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악인물상
악기연주로 부처님 공양.찬탄
음악 관장하는 건달바의 화현
주악인물상은 장구.북.피리.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 또는 그림을 가리킨다. 불전에는 주로 천장에 그려지며 탑이나 부도에는 기단부에 부조로 장식되는 경우가 많다. 주악인물상에는 천인(天人)을 비롯해서 두광(頭光)을 갖춘 보살, 원정모(圓頂帽)를 쓴 화려한 복장의 풍물꾼, 범부(凡夫) 등 다양한 인물상들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악상은 안악3호분 등 고구려 고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부도, 고려의 능묘 벽화, 조선의 불전과 불탑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삼국~조선 후기 탑.부도.법당천당 등에 조성
단순한 장식 넘어 ‘완숙한 석조예술미’ 구현
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기쁜 감각을 음악이라 하고, 사람이 고.각.소.저.금.공후.비파.요.동발 등의 악기로 내는 소리는 묘음(妙音)과 같아서, 이것으로써 연주하고 노래하며 부처님을 공양.찬탄하면 불도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법화경〉 방편품). 사찰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주악상은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과 관련된 불교 신중 중에 건달바가 있다.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의 금강굴에 살며 제석천의 음악을 관장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중생을 즐겁게 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는 항상 나타나 정법(正法)을 찬탄하고 불교를 수호한다. 주악인물상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주악상의 주인공들은 건달바의 또 다른 화현(化現)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왕사성의 기사굴산에서 지내던 시기에, 천관(天冠) 보살이 부처님께 보살도에 관해 질문을 하고 있을 때, 긴나라왕이 찾아와 유리로 만든 거문고를 탔다. 이 거문고 소리에 가섭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이에 천관 보살은 “그대들은 4성제(聖諦)를 보고 8해탈을 얻었음에도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는가라고 힐책하고, 최고의 바르고 참된 보리의 마음인 무상(無上) 정진도심(正眞道心)을 일으켜 그러한 거문고 소리를 들어도 태연하고 움직이지 않는 불퇴전의 대승 보살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사미계에도 춤과 기악을 멀리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노래하고 춤추고 풍류 잡이 하지 말며, 가서 보고 듣지도 말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사미로서 수행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자비심을 기르고 성불의 원을 세우며, 중생 교화를 위하여 심신을 닦는 일인데, 만약 가무.기악에 빠지게 되면 마음이 산란하여 올바른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음악 공양에 대해, “모든 사람이 기악을 가지고 공양하면 미래세 이백 겁 안에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인(天上人) 가운데서 쾌락을 얻으리라”하였고, “노래 부르는 것은 옳지 않으나 두 가지 일에는 노래 소리를 할 수 있으니, 하나는 대덕(大德)의 덕을 찬탄하는 소리요, 또 하나는 삼계경(三啓經)을 읊조리는 소리”라고 했다. 가무와 기악은 유흥이 아니라 부처님을 공양하고 찬탄하기 위해 사용될 때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설파한 것이다.
현존 주악인물상 중에 수작(秀作)으로 꼽히는 것은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청동사리기의 주악인물상이다. 이 사리기는 감은사의 서쪽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리기 윗면 네 모서리에 앉아 비파.젓대.장구.제금을 연주하고 있는 주악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리가 곧 부처님의 분신이라고 한다면 이 네 사람의 악공은 부처님 가까이 앉아 기악을 항시 연주하면서 부처님을 공양.찬탄하고 있는 셈이다. 탑에 주악상을 장식한 대표적인 예로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의 주악상은 두광을 갖춘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초층 옥신석(屋身石) 네 면에 보살입상과 신장상 2구씩이 새겨져 있고, 그 위 이층 옥신 각 면에 주악상 2구씩이 양각되어 있다. 이층 옥신 각 면의 주악 인물은 공후.생황.비파.장구.배소.나각.젓대.피리 등을 연주하고 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주악상은 탑의 기단부에 부조되어 있는데, 천의와 박대(博帶) 표현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춤을 추거나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는 이 인물상의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의 완숙한 석조 예술미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들은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과 거의 비슷한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이 주악상 역시 불탑에 봉안된 부처님의 분신에 대한 공양과 찬탄의 표시로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 사리기나 백장암 삼층석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등의 주악상이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부도에 새겨진 주악상은 고승대덕(高僧大德)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의 주악인물상을 들 수 있다. 여덟 면으로 된 부도의 중대석 정면 1면에 탁상 연좌 위에 사리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보개.보주.영락 등으로 장식했다. 다른 일곱 면의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합장공양상과 비파.장구.젓대.제금.피리.긴피리.퉁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인물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작지만 표현이 섬세하고 유려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 하나의 걸작은 쌍봉사에 있다. 철감선사탑의 팔각 탑신 받침에 새겨진 주악인물상이 그것인데, 새날개가 달린 가릉빈가형 주악천인상이 눈길을 끈다. 규모는 작으나 최고의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이 주악인물상도 지증대사적조탑의 주악인물상처럼 비파.장구.젓대.제금.피리.긴피리.퉁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법당 천장에 그림으로 그려진 주악인물상 중 볼만 한 것으로 완주 송광사 대웅전, 제천 신륵사 대웅전, 청송 대전사 보광전 천장의 주악인물상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송광사 대웅전의 주악인물상은 본존불 앞쪽의 빗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이 20여 장면에 걸쳐 전개되어 있다. 천의(天衣)의 선명한 색채와 활달한 동세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환상적인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인물의 춤동작에 보이는 탈춤식 춤사위라든지, 깃털 꽂힌 무당 모자를 쓰고 젓대를 불고 있는 여인의 모습 등은 종전의 주악인물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화된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범패를 연주하듯 동발(銅)을 들고 있는 인물상의 허리춤에 호로병을 그려 놓은 모습 또한 한국 풍속화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요소이다.
제천 신륵사의 주악인물상도 송광사의 것과 마찬가지로 대웅전 내부 빗천장에 그려져 있다. 두 인물상이 대칭적인 구도 속에 배치되어 있는데, 화풍은 중국적인 냄새가 짙은 편이다. 머리에 쌍상투를 한 것이라든지, 발을 덮을 정도의 길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모습이 중국의 주악인물상의 것과 유사하다. 한편 청송 대전사 보광전 천장의 주악인물상은 이상 두 절의 것과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허공에 뜬 자세로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인물을 그렸는데, 주인공은 머리에 원정모(圓頂帽)를 쓴 남자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직업적인 풍물패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살펴 볼 것은 상주 신봉동에 있는 상주석각천인상으로 돌에 새겨진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왼쪽을 향해 몸을 튼 자세로 비파를 타고 있는 모습을 새겼는데, 화관을 쓴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연주하는 자태는 약간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표정이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의 표현은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어깨에 걸친 옷은 바람에 날리듯이 좌우로 구불거리며 흩날려서 매우 율동적이다. 아랫도리에는 주름이 져 있으며, 윗도리 속에서부터 늘어지는 끈이 좌우로 바람에 날리듯 표현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주악인물상의 주인공들은 천의를 입거나 날개를 가진 천인, 또는 일반적인 보살의 모습이나 범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인물들은 불전.사리기.범종.불탑.부도 등의 불교 유물.유적에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주인공으로 존재하고 있다. 악기의 종류는 중앙아시아나 중국과 다름없이 생황.공후.금.장구.제금.배금 및 소저류(簫笛類)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을 갖춘 주악인물상은 불교와 더불어 고려와 조선까지 계속 이어져서 조선시대에는 사천왕상이나 후기 불화에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주악인물상은 단순한 장식그림이나 조각으로서가 아니라 약동하는 몸짓과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느끼는 대상이 될 때 그 의미가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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