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찾아 가는 길

고성 금강산 건봉사 - 조선시대 전국 4대 사찰

難勝 2011. 11. 23. 05:31

 

고성 건봉사는 휴전선 부근 금강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전국 4대 사찰의 하나로 세자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로 지정한 사찰이었다.

건봉사(乾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 말사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번지

문화재 자료H 제51호 (강원) (지정일 : 1982-11-03)

 

 

• 건봉사 소개

 

건봉사(乾鳳寺)는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번지 금강산(金剛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다.

 

인제와 원통을 지나 46번 국도로 설악산 백담계곡 입구를 지나가서 진부령을 넘으면 간성에 닿기 1㎞ 전에 교동리가 나오고, 여기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안내판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건봉사가 있는 해상리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에서 건봉사까지는 8.5㎞다. 해상리에서 군부대와 사격장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 길은 탑평리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가파른 언덕을 내려서게 된다. 언덕길 아래 검문소가 있고 그 앞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건봉사 경내로 접어드는 길이다.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면 간성 읍을 지나 건봉사로 들어올 수도 있다.

간성읍에서 다니는 버스는 해상리 마을입구에서 선다.

사찰에서 법회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부정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하므로 미리 물어보고 이용하면 편하다.

 

민족의 영산인 금강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끝자락을 이룬 곳에 있는 건봉사는 휴전선이 국토를 나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로 꼽혔고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던 곳이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고, 그 터조차 이른바 민통선 안에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었다. 그러나 다행히 1992년 여름부터 이곳의 출입이 가능해져서 지금은 누구나 언제든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 건봉사 창건

 

건봉사는 520년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에 아도(阿道) 스님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당시 이름은 원각사(圓覺寺)였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553년에 부속암자로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지었다.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徴) 화상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스님 등과 함께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개설한 다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맺어진 이 염불만일회는 '삼국유사'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당시 31인의 승려와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신도 중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담당하여 염불승에게 베풀었다. 특히 의복을 맡은 신도는 매년 포(布) 한 단씩을, 음식을 맡은 신도는 매년 백미(白米) 한 말과 깨끗한 기름 한 되씩을 헌납하였다는 기록이 「건봉사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시물(施物) 및 공양풍습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1만일을 채운 757년(원성왕 3)에는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염불승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많은 신도들이 차례로 극락왕생하였다고 한다.

810년(헌덕왕 2)에는 당나라의 현수(賢首) 스님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한 승전(勝詮) 스님이 '화엄경'을 강설함에 따라, 이 절은 염불종(念佛宗)의 본찰인 동시에 화엄종찰(華嚴宗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845년(문성왕 7)에는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의 건봉사

 

고려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숭앙하며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지만, 고려시대의 건봉사 역사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사적기에 의하면, 937년(태조 20)에 도선(道詵) 국사가 태조의 명을 받아 중수하고,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西鳳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선 국사의 입적이 898년이므로, 연대의 착오가 있거나 왕명을 받은 도선의 문인이 중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945년(혜종 2)에는 봉암암(鳳巖庵)․청련암(靑連庵)․극락암(極樂庵)을, 1161년(의종 15)에는 보리암(菩提庵)․적명암(寂明庵)․대성암(大聖庵)을 산내암자로 창건하였다.

1358년(공민왕 7) 10여 년 동안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나옹(懶翁) 스님은 이 절을 중수하고 건봉사로 바꾸었으며, 이듬해에는 백련암(白蓮庵)․보문암(菩門庵)․상원암(上院庵)․대원암(大願庵)을 새로 지었다. 이로써 건봉사는 염불과 화엄과 선(禪)의 수행을 함께 갖춘 사찰이 된 것이다.

 

 

• 조선시대 전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계가 크게 위축되었던 조선 시대에도 건봉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호불왕(護佛王)을 불리는 세조로부터 비롯된다. 1465년(세조 11) 이 절에 행차한 세조는 건봉사를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어실각(御室閣)을 지을 것을 명함과 동시에 친필 동참문(同參文)을 써 주었으며, 전답도 하사하였다. 어실각이 생김에 따라 건봉사는 조선 말까지 어떤 권력자나 유생들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는 수행처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종은 즉위와 동시에 교지(敎旨)를 내려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건봉사 승려들에게는 당시 승려에게 부과했던 강제노동을 면제시켜 주었다. 또한 성종은 즉위년인 1470년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미역밭․소금밭을 하사하고, 사방 10리를 건봉사 소유의 산으로 정하였다.

1523년(중종 18)에는 보림(菩琳) 스님이 건봉사와 보림암을 중수하였고, 1552년(명종 7) 에는 왕이 교지를 내려 나락 10석(石)을 생산할 수 있는 논을 하사하였다. 

 

 

• 조선시대 중기

 

1594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건봉사는 다시 피폐하였고, 여러 건물들은 많이 퇴락되었다. 이에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㦤仁王后)는 1602년 세금 5결(結)을 면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건봉사에는 불교 최고의 성보(聖寶)가 봉안되었다. 1605년 사명(四溟) 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온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舍利)를 모신 것이다. 이 치아와 사리는 신라의 자장(慈藏) 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온 것으로 양산 통도사에 봉안하였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병이 훔쳐간 것이었다. 불치아와 사리 봉안을 계기로 삼아 이듬해에는 사명 대사와 혜능(惠能) 스님이 피폐된 절을 중건하였고, 40여 년이 지난 1650년(효종 1)에는 효종이 교지를 내려 원당으로 정하고 어실각을 중건하였다.

1652년(효종 3) 계월당(桂月堂)이 화재로 소실되자 상미(尙眉) 스님 등이 2년만에 중건하였고, 1673년(현종 14)에는 수흡(修洽)과 도율(道律) 스님이 화주가 되어 1,200근의 범종을 만들었다.

1683년(숙종 9)에는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불장(佛帳)․가사와 함께 1,000금을 사주하여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1712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많은 건물들이 있었던 수북팔방(水北八房)이 불탔으나 즉시 중건하였다.

1724년(경종 4) 주지 채보(彩寶) 스님은 구층탑을 세워 불치아를 봉안하였고, 이를 기뻐한 명성왕후는 1천금을 시주하였으며, 1726년(영조 2) 석가치상탑비(釋迦齒相搭碑)를 건립하였다. 그 뒤 영조․정조 때의 주요 서적을 요약하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 18세기와 19세기 건봉사의 역사

   

- 1726년(영조 2) 백련암을 훼철하고 청련당을 세움 

- 1735년(영조 11) 송월료(送月寮) 중수 

- 1742년(영조 18) 해운(海運) 스님 봉암암 중건 

- 1745년(영조 21) 홍교(虹橋) 붕괴, 2년만에 중건 

- 1753년(영조 29) 처사 지해(智海)와 여신도 지혜(智慧)가 시왕상 중수 

- 1754년(영조 30)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이상궁과 안상궁을 보내어 석가여래상을 조성하고 팔상전을 건립하여 원당으로 정함. 영조는 8월에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을 내려 어실각에 봉안토록 함 

- 1756년(영조 32) 계월당이 불탐. 이듬해 화곡(華谷)스님이 중건 

- 1765년(영조 41) 현붕(玄鵬) 스님이 육송정(六松亭)과 백운교(白雲橋)를 중건, 비를 세움 

- 1776년(영조 52)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의 계비)가 영조의 국재(國齋)를 행함 

- 1788년(정조 12) 군수 이최원(李最源)의 노력으로 조공(朝貢)을 면제받음 

- 1796년(정조 20) 강원도 순찰사 서유방(徐有坊)이 시주하여 어실각을 중수 

- 1799년(정조 23) 강원도 순찰사 남공철(南公轍)의 발기로 사명선사가적비를 세움 

- 1800년(정조 24) 용허(聳虛)와 석민(碩旻) 스님 등이 사명대사의 수충각(酬忠閣)과 비각(碑閣), 어중루(御重樓)를 창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후 200년 동안의 건봉사는 왕실과 지방관료들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 조선시대 후기의 건봉사

 

순조 대에 신라의 발징 스님이 열었던 염불만일회를 다시 개설하여 새로운 건봉사의 면모를 보였다.

건봉사의 역사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다. 1802년(순조 2) 용허 스님은 건봉사의 옛 전통을 이어받아 제2회 만일회를 설치한 것이다. 이 염불만일회는 1834년 순조가 죽은 해까지 계속되었다.

 

이 무렵에도 왕실과 지방관료의 지원은 끊이지 않았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는 1804년 1,000금과 함께 오동향로․오동화병․양산 등을 시주하여 왕의 수복(壽福)을 빌었으며, 1805년에는 국재(國齋)를 개설하고 금자병풍과 '화엄경' 1부를 시주하였다. 그리고 귀빈임씨(貴嬪林氏)는 1818년 등롱(燈籠)과 일산(日傘), 영기(令旗) 등을 기증하였으며, 효의왕후(孝懿王后)는 1820년 어실각에 놓을 평상(平床)을 시주하였다.

 

또한 1815년에는 군수 이해로(李海魯)가 건봉사가 갚아야 할 대하전(貸下錢) 500민(緡)을 탕감해주는 한편 족징(族徴)의 폐해를 없애고, 공납품 중 후지(厚紙) 6권을 감하였으며, 환속승에 대해서는 빈부에 따라 징집을 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822년에는 군수 김용(金鎔)이 공납품 중 후지 3권과 백지(白紙) 7권, 잡지(雜紙) 30여 권, 농골(籠骨) 4태(駄)를 경감시켜 주었고, 1826년에는 군수 송재의(宋在誼)가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건봉사에 대한 왕실과 지방관료의 특혜를 기록한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 당시 사찰에 부과한 잡역과 공출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건봉사의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왕실과 관료의 시주를 소상히 밝힌 까닭도 이 절이 왕실의 보호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찰임을 나타내어 관료나 유생들의 폐해 및 박해를 물리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실로 억불의 시대적인 상황이 사지(寺誌) 속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 두 차례의 화재와 중건

 

임진왜란 이후의 250여 년, 지속적인 중건과 중수로 건봉사는 4개 권역을 거느린 대규모 가람을 이루어 수행과 기도도량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1846년과 1878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큰 화재로 사찰 내의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후 6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새로운 모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중건불사의 세부적인 상황을 사적기를 통해 살펴본다.

   

 

• 조선시대 후기 건봉사에 발생한 화재와 중주 및 중건 내역

 

- 1846년(현종 12) 대웅전 지역의 전각과 요사채 21동이 모두 불탐 

- 1847년(현종 13) 선악(仙岳) 스님이 모연하여 중창을 시작하자, 나라에서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기증하고, 강원도의 승군으로 하여금 5일 동안 부역하게 함 

- 1849년(현종 15) 현종이 서거하자 순원왕후가 금품과 각종 집기를 하사, 동화(東化) 스님으로 하여금 추모기도를 드리게 함

- 1851년(철종 2) 벽오 유총(碧梧侑聰) 스님이 제3회 만일회를 개설 

- 1858년(철종 9) 축성암(祝聖庵) 불탐 

- 1859년(철종 10) 석담(石潭)과 몽허(夢虛) 스님이 축성암 중건 

- 1863년(철종 14) 철종의 서거로 제3회 염불만일회를 회향함 

- 1865년(고종 2) 화은(華隱) 스님을 청하여 강원(講院)을 개설 

- 1867년(고종 4) 신도 김극락화(金極樂華)가 불향답(佛香畓) 10두락을 헌납 

- 1873년(고종 15) 4월 3일 산불로 사암 3,183칸이 모두 불탐

 

 

여러 차례의 화재 중에서도 1873년에 일어난 화재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불 속에서 구출할 수 있었던 유물도 팔상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 어제절함도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또한 학림(鶴林) 스님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불길 속에 뛰어든 덕분이었다.

 

잿더미가 된 건봉사를 위하여 군수 이주옥(李周鈺)은 관아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서 관리들로 하여금 절에 운반하여 승려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고, 건봉사 주변 다섯 면(面)의 사람들로부터 개초(蓋草)를 징발하여 임시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한 나라에서는 공명첩 500장과 팔도권선문(八道勸善文)을 내려 중건을 돕도록 하였다.

 

특히 건봉사 승려들의 중건 노력은 지대하였다.

그들은 중건 불사의 촉진을 위하여 5규정소(五糾正所)인 개운사(開運寺)․중흥사(重興寺)․봉은사(奉恩寺)․봉선사(奉先寺)․용주사(龍珠寺)로부터 통유(通諭)를 발급받았으며, 서울 동대문 바깥에 있는 미타사(彌陀寺)에 모여서 팔도의 화주를 정하고 그 즉시 전국을 다니며 중창시주금을 마련하였다. 당시의 도화주(都化主) 겸 서울의 화주는 벽오 스님이 맡았으며, 경기도는 범운(梵雲) 스님, 충청도는 월산(越山) 스님, 전라도는 한은(漢隱) 스님, 경상도는 용호(龍湖) 스님, 평안도는 보운(寶雲) 스님, 황해도는 하은(荷隱) 스님, 함경도는 완명(翫溟) 스님, 강원도는 율암(栗菴)과 석담(石潭) 스님이 각각 화주를 맡았다.

 

그 결과 이 해에 관음전과 만일회 건물을 중건하였고, 이듬해에는 대웅전․어실각․사성전(四聖殿)․명부전․범종각․향로전(香爐殿)․보안원(普眼院)․낙서암(樂西庵)․백화암(白華庵)․청련암(靑蓮庵)을 중건하였다. 이에 왕실과 각 궁에서는 갖가지 불교용품을 기증하였으며, 대왕대비 조씨(趙氏)는 만전(萬錢)을 하사하여 이들 전각의 단청과 후불탱화의 조성을 도왔다. 그리고 고종(高宗) 임금은 이 절에 원당(願堂)을 정하고 교지를 내려 일체 요역(徭役)을 면제시켜 주었다.

 

1880년(고종 17)에는 무너진 능파교(凌波橋)의 석재를 이용하여 대웅전 돌계단과 산영루(山映樓)를 세우는 데 이용하였고, 벽오 스님은 덕원 무달사(武達寺)로부터 시왕상(十王像)을, 보운 스님은 영변 서운사(棲雲寺)로부터 금고(金庫) 1좌를 옮겨오고, 장단 심복사(心腹寺)로부터 16나한상을 옮겨왔다. 그리고 대왕대비 조씨가 완화군(完和君)의 영가를 위하여 시주한 1,000금으로 시왕불사(十王佛事)를 이룩하였다.

 

이와 같이 기본적인 중건을 마친 건봉사는 이듬해인 1881년 만화 관준(萬化寬㑓) 스님을 회주로 모시고 제4회 염불만일회를 개설하여 신행요람처로서의 기능을 재개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다음과 같은 중건불사가 계속되었다.

   

 

• 19세기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의 건봉사 역사 

 

- 1881년(고종 18) 사미 봉직(奉直)의 극락암 중건, 시왕전과 16나한전 단청 및 16나한도 조성 

- 1882년(고종 19) 신상궁(申尙宮)이 예수재를 개설하기 위해 낸 400금과 동생 신장연(申長蓮)이 시주한 1600금으로 불구(佛具)를 조성 

- 1885년(고종 22) 운파(雲坡) 스님의 모연금으로 대웅전,관음전,명부전,사상전의 문을 개조함

- 1886년(고종 23) 명례궁(明禮宮)의 토지를 매입함 

- 1890년(고종 27) 인파(仁坡)와 만화 스님 등이 팔상전,진영각,노전, 극락전을 중건

- 1891년(고종 28) 대왕대비 조씨의 소상재(小祥齋)를 지냄. 범운(梵雲) 스님이 부처님의 치아를 천안 광덕사(廣德寺) 승려로부터 얻어 팔상전에 봉안 

- 1893년(고종 30) 경월(鏡月) 스님이 독성강을 중건, 서봉(西峯) 스님이 단청 

- 1894년(고종 31) 만화 스님이 참선실을 창건함 

- 1897년(광무 1) 명성왕후 민씨(閔氏)의 대상제를 지냄 

- 1899년(광무 3) 응호(應湖) 스님이 봉서루를 중건하고 대웅전 불상을 개금함 

- 1901년(광무 5) 극락전의 남별당(南別堂)을 건립. 만화 스님이 모연금으로 논 10두락을 매입하여 보안원(普眼院)에 기부함 

- 1903년(광무 7) 큰 방의 후불도 조성

- 1904년(광무 8) 회명(晦明) 스님이 논 40두락을 헌납 

- 1905년(광무 9)명부전의 지붕을 갈고 단청하였으며, 노전을 세움. 순종의 비인 순명왕후(純明王后) 소상재를 지냄. 낙서암의 고방(庫房) 16칸을 새로 지음. 몽산(夢山) 스님이 논 80두락을 헌납 

- 1906년(광무 10) 사적비 및 석가영아탑봉안비(釋迦靈牙塔奉安碑) 건립. 봉명학교(鳳鳴學校) 설립 

- 1907년(융희 1) 봉명학교 폐교 

- 1908년(융희 2) 제4회 만일회를 7일 동안 정진하여 성대히 회향(廻向). 금암 의중(錦岩宜重) 스님이 제 5회 만일회를 개설함

- 1909년(융희 3) 무오(戊午, 갑자(甲子)의 두 갑계(甲契)에서 6백원을 내어 동로전(東爐殿)의 담장과 만석계(萬釋階) 동쪽을 축석(築石)함 

- 1910년(융희 4) 보안원과 동지전(東持殿)의 담장과 수각(水閣)을 세움

   

 

• 일제강점기의 건봉사 

 

일본은 1911년 6월 조선사찰령을 반포하고 주지제(住持制)를 도입하였으며, 이듬해 본산제(本山制)를 시행하였다. 이에 건봉사는 선교양종대본산이 되어 인제군의 백담사(白潭寺), 양양군의 신흥사(神興寺),낙산사(洛山寺),화암사(禾巖寺)․영혈사(靈穴寺)․명주사(明珠寺), 홍천군의 수타사(壽陀寺), 고성군의 조제암(鳥啼庵), 양구군의 심곡사(深谷寺) 등을 말사로 관리하게 되었다.

주지로는 조세고(趙世杲, 1911년 9월), 이운파(李雲坡, 1914년 9월), 이대련(李大蓮, 1919년 11월), 노재봉(盧齋峯, 1923년 10월)이 차례로 맡게 되었고, 중건의 마무리 불사 또한 계속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일제강점기 아래의 건봉사 불사 

 

- 1911년 영빈관(迎賓館) 건립 

- 1913년 평양에 포교소를 열었으나 곧 폐지함 

- 1915년 31인 소신대(燒身臺)에 부도를 건립. 간성포교소 설립 

- 1918년 금암, 경월(鏡月) 스님의 감독 아래 팔상전과 낙서암의 도량에 돌축대를 쌓음 

- 1919년 극락전 도량에 돌축대를 쌓고 극락전에 수도(水道)를 매설함. 운파(雲坡) 스님이 모연하여 중종(中鍾) 5좌와 불기(佛器) 30좌를 비치. 낙서암의 단하각(丹霞閣) 돌축대를 쌓음 

- 1920년 불이문(不二門)과 영빈관 별실을 건립, 문수교(文殊橋)를 새로 가설하고 산영교(山映橋)를 보수, 봉서루․ 만일회․ 보안원․만석계(萬石階)의 석축을 완성함 

- 1921년 인천에 포교당을 열고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설립함. 한암(漢巖) 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無遮禪會)를 베품 

- 1924년 봉림학교 폐교 

- 1925년 사무소(寺務所)를 중수하고 극락암과 만일회의 부속건물로 중건 

- 1927년 불교전문강원 설립, 공비생(公費生) 30인을 육성. 불상 7위를 개금하고 장구사(葬具舍)를 세움. 원옹 덕성(圓翁德性) 스님이 화주로 뽑혀 제5회 만일회를 계승함

 

 

1927년까지의 역사는 한용운 스님이 지은 「건봉사사적기」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건봉사의 불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나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 

 

 

• 현대의 건봉사

 

일제강점기 말까지만 하여도 전체 도량 내에 40여 동 642칸의 건물과 5개 암자 124칸의 건물, 수많은 탑과 부도, 비석, 고승의 진영(眞影),불상,불화,불구 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휴전 후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게 되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부근 주둔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옛 보안원 자리에 현존하는 법당을 세워 실낱같은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1992년부터는 민간인의 건봉사 출입이 가능해지면서 점차 여러 불사도 이루어지고 사세도 회복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