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금빛 찬란한 서울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수국사는 금으로 꾸민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로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연등의 물결이 몰아치는 수국사 경내
태화산 자락에 둥지를 튼 수국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다.
많은 절들은 그곳을 대표하는 오래된 문화유산을 내세우거나 상징물을 만들어 절을 속세에 널리 홍보하고자 애를 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黃金寺院)임을 자처하면서 여타 절과 크게 차별화를 두었다. 즉 금을 이용하여 절을 속세에 알리는 것이다.
이토록 속인(俗人)들이 좋아하는 금으로 법당을 치장한 유래가 없는 절이건만 아직까진 은평구에서만 조금 알 정도로 인지도가 많이 빈약한 형편이다. 황금절, 황금사원으로도 불리는 수국사는 태화산에 있지만 산세가 미약하고 명성이 낮아서 거리가 다소 떨어진 북한산(삼각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다.
이 절은 1459년(세조 4년) 세조(世祖)가 그의 맞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20세의 사망)의 명복을 위해 세자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고 한다.
1471년(성종 2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가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며 판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丹靑)이 특히 아름다워 광릉(光陵)의 원찰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4월 초파일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바로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면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지원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0년(1504년)에는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은 즉시 경기감사와 형조참판 등을 불러 불을 낸 이를 국문케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1930년에 세워진 수국사 사적비(事蹟碑)
기록에는 없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묻힌 명릉(明陵)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그 이후 지원이 끊기면서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며 속세의 뇌리 속에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러던 그곳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구파발 부근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 들렸다. 그는 대웅전 구석에 있던 아미타불(현재 수국사 대웅전 안에 있음) 앞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에 의문을 품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진관사 승려는 대수롭지 않는 듯,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에 모신 겁니다. 우리 불상도 아니니 차나 향을 공
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며 불상 앞에 예불을 올려 수국사를 중창하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광무 3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를 기원해 달라고 했다.
이에 월초가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안 나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원을 물으니 머리를 조아리며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러자 황제가 물러나지 않고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5릉 부근에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하옵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이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케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하고 1907년 황실에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했으며 진관사에서 굴욕의 시간을 보낸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1908년 4월 초파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화와 금강번(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백을 지원했다.
이후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내걸며 열심히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승리여래불이라고도 하며 대웅전에 있다고 함>, 여름에만 있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손짓한다.
비록 고색(古色)의 내음은 녹슬었고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도 조금은 떨어진다. 또한 요즘 많은 절집들이 너도나도 외형을 지나치게 신경쓰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상당한 편인데 수국사는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금으로 법당을 꾸몄으니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는 않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문화센터 등 4~5동에 건물이 있으나 대웅전을 빼면 거의 볼품이 없다.
허나 금빛이 서린 대웅전의 규모가 실로 거대하여 그 초라함을 능히 커버해준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으며 1907년에 월초가 강재희(姜在喜)의 시주로 황제폐하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전하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전하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전하 엄씨 보수제년(寶壽齊年), 의친왕전하 보수무강(寶壽無疆), 의친왕비전하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전하 보소여해(寶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된 그림 6점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이들은 현재 관람이 어렵다.
* 아미타후불화(阿彌陀後佛畵)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 괘불(掛佛) - 1907년에 제작, 대웅전에 보관 중
경내를 살펴보도록 하자
▲ 용왕상(龍王像)의 보금자리인 연못
분수가 나른한 오후를 시원하게 깨워준다.
※ 수국사 찾아가기 (2010년 7월 기준)
수국사(守國寺)는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절이다.
서오릉에서 서울과 경기도 경계를 넘어 서울쪽으로 조금 내려와 오른쪽 안내판을 따라 1분 남짓만 걸으면 된다.
6호선 구산역에서 가깝다.
* 서울역(1,4호선 3번 출구)에서 702번(숭례문 중앙차로 정류장), 9701번 좌석버스(숭례문 가변 정류장)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서울역 9-1번 출구)에서 702번을 타고 선정중고 하차
* 5호선 서대문역(3번 출구), 3호선 녹번역(5번 출구)에서 702번, 9701번 이용
* 선정중고 정류장에서 타고 온 버스가 가는 방향(서5릉, 고양시)으로 조금만 가면 길 건너편에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정류장에서 절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 지하철 6호선 구산역(3,4번 출구)에서 서5릉 방향으로 도보 20분
* 서울시내에서 751번(구산동~숭실대), 752번(구산동~상도동), 7022번(구산동~서울역), 7720번(구산동~신촌)을 타고 구산동 종점 하차, 서5릉 방향으로 4분 정도 걸으면 선정중고 정류장과 수국사 이정표가 나온다.
★ 수국사 관람정보
* 승용차로 경내까지 진입이 가능하나, 주차공간이 그리 넓지 못하다.
* 범종각에 매달린 커다란 목탁에 이곳의 길조(吉鳥)로 일컬어지는 목탁새가 산다. 보통 여름에 머문다고 한다. (1년 내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314 (☎ 02-356-2001)
수국사의 백미, 아시아 최대의 황금불당이자 금 내음이 철철 흐르는 대웅전(大雄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수국사의 법당인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단 위쪽에 높다랗게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다.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이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純金)으로 입혀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이곳을 황금사원, 황금절이라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대웅전 때문이다.
허나 금빛에 가려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의 훼손이 없게끔 경비도 철저하다.
수국사에서 막대한 재정을 들여 애지중지 공을 들인 이곳의 상징이자 얼굴로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사람들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금으로 발려진 기둥과 벽, 천정을 정신없이 떠 있는 밝은 색채의 연등은 중생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너무 화사한 나머지 햇빛 조차도 고개를 숙일 지경이며, 그 황홀한 빛에 눈이 갑자기 머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일어난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거대한 금동불이 중생의 하례를 받는다. 그 사이로 작은 불상 4개를 배치하여 빈 공간을 채웠다.
큰 불상은 가운데에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노사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이 자리한다. 이들은 앉은 키가 2.1m에 이르며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들 사이로 조그만 불상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아미타불로 이들 불상에서 크게 주목해야 될 것은 유리 안에 특별히 봉안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유리 안에 봉안된 불상이 목조아미타불좌상) - 보물 1580호
유리 안에 안치된 조그만 목조아미타불은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그래서 특별히 유리막을 두어 그 안에 봉안했다. 철창에 갇힌 새처럼 갑갑해 보이긴 하지만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 그의 건강과 신변보호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듯 하다.
이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것으로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가 104cm, 무릎의 폭이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다고 하며, 수국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절이 망하면서 인근 진관사로 옮겨져 그곳 대웅전에 두었다고 한다.
허나 다른 절에서 온 불상이란 이유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쳐박혀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본 월초거연이 화가 난 나머지 그에게 예불을 올리며 절의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 황태자(순종)의 병을 고친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 황제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아미타불을 다시 모셔왔다. 그 당시의 뼈저린 추억 때문인지 약간 어둡기는 하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한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이들 초전법륜상은 오비구상이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된 것이라 하며, 설법 장면을 인자한 모습의 관음보살이 묵묵히 바라본다.
* 수국사에서 치악산 구룡사를 다녀가신 인연으로 자료를 찾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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