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함께한 백두대간
<남난희와 아들 기범의 마음읽기>
남난희, 그녀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1981년 한국등산학교 수료, 1984년 1월 1일 76일간 태백산맥 단독 종주와 그 기록을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 지음, 1986년 세계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 등정, 1989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 등반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온 데다 지난 2004년엔 경남 하동 청학동과 강원도 정선을 거쳐 지리산 화개골에 정착한 일련의 과정을 담은 산문집 <낮은 산이 낫다>를 펴냈기 때문. 게다가 몇 차례의 방송 출연으로 일반인에게까지 대중적 인지도를 넓혔다.
볕 좋은 지리산 남쪽 작은 마을에 터를 잡고 강원도의 질 좋은 콩, 지리산의 청정한 물, 맑은 공기로 메주를 쑤고 된장을 담그며 시골 아낙네로 살아가던 그이가 2009년 가을, 아들 기범과 함께 돌연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다. 당시 남난희는 소중한 일상과 행복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손발이 끊긴 사람처럼 움직임이 멈추었고, 무력증에 우울증까지 덤으로 얻은 지독한 시기였다. 마침 주능선 너머의 대안학교에 다니던 아들 기범도 학업을 포기하고 집에 와 있던 터였다. 출구가 필요했고, 쉰셋의 ‘철부지 여자 어른’과 열여섯의 ‘용감한 아들’은 57일간의 백두대간 종주에 발을 내딛는다. 그들에게 이번 산행은 지독한 중년앓이와 사춘기앓이를 일시에 치료해 줄 가장 좋은 처방전인 셈이었다.
하지만 1984년과 1990년에 이어 20년 만에 떠나는 장기산행이 쉬울 리는 없었다. 산행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들 기범에게는 태어나 처음 겪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 능선에서의 다급한 갈증, 배고픔과 추위, 크고 작은 부상들,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절대사랑의 대상이면서도 번번이 삐걱대는 의견…. 심지어 라면 끓이는 법이 달라 옥신각신 다투다 결국 둘 다 굶고 잠이 든다던가, 왜 삐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일들로 시큰둥하여 몇 시간씩 거리를 두고 따로 걷기도 했다.
다행히 흙을 밟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들 기범은 산에 익숙해져 간다. 지도를 가늠하며 가야 할 길을 능숙히 읽어내고, 일출과 일몰의 장엄한 광경 앞에서 감동하고, 무참히 파헤쳐진 자연 때문에 괴로워하며, 부드러운 산의 촉감에 온몸을 맡길 줄도 안다. 아들은 엄마의 젊은 시절 산(山)이야기와 사랑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최신 노래를 흥얼댄다. 돌진해 오는 거대한 멧돼지 무리나 뱀 앞에선 서로를 보호하고, 가슴속에 꽁꽁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두 가슴앓이 환자의 웃음소리는 서서히 또 수시로 산 능선을 넘나든다. ‘국내 1세대 여성 산악인’이자 ‘백두대간 전도사’ 남난희는 그렇게 다시 지리산 품으로 돌아와 끊어졌던 일상을 잇고 있다.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 기범은 삶의 공부를 위해 네팔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이다.
<사랑해서 함께 한 백두대간>은 ‘산이 선택한 여자’ 남난희가 그 나날들의 여정과 감흥을 적어 내려간 책이다. 그러나 산행 첫날부터 마지막까지의 상세 기록을 담은 여타의 백두대간 종주기와는 다르다. 구간별 거리, 소요시간, 샘터와 캠프 사이트 위치 등이 절실한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서로 알아가기’, ‘세월에 장사 없다’, ‘내 사랑 설악산’ 등 총 15개의 주제로 나뉜 이 책은 남난희와 아들 기범의 마음읽기 책이다. 드문드문 26년 전과 20년 전의 대간 종주 산행도 술회하고 있어 책을 펴든 독자들의 추억을 마구 헤집어 놓기도 한다.
그때 그 시절, 일주일치 술을 하룻밤에 몽땅 마셔대던 일, 다 끓인 국을 뒤엎고 대역죄인이 되었던 일, 흙이 자글대던 눈 녹인 물 또는 이름 모를 벌레가 들어 있던 물을 달게 마셨던 일, 바람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웅크린 채 잠들었던 산속의 외로운 야영, 산짐승과 맞닥뜨려 오금 저렸던 일 등등…. 그것이 과거가 되었든 현재가 되었든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니 책을 덮고도 한참동안은 마치 내가 백두대간의 능선 어디쯤 서 있는 듯한 착각에 흐뭇하다.
얼마 전 한 매체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100%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만) 한국의 엄마들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상대방의 손익에 의해 만족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 성향이 강하고 이는 다시 자녀들의 학습 부담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 그런 면에서 <사랑해서 함께 한 백두대간>은 끊임없는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 세대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책이다. 사랑하지만 소통은 불가능한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에겐 더더욱 간절한 책, 무엇보다 빠듯한 일상과 매연 속에서 시름하는 산꾼들에게 이 땅의 중심 산줄기, 백두대간의 청명한 기운을 흠뻑 선사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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