재하고 있다. 사찰에서도 법당을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 서까래 끝, 법당 문의 궁창, 법고(法鼓) 등에 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양, 양주 회암사지, 남양주 봉선사, 춘천 청평사 등 왕실 원찰(願刹)의 태극문양이 눈여겨 볼만하다. 이밖에 해남 대흥사 경내 표충사 대문의 태극, 의성 고운사 우화루 서까래의 태극, 양산 통도사 관음전 정문 궁창의 태극, 밀양 표충사 대광전 정문 궁창의 태극, 양평 용문사 축대 계단 소맷돌, 상주 남장사 칠성각 천장의 태극 등 많은 유례가 있다.
사람들은 태극문양이라고 하면 보통 태극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 근원을 송나라의 성리학자 주돈이(1017~ 1073)의 태극도형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찰건물에 보이는 태극문양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음양 원리나 태극도형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태극도설 내용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주돈이가 태극도형을 그리기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태극문양이 사찰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고, 또한 성리학과 관련이 없는 인도, 유럽 등에서도 태극과 유사한 문양을 사용한 예가 있기 때문에 태극문양이 성리학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 장식중 태극문양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 감은사지에서 발견된 이파문(二巴紋) 형식의 태극문양이다. 금당(金堂) 석재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대석에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은 일정한 여백을 사이에 두고 음.양의 양의가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바람개비 형태로 되어 있다. 감은사가 신라 신문왕2년 (682년)에 완성된 절이므로, 이 태극문양은 송나라 주돈이가 처음 그린 태극도형보다 약 400년 앞선 것이 된다. 또한 고려 광종 24년 (973년)에 창건된 춘천 청평사 대웅보전 정면 계단 소맷돌 양쪽에 연꽃잎에 둘러싸인 태극문양이 있는데, 이 태극문양도 시대적으로 주돈이의 태극도형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태극문양은 사찰뿐만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보검, 보관 등에도 장식되었는데, 신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감장보검의 3태극문양, 고구려 진파리1호분출토 관형금구의 태극장식문양 등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유례는 중국에서 주돈이에 의해 성리학이 정립되고 태극도형이 그려진 시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이미 그와 같은 우주관과 세계관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태극문양은 태극도형을 원조로 하는 장식문양이 아니라 고대 한국인의 정신세계가 창조한 생활 장식문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혼돈(chaos)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원초적 혼돈상태에서 밝고 맑은 기(氣)는 하늘을, 탁하고 무거운 기는 땅을 이루었으며, 또 천지에 음양이 나누어지고 만물이 생겨났다고 믿었다. 존재의 근저를 이루는 이와 같은 역동적인 힘, 창조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언제나 상징을 사용했다. 경북 고령 양전동과 울주 천전리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에 나타난 3개의 동심원으로 된 문양은 삼라만상이 분화 생성되기 이전의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생각이 옳다면 동심원으로 된 원상은 태극문양을 감싸고 있는 원상, 즉 태일(太一)의 의미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때로 샤머니즘과 함께 중층 구조를 이루면서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와 인간의 길흉화복이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한국 전통 사상의 한 줄기를 차지하는 무속사고(巫俗思考)의 내세관 속에 저승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함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 곳이 저승이라는 곳이다. 저승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서 관념되는 혼돈상태이고, 정해진 수명을 가진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다시 이 혼돈상태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고 믿는 것이 사생관(死生觀)의 핵심이다. 죽어서 혼돈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분화.생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生)의 기를 다시 받아 또 다른 생명으로 이승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유한적인 존재인 사람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면서 영원히 생명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속사고로 보면 삶과 죽음이란 별개가 아니라 동일근원(同一根源)에 바탕을 둔 분화와 순환지속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한산 구복사 암벽에서처럼 신당(神堂)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태극문양을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런 관념의 시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혼돈상태는 언어나 구체적 형상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사의하고 절대적인 존재는 자연물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해 낼 수 없다. 그래서 구체적 형상을 초월한 가장 타당한 상징형을 찾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생성의 잠재적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는 혼돈상태는 정지가 아닌 운동성과 순환성을 본질로 한다. 이 운동성과 순환성을 동시에 가진 상징형이 바로 소용돌이 형태인 태극문양인 것이다.
감은사 태극문양의 예에서 보았듯이 고대의 태극문양은 바람개비 날개처럼 생긴 것이 원상 안에서 소용돌이 운동을 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태극도설에서는 이것을 양의(兩儀)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서 돌고 있는 두 개의 구름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문양은 백제 시대의 문양전(文樣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구름은 부동(浮動)의 기체이면서 천변만화의 형태와 내재적 기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무한히 유동하는 우주의 환상적 경지를 구름문양을 통해 표현해 냈다.
태극문양에는 2태극, 3태극, 5태극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2태극은 음양의 원리가 함축되어 있으며, 청색.적색.황색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는 형태로 된 3태극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나타낸다. 도가(道家)에서는 ‘一’이 ‘二’를 낳고 ‘二’가 ‘三’을 낳으며, ‘三’이 만물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一’ ‘二’ ‘三’이 곧 수의 근본인 동시에 창조의 원리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史記) 율서(律書)〉에서는 “수는 ‘一’로부터 시작하고 ‘十’에서 그치며, ‘三’에서 완성된다”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3이라는 수는 가장 완벽한 수이며, 또한 만물을 낳는 근원의 의미를 가진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색깔을 보면, 2태극은 청색과 적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3태극은 여기에다 황색이 추가되어 있다. 2태극의 양의는 각각 음과 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색을 적용할 경우에는 오행상의 음양 관계에 있는 흑색과 적색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흑색과 적색의 관계는 오행으로 보면 수극화(水克火)의 상극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고 목생화(木生火)의 상생의 관계에 있는 청색과 적색을 취한 것이다. 생생의 가능성을 지닌 혼돈상태를 색으로써 상징화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상생의 관계에 있는 색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태극 문양은 원상(圓相) 속에 적색의 양과 청색의 음이 상하로 상대하면서 회전.순환하고 있다. 양의와 음의가 원상 속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맞물려 돌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본시 음과 양은 개별성과 의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면서 상호 일체(一體)를 구현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천지가 한 태극이며, 만물 하나 하나가 모두 태극의 원만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하늘의 달이 천강(千江)에 비칠 때 강에 다 둥근 달이 있는 것과 같이 불성은 어느 곳이든 누구나 차별이 없이 모두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로서 원융무애하고 사멸이 없다는 점에서 태극과 불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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