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때 진존숙이라는 스님은 도인으로 명성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절에서 살지 않았다.
큰절에 있으면 엄청난 예우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작업복 같은 허름한 승복을 입고 짚신을 삼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여분의 짚신은 대문 앞에다가 걸어놓고 오가는 길손들에게 그냥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접을 받는 것 자체가 빚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이미 절강성 용흥사라는 사찰에서 일천여 명을 대중을 거느리고 호령하면서 살았던 화려함이 있었다. 그 때도 숨어서 짚신을 삼아 대중들에게 몰래 나누어 주던 전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모든 걸 버리고 숨어 삶녀서 모든것을 사양하고 스스로의 노동력으로 한 입의 풀칠만 마치고 나면 나머지 짚신은 남들에게 그냥 주었다. 그대로 적선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남들은 그를 '짚신스님'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감추어도 사향의 향기는 퍼지기 마련이고 호주머니의 송곳은 삐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도인이라고 공부를 배우려 오는 후배 승려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문앞에서 쫓아버렸다. 대중을 또 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루는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면서 기어코 대문을 밀고 들어오려는 녀석이 있었따. 몇 번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막무가내였다. 얼마나 귀찮게 하던지 올 때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하루는 대문 안으로 발이 들어온줄도 모르고 문을 얼마나 세게 닫아 버렸는지 그 승려의 발목이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정성에 감동하여(또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수업료로 '발목 부러짐'을 받았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접 받는 것을 빚이라고 생각하고 받지 않는 것도 그 이상의 경제적인 행위인 것이다. 짚신을 삼으면서 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 삼매에 몰입하는 것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문화의 가치창출인 것이다.
짚신을 만드는 행위가 단순한 호구지책이 아니라 수행을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또 짚신의 효용을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남는 짚신은 사회에 환원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 수업료를 돈이나 노동력으로 받지 않았다. 공부하려는 마음 자세가 얼마나 간절한가에 그 기준을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역시 그 간절함이 너무 큰 가닭에 발목이 부러져도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그저 제자로 받아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와 가치를 창출하면서 또 그런 것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사찰을 가꾸고 또 지키고 후학을 공부시키면서 절집안을 이천오백년 동안 경영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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