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불교에서의 십이지신상

難勝 2011. 10. 27. 06:06

 

탑이나 불전 외벽 등에서 볼 수 있는 십이지신상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몸은 사람 형체다. 이것을 십이생초(十二生肖)라 부르기도 하는데, 십이생초의 먼 조상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천문 역법과 관련된 도상에서 찾아진다. 고대 바빌로니아에 우주와 천계의 운행을 나타내는 천계십이수환((天界十二獸環)이라는 것이 있다. 원을 중심에서 12등분하여 그것을 열 두 방위로 삼고, 각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동물과 인물 등 열두 가지 형상을 순차적으로 배치해 놓았는데, 각 방위에 배정된 것은 보병.쌍어.백양.금우(金牛).쌍녀.게.사자.처녀.천칭.천갈.인마(人馬).마갈(摩) 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문 역법 도상이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시기를 즈음해 중국에 유입됐고, 중국에 전래된 중앙아시아 역법 도상이 중국식으로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동물로 대체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십이생초다. 중국의 십이생초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불교에도 십이신장이 있고, 십이수(十二獸) 개념이 있다. 불교의 신장은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적인 성격과,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드는 내호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장 집단의 하나인 십이신장은 약사여래의 권속이다. 약사여래는 그의 곁에 항상 십이신장을 거느리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질병과 재난을 면하게 해주고 의식주 여건이 부족한 이들에겐 그것을 충분히 마련해주며, 백성을 억압하는 폭군이나 외국의 침략군까지도 물리쳐 안심하고 살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십이신장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사여래의 명을 받아 약사여래 12대원을 성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서민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편 〈대방등대집경〉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섬 염부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 바다에 유리산(瑠璃山), 서쪽바다에 파리산(頗璃山), 북쪽바다에 은산(銀山), 동쪽바다에 금산(金山)이 있다고 했다. 이 네 개의 섬에 각각 3종류씩 모두 12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데, 유리산에는 뱀.말.양, 파리산에는 원숭이.새.개, 은산에는 쥐.소.호랑이, 금산에는 사자.용.토끼가 살고 있다. 각 짐승은 동굴 안에서 수신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밤낮 12시간.12일.12월에 나누어, 교대로 염부제에 나가 돌아다니며 교화를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돼지가 사자로 바뀌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십이지 동물의 구성과 대동소이하다. 불교의 12수는 수신과 교화를 수행하는 보살과 같은 성격을 가지있는데, 이를 미루어 불교 신장과 십이지동물과의 결합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불경에는 약사 12신장이 무기를 든 무장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그런 도상으로 표현된 약사 12신장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12지동물과 결합된 형태의 약사 12신상이 헤이안(平安)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유물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있어서 십이지 사상과 약사여래 12신장과의 결합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을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물이 없어 내용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신라시대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주처인 동방유리광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것이 사방불신앙으로 발전해면서 방위신앙과도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방위신앙이 당시 신라 사회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추이 속에서 방위적 성격을 가진 십이지는 자연스레 약사신장 신앙과 결합됐다. 사찰이나 불탑에서 볼 수 있는 수수인신(獸首人身)의 갑주무장 십이지신상은 십이지의 방위적 성격과 약사십이신장의 수호적 성격이 결합된 제3의 신장상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12지신앙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밀교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는 단순한 방위신으로서 신격이 변모해 갔다. 즉 탑을 만들 때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는데,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이 효시가 된다.

 

원원사지에는 현재 동탑과 서탑이 남아 있다. 보존상태가 좋은 동탑을 살펴보면, 상층기단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십이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평복 차림의 십이지동물이 정적인 분위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牛)만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왼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두 손을 앞가슴에 모은 공예(恭禮)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불법 수호신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 원원사지탑 이후에는 십이지상이 탑의 하층 기단부에 새겨지는데, 구례 화엄사 서5층석탑과 안동 임하동 3층석탑, 영양 화천동 3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등의 십이지신상에서 그런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 앞 동.서로 서 있는 쌍탑 중 서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신상을 방위에 따라 배치해 놓았는데, 마모가 심하고 돌이끼가 심해 확실한 형태를 가늠해 어렵다. 다만 뱀의 경우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데, 형태는 수수인신의 갑주무장상으로 되어 있다. 각 십이지상은 기단석 측면의 좁은 공간에 조각해야하는 제약 때문인지 낮게 주저앉은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자세는 원원사지삼층석탑 십이지상의 경우와 비교되는 것으로 얼른 보면 도무상(跳舞像)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예를 영양 화천동 3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능지탑의 십이지신상은 무장상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탑은 경주 남산에 산재하고 있던 부재들을 모아 조성한 것이다. 능지탑의 무장십이지신상은 약사십이신장과 십이생초의 결합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이지신상은 탑뿐만 아니라 부도에도 새겨졌다. 울산시 학성동에 있는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의 십이지신상이 그 예다. 태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화동 반탕골의 산비탈에 묻혀 있었던 부도인데 장방형의 수석과 종형의 탑신부로 된 간략한 조형이다. 태화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이 부도하나 뿐이며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 경상남도청(釜山)에 두었다가 다시 현 위치에 가지고 온 것이다.

 

십이지상은 모두 머리부분은 짐승으로 되어 있고 몸은 사람으로 양각(陽刻)한 것으로 감실 바로 밑에는 말상을 새겨놓았다. 태화사지 부도에 십이지상을 새긴 것도 능묘의 호석과 마찬가지로 십이지상이 각기 그 방위에서 주술적인 의 수호.보전을 위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십이신장상 석탑 유례로서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개심사지에 있는 3층석탑이 있다.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십이지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수수인신(獸首人身)의 형태인데, 넓은 소매의 도포를 입고 앉은 자세에서 합장을 하고 있다. 1층기단 면석 각면을 3구의 안상을 마련하고 그 속에 십이지신상 1구씩 배치하는 형식은 화엄사서 5층석탑에서 이미 본 바 있다.

 

십이신장상의 - 불법의 수호도 중요하지만 - 최종목적은 중생을 향한 약사여래의 십이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으므로 덕과 자비를 겸해야 한다. 십이지신상은 불법을 해치는 무리에 대해서는 항복을 받지만, 자비로운 마음으로 항복한 그들을 다시 소생시켜 불도(佛道)로 인도한다. 십이신장상의 이런 성격과 역할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나라의 사찰 십이신장상의 분위기와 표정은 매우 적절하다. 앞에서 언급한 원원사지동 3층석탑, 영양화천동 3층석탑 등의 십이신장상을 보면 옷자락을 천인(天人)의 천의(天衣)와도 같이 머리 위로 흩날리듯 표현함으로써 마치 불교의 범종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을 연상케 한다. 이런 모습은 노골적인 분노형을 취하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일본이나 중국의 신장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