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祥瑞와 깨달음의 상징 사찰 꽃살문
우화서雨花瑞, 깨달음, 그리고 공양의 꽃
“귀에 들리는 것은 다 부처님의 음성이요一切聲是佛聲,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부처님의 상호다一切色是佛色.”라고 불교는 말하고 있으니, 눈앞에 전개된 꽃살문은 곧 화엄 세계의 모습이고, 문살에 새겨진 꽃들은 하나하나가 부처님의 상相일 수가 있다.
2,5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을 다 설한 후 가부좌를 틀고 무량 삼매三昧에 드니 몸과 마음이 고요하였다. 이 때 하늘이 만다라꽃과 마하만다라꽃과 만수사꽃과 마하만수사꽃을 비 오듯이 쏟아 내려 부처님과 모든 대중 위에 흩뿌렸다. 또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여러 범천들이 갖가지 하늘 꽃을 비처럼 내리니 1백 유순이나 쌓였다. 향기로운 바람이 또 불어와서 시든 꽃은 날려 버리고 다시 새로운 꽃을 뿌렸다.
이런 일들이 끝이 없었으니 10소겁 동안 부처님께 공양하고 또 멸도滅度할 때까지 항상 이 꽃비가 내렸다.
이것은 《묘법연화경》 <서품>과 <화성유품>에 나오는 얘기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설법을 마치고 삼매에 들었을 때나 깨우침을 얻었을 때 하늘이 축복의 꽃비를 내린 것을 경에서는 ‘우화서雨花瑞, 즉 ‘꽃비의 상서’라고 말한다. 이에 연유해서 꽃을 불교에서는 상서의 상징물로 애호하였다.
꽃은 개화 한 후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때문에 수행자들은 흔히 꽃이 피는 것을 해탈 성취를 위한 정진精進에 비유한다.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행과 자비의 실천 등 만 가지의 실행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수행자는 열매를 맺기 전에 먼저 피어나는 꽃의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화사覺華寺라는 절 이름이 말해 주듯이 꽃은 그 자체가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종경록≫에서도 “맑은 선정禪定의 물이 항상 깨달음의 꽃을 피운다.” 라고 하였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여섯 가지 공양물이 있다. 향香·화花·등燈·다茶·과果·미米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꽃은 향, 등과 더불어 정신적 공양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불자들은 향을 법신, 꽃을 보신, 등을 화신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꽃살문에 새겨진 수많은 꽃들은 그 하나하나가 법신의 상相이기도 하고, 부처님을 향한 뭇 중생들의 환희와 숭앙심의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건축 장식 미술 꽃살문
꽃살문의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문살 자체를 꽃모양으로 조각하여 짜 맞춘 것, 따로 조각한 꽃모양을 빗살이나 솟을빗살의 교차점마다 붙인 것, 그리고 꽃문양을 판자에 투각하여 문살 위에 붙인 것 등이 있다. 꽃의 종류는 연꽃, 모란, 국화, 주화朱花가 주종이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관념적인 꽃들도 적지 않다. 꽃잎은 6장인 것이 대부분이며, 4장 또는 해바라기, 백일홍 같이 많은 꽃잎을 가진 것도 있다.
이밖에 화병에 꽃을 꽂아 놓은 모습을 묘사한 것, 민화처럼 연 밭 정경을 주제로 삼은 것, 그리고 사군자, 모란, 포도와 같은 길상 식물을 표현한 것 등이 있다. 한옥에 흔히 쓰이는 띠살문, 격자문, 완자살문 등을 짤 때는 문살의 짜임새와 공간 비례, 그리고 문으로서의 기능성을 중요시한다. 이와 달리 사찰의 꽃살문은 장식 효과와 상징성에 더 큰 무게가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꽃살문은 출입·개폐라는 문의 일반 기능을 뛰어넘은 새 차원의 문이자 건축 장식 미술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을 모신 법당은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향해 법을 설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비교된다. 그래서 법당 꽃살문에 새겨진 꽃들은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내린 꽃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꽃살문이 여러 사찰에 유존하는데, 그 중 양산 통도사 대웅전(적멸보궁) 꽃살문, 논산 쌍계사 대웅전 꽃살문 등이 유명하다. 통도사 대웅전 동편 꽃살문은 격자살과 빗살이 교차하는 부분마다 꽃을 장식한 문이다. 꽃은 국화, 연꽃, 모란의 세 종류가 있는데, 중앙에 국화꽃을 수직 일렬로 배치하고 그 양쪽에 연꽃과 모란을 각각 배치했다. 그리고 국화꽃을 사방에 둘러 모든 꽃들을 둘러싸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그 아래 쪽 궁창에 투각된 연화당초문은 기운과 생동이 감지되는 수작이다. 통도사 대웅전 꽃살문은 그 모양이 아름답고 조각 솜씨가 정교하여 문이라기보다 수준 높은 목공예 작품을 보는 듯하다. 논산 쌍계사 대웅전 꽃살문 역시 꽃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어칸의 문은 솟을빗살문이고, 그 양쪽의 문은 빗살문인데, 솟을빗살문에는 주화를 닮은 꽃이 조각돼 있고, 빗살문에는 국화꽃을 비롯해서 파련화(꽃잎의 끝이 말린 모양의 연꽃), 모란꽃 등 여러 가지 꽃이 장식되어 있다. 꽃 모양이 다양하고 색깔이 화려한데도 정숙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단정한 조각 솜씨와 빈틈없는 문살 짜임 때문일 것이다.
꽃살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이다.
법당 전면에 모두 8개의 꽃살문이 달려 있는데, 채색은 벗겨졌지만 조각 솜씨가 하나 같이 뛰어나다. 이들 문 가운데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왼쪽에서 3번째 문과 6번째 문이다. 아래쪽에 10여 개의 꽃봉오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 활짝 핀 꽃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구도는 일반적인 꽃살문에서 볼 수 없다. 수행 정진하여 불성을 깨우치고 해탈에 이르는 단계를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으로 상징화한 드문 예에 속한다.
꽃살문에 투영된 한국적 미의식
꽃살문 중에는 꽃을 화병에 꽂아 놓은 모습을 통째로 투각하여 문살 위에 붙인 형식이 있다.
강화 정수사 대웅보전 꽃살문, 공주 동학사 대웅전 꽃살문, 영주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 서울 조계사 대웅전 꽃살문이 이에 해당한다.
먼저 정수사 대웅보전의 꽃살문을 보면, 붉은색, 군청색, 황색, 흰색의 꽃을 화병에 꽂아 놓은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이 불단에 올리는 공양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최근 다시 단청을 올릴 때 고졸미가 많이 훼손됐지만 순정미는 아직도 소박한 조각기법 속에 살아 있다. 동학사 대웅전 꽃살문 역시 투각기법으로 치장한 문이다.
정수사의 꽃살문양이 도식적이라면, 동학사의 것은 회화적이다.
대웅전 전면 10짝의 문에 모두 화초 투각 장식이 베풀어져 있다. 어칸의 두 문짝에 매화, 그 양쪽에 난초, 그리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세 짝 문에 각각 송학, 대나무 국화가 투각되어 있다. 이것은 법당을 상서의 기운이 충만한 공간으로 조성함과 아울러 불단의 부처님을 장엄하려는 종교적 열정과 기원의 소산이다.
성혈사 나한전은 전면 3칸으로 되어 있는데, 어칸의 두 문짝에 연꽃, 승려, 새, 개구리, 물고기 등이 투각된 장식판이 빗살 위에 부착되어 있다. 중앙 두 문짝의 문양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의 본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동화의 세계를 그린 한 폭의 민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답고 정겨운 꽃살문이다.
부처님 자리를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미려는 불자들의 신앙심은 근대에 창건된 조계사 대웅전 외벽에도 드러나 있다. 건물 정면과 양 측면에 원색의 꽃살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모두 투각 기법을 사용하였다. 종래의 꽃살문에서 볼 수 없었던 사슴이나 천마, 공작새, 금계 같은 상서롭고 장식성 강한 동물과 장수, 신장, 신선 등의 인물이 꽃과 함께 등장한다. 근대에 조성된 다소 이색적인 꽃살문이기는 하나 한국 공예미술 특유의 미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 외에도 전국의 전통 사찰에는 아름답고 정겨운 꽃살문들이 꽃살문의 꽃만큼 많이 남아 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제아무리 파랗다 해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을 햇살아래 고추가 제아무리 빨갛다 해도 눈부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살문에 칠해진 붉고 푸른 진채眞彩가 아무리 화려 현란하다 해도 천하거나 야하게 보이지 않고, 도색이 아무리 진하고 두껍다 해도 기름지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한반도라는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길러진 모나지 않고 밝은 한국적 심성과 자연주의적 미의식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꽃살문은 결국 부처님을 향한 종교적 열정과 신앙심, 그리고 한국적 미의식이 함께 이루어 낸 아름답고 차원 높은 건축 장식 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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