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발대
미륵불 하생 염원담은 발우 석조물
법주사 희견보살 미륵에 가사.발우 전하는 가섭?
“통도사 봉발탑은 중생제도 뜻 담은 봉발대가 정확”
<양산 통도사 봉발대(보물 제471호)>
이 석조 발우는 예경(禮敬)의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미륵불의 하강을 갈구하는 옛 불자들의 신앙의 징표로 남아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 석조물을 의발대(衣鉢臺)라고 부른다.
양산 통도사 용화전 앞에 석조 봉발대(奉鉢臺)가 있다. 전체 높이가 약 2.5m인 이 석조물은 석등과 마찬가지로 하대석.간석.상대석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우를 석등의 화사석(火舍石)자리에 올려놓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발우는 탑이나 불상처럼 직접적인 예경(禮敬)의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미래 부처님의 하강을 갈구하는 종교적 염원을 담은 신앙의 징표로 존재하고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 석조물을 의발대(衣鉢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석조물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옷’이 명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가사(袈裟)도 이 발우와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발우의 기원은 석존 성도 후 사천왕이 처음 부처님께 바친 네 개의 석조 발우로부터 시작되었다.
발우는 범어로 발다라(Patra)인데, 중국에서는 응량기(應量器)라 번역하였다. 이유는 그 모양과 색 그리고 양이 모두 법에 상응하고, 성인으로서 남의 공양을 받을만한 도덕이 있는 분들이 가지는 밥그릇이기 때문이다. 경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이 성도 후 7.7일이 되던 날 라쟈타나나무 밑에 머물고 있을 때 멀리 우카라지방으로부터 온 두 상인 타푸샤(제바수)와 발리카(발리가)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풀신의 권유로 죽과 꿀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것을 당장 받을만한 그릇이 없어 우두커니 서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사천왕이 내려와 금발우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올렸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와 같은 금발우를 받는 것은 출가자에 합당치 못한 일”이라며 받지 않았다. 다시 가져 온 은.파리.유리.진주발우도 받지 않아 또 다시 네 개의 돌발우를 드리니 부처님은 비로소 그것을 받아 손위에 올려놓고 누르니 전이 꼭 같은 한 개의 그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벽화가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안에 그려져 있는데, 비록 최근의 작품이지만 발우에 얽힌 내용을 살피는데 참고가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얼마 전에 가섭존자를 불러 “56억 7000만 년 후 미래세에 미륵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것이니 가섭은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세상에 남아 있다가 내 법(法)의 신표인 발우와 가사(袈裟)를 미륵 부처님께 전하라.”고 부촉했다. 이후 가섭존자는 석존 열반 후 20년이 되던 해, 계족산(鷄足山, 인도 중부의 마가타국 가야성 동남쪽에 있는 산) 동굴 속에서 열반에 들지 않은 채 수행하고 있었다. 그 후 미륵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와서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는 중에 이 산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키니 산이 저절로 열리고, 가섭존자가 그곳에서 걸어 나와 미륵 부처님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 발우와 함께 유훈을 전달한 후, 비로소 스스로의 몸을 태워 반열반(般涅槃,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통도사의 봉발대는 지금 용화전 앞에 있다. 용화전은 미륵신앙의 중심 공간이다. 미륵 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미륵보살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미륵은 지금 도솔천(兜率天)이라는 상생(上生)의 세계에서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으나, 석가로부터 다음 생에 성불하리라는 예언을 받고 지금부터 56억 7000만년 후에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로 내려온다고 한다. 용화수 아래에서 3회에 걸친 법회를 열고 석가모니불이 다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하는 부처가 된다. 사부대중들은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미륵불의 용화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실제로 옛날 불자들 사이에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로 강림 할 때를 대비하여 공양물을 미리 준비해 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매향(埋香)의 풍습인데, 불자들은 도솔천으로부터 강림한 미륵불의 법회에 제일 먼저 참석하면 현세와 미래에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용화 법회에 참석할 준비물로써 희귀한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었는데, 그것은 매경(埋經, 불경을 묻는 일)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발원자와 하생할 미륵불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그 역사적 증거물이 바로 매향비(埋香碑)인데, 통도사 봉발대의 발우도 미륵하생을 대비한 준비물이라는 점에서 매향과 같은 의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미륵불 하생에 대한 염원이 담긴 발우와 관련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유적이 보은 법주사에 있는데, 이름하여 석조희견보살상이 그것이다. 높이가 약 2.4미터에 정도에 이르는 이 석상은 연꽃무늬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인물상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석상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처럼 희견보살상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일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머리에 있고 있는 것이 향로인가 아니면 발우인가 하는 데 있다.
〈묘법연화경〉 〈약왕보살본사품〉을 보면 약왕보살의 전신인 희견보살이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희견보살은 전단.도루바의 향.교향 등의 향을 먹고, 또 1200년 동안 첨복 등의 꽃 향유를 마시며, 또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 앞에서 하늘 보배 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발원으로써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희견보살상이라고 하는 석상이 있는 법주사는 김제 금산사, 고성 발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미륵도량의 하나이다. 현재 청동 미륵대불과 용화전이 위치해 있는 곳에 그 옛날 산호전(珊瑚殿), 혹은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 불렸던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 금색의 장육상(丈六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는 이 석상은 지금은 원통전 오른쪽 구릉 아래에 옮겨져 있으나 원래는 용화보전과 팔상전을 잇는 축선상에서 미륵불을 향한 자세로 서있었다.
<보은 법주사 희견보살상((보물 제1427호) >
이 석상은 석가모니불의 가사와 발우를 미래불인 미륵불께 전하라는 부촉을 받은 가섭존자일 가능성이 크다.
머리에 인 네모난 것은 반듯하게 접은 가사(袈裟)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그릇 모양은 발우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희견보살은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과 관련하여 설명되는 보살로, 〈미륵하생경〉을 포함하는 미륵삼부경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보살이다. 법주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이고, 사찰 경내의 핵심적인 공간은 미륵장육상이 봉안된 용화보전 일대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미륵하생경〉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륵신앙과 관련이 없는 희견보살상이 이 공간 속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이 석상의 주인공이 보살이 아닌 이유를 몇 가지 든다면, 우선 복장이 보살 복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식이 단순화되었다고 해도 보살상이라면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등의 보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한 목의 삼도(三道)와 영락(瓔珞) 정도는 나타나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석상에는 그러한 간단한 장식조차 표현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보살의 모습은 보관을 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석상에서는 그러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석상을 희견보살상이 아니라 제2의 인물 석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석상이 당초에는 용화전 앞에서 미륵장육상을 바라보고 서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석상의 주인공은 희견보살이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가사와 발우를 미래불인 미륵불께 전하라는 부촉을 받은 가섭존자일 가능성이 커진다. 만약 이것이 가섭존자 석상이라고 가정한다면 머리에 이고 있는 것 중 네모난 것은 반듯하게 접은 가사(袈裟)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그릇처럼 생긴 것은 발우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통도사 스님들이 용화전 앞의 석조물을 ‘의발대(衣鉢臺)’라고 한 이유를 이 인물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섭존자로 여겨지는 이 인물상은 지금 미륵대불이 서있는 옛 용화보전 앞을 떠나 엉뚱한 자리에 옮겨져 있다. 그 결과 석가모니불의 열반으로부터 미륵불의 하강에 이르는 한량없는 시간을 기다려 석가모니불의 중생제도의 대원(大願)을 전달했던 중계자로서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한편, 통도사의 석조 발우는 ‘통도사봉발탑’이라는 이해 못할 문화재지정명칭에 의해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가섭존자 봉발석상‘의 의미를 가진 명칭으로 고쳐져야 할 것이고, ‘통도사봉발탑’은 ‘통도사봉발대’로 고쳐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두 기념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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