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사찰의 상징 - 원상(圓像)

難勝 2011. 5. 20. 06:01

 

원상(圓像)

 

마음의 본성을 찾아가는 禪의 상징

 

수선당, 심검당, 선불장 등의 편액이 붙은 사찰 선방(禪房)에 들어가 보면 커다란 원이 그려진 족자나 액자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불전 외벽 등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에서도 큰 원이 그려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원을 그림 형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을 우리는 원상(圓像)이라 부른다. 원상은 선(禪)의 추상적 개념인 원상(圓相)을 원의 형태로써 상징화, 시각화 한 것으로, 예배의 대상이나 장엄용으로 제작된 사찰의 여타 그림들과 구별된다. 원상은 오묘한 불법 진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징표이기 때문에 원상이 갖는 의의는 원의 형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있다.

 

원은 끝없는 점의 연속… 영원성과 상통

설할수도 논할수도 없는 ‘진리’ 나타내

범어사 ‘심우도’중의 원상 ‘不二’의미

큰 원이 작은 원 셋 둘러싸… ‘智’ 상징

 

노자 〈도덕경〉 첫 구절에 “도(道)를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말이 나온다. 도라는 것은 우주의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한정된 언어 표현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개념임을 노자는 이 짧은 경구로 설파했다. 원상의 배후에 함축된 불법의 진리 또한 몇 마디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옛날 한 큰스님이 원상이 함축하고 있는 불법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송구(頌句)를 읊었다.  

 

옛적에 부처님이 탄생하기 전(古佛未生前)  

서려있는 한 모양 둥그렇구나(凝然一相圓)  

석가도 오히려 이 도리를 몰랐거늘(釋迦猶未會) 

가섭인들 어떻게 이것을 전했을 소냐(迦葉豈能傳)

 

 

큰스님이 이렇게 계송으로 답을 대신한 것은 진리는 설할 수 없고 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스스로의 관법(觀法)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실로 부처님이 탄생하기 전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존재하고 있던 불법(佛法)의 진리를 몇 마디의 말로써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가깝게 접근하려면 언어가 아니라 관법을 통해서 직접 부딪혀 깨닫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일체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우주 사이의 모든 사물이 진실한 자태로 있는 원래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을 비추어 보는 것을 ‘관심(觀心)’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만법의 주체로서 모든 것이 마음과 관계됨으로 마음을 살피는 일은 곧 만유 일체를 관찰하는 것과 통한다. 따라서 만약에 인간이 그의 본성을 깨달았다고 하면, 모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스님들이 좌선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찾기 위해 용맹정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원의 기하학적 정의는 무엇이며, 또 원상이 마음의 본성을 찾는 선(禪)의 상징으로 선택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기하학적으로 볼 때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점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호상에서의 점의 무한한 선회는 영원성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호는 중심의 한 점으로부터 거리가 같은 점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원호 상의 무수한 점은 모두 중심에 통섭되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원은 크기가 크거나 작다고 하더라도 항상 원으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특성을 지니며, 원호 안에 내포된 모든 것은 원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전체성의 사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원이 가지고 있는 일련의 속성들은 선종에서 말하는 원상(圓相)의 개념과 부합되는 점이 많다.

 

선(禪)의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일원상(一圓相)은 “조금도 부족함과 결함이 없는 보편성과 구족(具足)의 타당성을 지닌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말한다.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원족(圓足).원돈(圓頓).원통(圓通).원묘(圓妙).원만(圓滿) 등의 개념이 있다. 원족은 하나를 거론함에 일체의 모든 것이 스스로 수용됨을 뜻하고, 원돈은 처음과 끝의 구별도 없거니와 수행의 단계를 거친 것이 아닌 순간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원통은 불.보살이 깨달은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원통의 원(圓)은 본성이 만물에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을 말하며, 통(通)은 뛰어난 행동이 거리낌이 없음을 뜻한다. 원묘는 피차의 구별이 없는 일체불이의 절대 평등 상태를 일컫는 것이며, 원만은 모든 법을 두루 갖추어서 잘못되거나 흠이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원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우주만물의 본원이요, 모든 부처와 모든 성인의 심인(心印)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서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이며,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에 변함이 없는 자리”라고 정의하고 있다.(〈正典〉 제2 교의편).

 

이러한 선적 개념으로서의 원(圓)을 기하학적 도형인 원(圓)에 결부시킨 것이 원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원호상의 무수한 점들이 중심의 한 점에 통섭돼 있다는 점, 이것이 하나를 거론함에도 일체의 모든 것이 스스로 수용되는 원족(圓足)의 개념과 연결된 것이다. 또한 시작도 마침도 없고, 처음과 끝의 구별이 없는 원호의 기하학적 특성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순간의 깨달음, 즉 원돈(圓頓)의 개념과 결부되었다. 그리고 크거나 작은 것을 불문하고 모든 원이 가지고 있는 포괄성, 그리고 전체성의 상징성은 본성이 만물에 두루 미치는 것을 뜻하는 원통(圓通)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한편 원은 그 모양이 만월(滿月)과 비슷하여 만월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보리심(菩提心)을 흔히 만월에 비유하는데, 그것은 밝고 깨끗하며, 광명을 천지에 두루 비치어도 분별됨이 없는 것이 보름달과 같기 때문이다. 달은 원통의 개념과 상응하고, 원통의 개념은 또한 원상의 이미지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편, 심우도 중 ‘인우구망(人牛俱忘)도’에 원 하나가 화면 가득히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각 사찰의 ‘인우구망도’를 보면 송광사 승보당의 심우도처럼 붓으로 ‘ㅇ’자를 쓰듯이 표현한 것이 있고, 범어사 보제루의 경우처럼 기하학적인 원의 형태를 정교하게 묘사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모두 사람과 소를 그리지 않고 원상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것이 없다.

 

심우도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의 일종이다. 보통 10단계의 장면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 부르기도 한다. 심우도에는 언어와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不立文字), 부처님이 가르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겨(敎外別傳), 사람과 사람의 실상을 찾아(直指人心), 바로 부처가 되는 것(見性成佛)을 이상과 원리로 삼는 선종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심우도의 원류는 중국 송나라 사람 확암(廓庵)의 〈십우도송(十牛圖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인우구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여덟 번째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고삐와 사람과 소 모두 공으로 돌아갔으니 

푸른 하늘 텅 비고 넓어서 참으로 통하기 어려워라 

화로의 불꽃 위에 다투어 눈을 받아들이듯이 

이 경지에 이르면 바야흐로 조종과 합치된다네

 

이 시의 내용을 원용해서 그린 것이 바로 ‘인우구망도’이다. 그림의 원상은 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 즉 피차, 주객의 구별이 없는 일체불이(一切不二)의 절대적 평등의 경지를 나타낸다.

 

순수한 원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원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십바라밀다정진도(十波羅蜜多精進圖) 가운데 하나인 성중단월형(星中丹月形) 도상이 그것이다. 큰 원이 작은 원 셋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 이것은 십바라밀의 열 번 째 해당하는 ‘지(智)’를 상징한다. 이 도형에서 세 개의 작은 원은 불.법.승 삼보를 나타내고, 큰 원은 이들 삼보가 모두 하나로 통섭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 십바라밀다정진도 중에 두 개의 이중 원상 중심에 네모가 그려진 탁환이주형(卓環二周形) 도상이 있는데, 이것은 십바라밀 중 ‘역(力)’을 상징한다.

 

원상은 따지고 보면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이전에도 한반도의 고대인들이 고령 양전동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바위에 원상을 새겼으니 말이다. 고대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혼돈으로 보고, 그 혼돈으로부터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고 믿었다. 그들은 삼라만상이 분화.생성되기 이전의 카오스 상태, 즉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상태를 원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원상이지만 불교의 원상은 우주 만물이 분화 생성되기 이전의 혼돈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만법의 주체로 보고 마음을 관조하는 일이 곧 만유일체를 관찰하는 것과 통한다는 선(禪)의 종지(宗旨)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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