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 황벽 선사
여기『전심법요(傳心法要)』의 입력저본은 성철스님께서 번역하신『선림보전(禪林寶典)』입니다.
내용 분류 역시『선림보전(禪林寶典)』에서 나눈 것입니다.
전심법요 解題
서천 28대로 계계상승(繼繼相承)한 법등(法燈)은 달마스님을 효시(嚆矢)로하여 동토(東土)에서 그 빛을 밝히고, 장차 한 꽃이 다섯 잎이 피어날[一花開五葉] 씨앗을 비로소 뿌리시니, 이것이 달마정전(達磨正傳)의 원류(源流)입니다. 이 법은 6대로 면면히 전하여 6조 혜능대사에 이르러 그 큰 꽃을 피워, 아래로 남악(南嶽)스님과 청원(靑原)스님의 양대맥을 이루고, 다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벌어져서 천하에 울창한 대선림(大禪林)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남악스님 아래서 천하 사람을 답살(踏殺)한 한 망아지가 나왔으니 그 분이 마조(馬祖)대사로서 백장(百丈)스님이 그 법을 잇고 다음으로 이 『전심법요(傳心法要)』의 설법자인 황벽(黃檗)선사가 나왔으며, 그 아래로는 조석(祖席)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임제(臨濟)선사가 출현하여 임제종의 종조(宗祖)가 된 것입니다.
달마선종(達磨禪宗)이라고 하면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 밖에 따로이 전한 것[不立文字 敎外別傳]'이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는 것입니다. 『전심법요』는 그 내용에서 달마선종의 정통사상과 육조스님께서 말씀한 식심견성(識心見性)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가장 투철하고 명료하게 설파한, 종문(宗門)의 대표서라고 예로부터 일컬어온 어록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심법요』라고 하면 『완릉록(宛陵錄)』을 포함하여 일컫는데, 그 상부(上部)를 『황벽단제선사 전심법요』 하부(下部)를 『황벽단제선사 완릉록』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대사의 재속(在俗) 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그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강서(江西)의 종릉(鍾陵)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인 회창(會昌) 2년(842)에 용흥사(龍興寺)에서 대사께 문법하던 것을 필록(筆錄)하여 두었다가, 대사께서 입적하고 난 다음 그 대강을 대사의 문인들에게 보내어 청법(聽法) 당시의 장노(長老)들과 대중의 증명을 얻어서 세상에 유포시킨 것입니다. 배휴가 서문을 쓴 해가 대중(大中) 11년(857)이므로, 대사께서 입적한 지 2-3년 뒤로 추정됩니다.
『전심법요』는 배휴 자신이 종릉과 완릉 두 곳에서 문법하던 것을 직접 기술한 것이며, 『완릉록』은 배휴가 완릉의 개원사에서 문법하던 기록을 기저(基底)로하여 뒤에 시자들 측에서 엮은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것은 『전심법요』에서는 배휴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쓰고 있으나, 『완릉록』에서는 "배상공이 운운..." 하면서 시종일관 제3인칭으로 기술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완릉록』에서는 『전심법요』의 내용과 더러 중복된 부분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후반부 "대사는 본시 민현의 사람이다[師本是 中人]"로부터는 옛 유통본에는 본래 없던 부분으로서 전반부보다 분량이 더 많으며, 당 대중년간(848-859)에 또 다른 사람에 의하여 추가로 기술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기에서는 대사의 출생 및 출가 인연에 관해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대사께서 초기에 천태(天台)에서 노니시던 일과 귀종(歸宗) 염관(鹽官) 남전(南泉) 등의 선사들을 찾아 제방을 역방(歷訪)하면서 문답하고 거량(擧揚)하던 대사의 기봉(機鋒)과 기연(機緣)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배휴가 홍주 개원사에서 벽화를 보고 거량하다가 개오(開悟)한 사유를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후반부는 송나라 원풍(元 ) 8년(1085)에 편찬되었다가 명나라 만력(萬曆) 17년(1589)에 재편된 『사가어록(四家語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 번역에 사용한 원본은 명본(明本) 『4가어록』 가운데 제4권 『황벽단제선사전심법요』 및 제5권 『황벽단제선사완릉록』을 모본으로 삼아 번역하였습니다. 원풍 8년판의 『4가어록』에는 『완릉록』의 전반부밖에 실려있지 않았으나, 명나라 때 재편하면서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제8권에서 그 후반부를 옮겨 증보(增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4가어록』은 일명 『마조4가록』이라고도 일컫는 바, 곧 마조, 백장, 황벽, 임제 등 조계정전(曹溪正傳)의 4대(代) 조사 스님의 어록을 함께 엮은 어록으로서 임제종황룡파(黃龍派)에서 자가(自家)의 종지종통(宗旨宗統)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편찬-유포시킨 것이며 종문으 가장 핵심적인 어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서(光緖) 9년(1883) 감로사(甘露社)에서 『법해보벌(法海寶筏)』 가운데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포함시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유통본은 융희(隆熙) 원년(1907) 운문사(雲門寺)에서, 그리고 융희 2년(1908) 범어사(梵魚寺)에서 간행된 『선문촬요(禪門撮要)』 상권에 『전심법요』와 『완릉록』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완릉록』의 후반부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황벽스님의 법문들은 『조당집(祖堂集)』권16,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0,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권8,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2,3, 『4가어록(四家語錄)』 권4,5, 『오등회원(五燈會元)』 권4, 『지월록(指月錄)』 권9 등에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면서 내용이 서로 다르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명나라 때 증보 재편된 『4가어록』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의 교재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심법요』의 유통본은 지금까지 체제와 내용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유행되어 왔으나, 다만 결미(結尾)의 "어떻게 하여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如何得不落階級]" 이후의 한 단이 『4가어록』에서는 『완릉록』의 결미로 옮겨 싣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다음으로 황벽스님과 배휴와의 관계 및 대중황제와의 인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황벽스님 말년의 교화 시기는 당 무종의 회창법란(會昌法難)이 자행되던 때(842-845)로서, 당시 장안과 낙양에는 각각 4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1주에 1개 사찰만을 남기고 모조리 폐사시켰으므로 모든 승니들은 자연히 산곡에 은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사실상 대사의 말년의 행리(行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배휴는 다시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다가 선종(대중황제)이 즉위하고 나서 조정의 상공(相公) 벼슬에 올라 중앙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릉록』에서 보인 바처럼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벽화를 보고 황벽스님에게 거량하던 중, 황벽스님이 "배휴야!"하고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니 대사가 "어느 곳에 있는고?" 하는 말 끝에 깨치고 이 기연으로 대사의 재속제자(在俗弟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대사뿐만 아니라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에도 귀의 하였으며, 화림 선각(華林善覺)과도 교분이 있었고, 규봉 종밀(圭峰宗密)과는 도연(道緣)이 깊었습니다.
배휴가 종릉, 완릉 두 곳에서 대사를 모시고 조석으로 문법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 문답 내용을 필록하여 둔 것을 대사의 입멸 후 광당사(廣唐寺)의 옛 법중(法衆)의 증명을 얻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 『전심법요』인 것입니다. 이처럼 배휴라는 훌륭한 필록자를 얻음으로서 황벽스님의 법문이 세상에 크게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중황제는 본시 당 헌종(憲宗)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열 세 살 때 형 목종(穆宗)의 용상에 올라가 장난삼아 좌하의 신하들을 읍(揖)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뒷 날 동생의 아들인 무종(武宗)으로부터 빈척( 斥)을 당하여 사지(死地)에서 구출되어 입산하고,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 밑에서 사미가 되었다가 나중에 염관 제안(鹽官齊安)선사 회하에서 서기(書記)를 보았습니다.
당시 황벽스님은 수좌(首座)로 있었는데, 하루는 불전(佛殿)에 예배하는 대사께 대중사미가 뒤에서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하는 물음으로 거량하다가 대사로부터 뺨을 두 차례 얻어맞았습니다. 뒷날 대중사미는 당나라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제 16대 선종(宣宗)입니다. 선종은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대사께 '추행사문(추行沙門)'이란 호(號)를 내렸는데, 당시 상공으로 있던 배휴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로 개호(改號)하였던 것입니다. 대중황제는 전제(前帝)인 무종이 폐불(廢佛)을 한 탓으로 조정의 위신이 실추된 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 지력하였으며, 불교를 중흥시킨 공로가 컸습니다.
『전심법요』는 구사하고 있는 언어들이 간명하고도 평이하며 격외언구(格外言句)의 고준(高峻)한 말들을 사용치 않으면서도 선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禪)의 개론서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조계정전의 정통 선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계의 원류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 『전심법요』를 통한 황벽스님의 문정(門庭)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에서 세연을 마치셨습니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습니다.
전심법요 서문(序文)
강서 당나라 하동 배휴(裴休)는 모으고 아울러 서문을 쓰노라.
대선사가 계셨으니 법휘는 희운(希運)이시다. 홍주 고안현 황벽산 축봉 아래 머무시니, 조계 육조의 적손이요 백장의 사법 제자이며 서당의 법질이다.
홀로 최상승(最上乘)의 패를 차고 문자의 인장을 여의셨으며 오로지 한 마음만을 전하고 다시 다른 법이 없으셨으니, 마음의 바탕이 또한 비었는지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고요하여 마치 큰 해 바퀴가 허공 가운데 떠올라서 광명이 밝게 비추어 깨끗하기가 가느다란 먼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셨다.
이를 증득한 이는 새롭고 오램이 없고 얕고 깊음이 없으며, 이를 설하는 이는 뜻으로 앎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를 내세우지 않으며 문호를 열어젖히지 않은 채, 당장에 바로 이것이라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다음에라야 본래의 부처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말씀이 간명하고 그 이치가 곧으시며 그 도는 준엄하고 그 행이 고곡하시어,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달려와 모이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깨치니, 왕래하는 대중의 무리가 항상 일천명이 넘었다.
내가 회창 2년 종릉에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산중으로부터 스님을 고을로 모셔 용흥사에 계시도록 하고 아침저녁으로 도를 물었으며, 대중 2년 완릉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다시 가서 예로써 맞이하여 관사에 모시고 개원사에 안거하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 물러 나와서 기록하였는데, 열 가운데 한둘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이를 마음의 인장[心印]으로 삼아 차고 다니면서 감히 드러내어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제 신령스런 경지에 드신 그 정묘한 뜻이 미래에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내어놓으니, 문하생인 태주·법건 스님들에게 주어서 옛산의 광당사로 돌아가 장로들과 청법 대중에게 지난 날 몸소 듣던 바와 같은지 다른지를 묻게 하였다.
때는 당나라 대중 11년 시월 초여드렛날에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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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河東裵休集幷序有大禪師 法諱 希運 住洪州高安縣黃檗山鷲峰下 乃曹溪六祖之嫡孫 百丈之子西堂之姪 獨佩最上乘離文字之印 唯傳一心 更無別法 心體亦空 萬緣 俱寂 如大日輪 昇虛空中 光明 照耀 淨無纖埃 證之者 無新舊無淺深 說之者 不立義解 不立宗主 不開戶유 直下便是 動念卽乖 然後 爲本佛故 其言 簡 其理直 其道峻 其行 孤 四方學徒 望山而趨 覩相而悟 住來海衆 常千餘人 予會昌二年 廉于鍾陵 自山迎至州 게龍興寺 旦夕問道 大中二年 廉于宛陵 復去禮迎至所部 安居開元寺 旦夕受法 退而紀之 十得一二 佩爲心印 不敢發揚 今恐入神精義 不聞於未來 遂出之 授門下僧太舟法建 歸舊山之廣唐寺 問長老法衆 與往日常所親聞 同異何如也
時唐大中十一年十月初八日序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육도만행(六道萬行)과 항하사(恒河沙)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2, 무심(無心)이 도(道)
강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 한 사람에게 공양 올리는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眞如)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 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에 떨어져 닿아 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리 지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 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維摩)는 깨끗한 이름[淨名]이란 뜻인데, 깨끗하다는 것은 성품을[性]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 것이다. 대 보살들로 상징된 위의 것들은 누구나가 가진 성품으로, 한마음을 여의지 않으니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란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갠지스강의 모래는 보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無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輪廻)의 수고로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無心)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思惟)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졌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하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 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다.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강서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설사 삼아승지겁을 정진 수행하여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생각 증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궁극의 경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
깨닫고 난 다음 지난 세월의 오랜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은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 산과 물, 모양 있는 것과 없는 것 및 온 시방법계가 다 함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은 항상 뚜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을 텅 비워 버리면 마음 길이 끊기어서 어느 곳에라도 들어갈 틈이 없느니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인식할지라도,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 다만 견해를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마음이나 법을 찾아서도 안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自在)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道場)아님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밖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칠 날은 없을 것이다. 당장 무심함만 같지 못할 것이니, 그 자리가 본래 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것을 가르쳐 주면 본래 구슬은 예와 다름이 없음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本心)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의식적으로 수행을 하며 차례를 밝아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억겁 동안 애써 구한다고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 터인즉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얻었다 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깨치는 자리다. 그때 가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를 깨달을 뿐 많은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었다 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五眼]과 다섯 가지 말[五語]로써 끌어다 보였노라. 이것은 진실되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맨 으뜸되는 뜻의 이치[弟一義諦]이니라'고 하셨다.
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강서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사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사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오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 화합하여 생멸(生滅)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십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사대(四大)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菩提)·열반(涅槃)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삼아승지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如如)한 부처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곧 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없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5, 허공이 곧 법신(法身)
팔만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法身)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凡夫)는 경계(境界)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잡을 바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없는 옛날부터 허공과 수명이 같아서 한번도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있은 적도 사라진 적도 없다. 더럽거나 깨끗한 적도, 시끄럽거나 고요한 적도 없고, 젊지도 늙지도 않으며, 방위와 처소도 없고, 안팎의 구분도 없다. 또한 개수로 셀 수량이나 형상·색상·소리도 없다. 그러므로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경계인 사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힘써 공부한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다. 모든 불·보살과 일체의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라도 똑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이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 참됨을 여의면 모두가 망상이 된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를 가지고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법을 가지고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하여 묵연히 계합(契合)할 뿐이니, 마음으로 헤아린다면 곧 어긋난다.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것이 바른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 자식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一切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境界)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6, 마음을 잊어버림
9월 1일 대사께서는 배휴(裴休)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는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또한 부처로써 부처에게 전하실 뿐 다른 부처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이승(二乘)은 참됨이 아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라는 뜻으로서, 모양이 없는 본래 마음이다. 범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여 육도(六道)에 빠져 방황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남(生)이 있음을 보고 없어짐으로 나아가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지고, 남(生)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없어짐만을 보면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법은 본시 남(生)이 없으므로 이제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이 두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서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이어야만 그런 다음에 불승(佛乘)이 된다.
범부는 모두가 경계를 좇아 마음을 내서 좋고 싫음이 있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공적하면 곧 마음이 없어지느니라. 만약 마음을 잊지 못하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반야(般若)를 배우는 사람이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게 되면, 삼승(三乘)에는 뜻이 끊어져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는 자리인데도 '나는 깨달았노라'고 한다면,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사람이다. {법화경}회상에서 옷을 떨치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다.
범부 중생들은 다만 죽는 순간에 오온(五蘊)이 모조리 비고 사대(四大)는 '나(我)'가 없음을 본다. 그러나 참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태어났다고 해서 성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담연히 둥글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삼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나아가는 향방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맞이해 주시는 것 같은 가지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역시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고서 법계와 같아지면, 바로 자재(自在)를 얻은 것이니, 이것이 곧 요긴한 대목이다."
7, 법(法)은 무생(無生)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闡提)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 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福德)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 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法身)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淸淨)한 법을, 화신(化身)은 육도만행법을 말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 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8, 도(道)를 닦는 다는 것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무슨 물건이길래 수행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제방의 종사가 서로 이어받아 참선하여 도를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되느니라."
"그것이 둔근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상근기(上根機)를 위해서는 무슨 법을 설하시는지요?"
"상근기라면 어디 남에게서 찾으려 하겠느냐? 저 자신마저도 얻지 못하거늘, 더구나 따로 뜻에 합당한 법이 어디 있겠느냐? '법이란 법이 무슨 모양이더냐?'고 한 경(經)의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그렇다면 도무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힘이 덜리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온통 끊어져 버려서 '없다는 것'도 가당치 않겠습니다."
"누가 그것을 없다 하였으며, 또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너는 찾으려 하느냐?"
"스님께서는 이미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끊지도 말라 하십니까?"
"찾지 않으면 그 자리는 바로 '쉼'인데, 누가 너더러 끊으라 하였느냐? 눈앞의 허공을 보아라. 어떻게 저것을 끊겠느냐?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사람들로 더불어 알음알이를 내지 않음이 마땅한 것입니까?"
"내 너를 방해한 적은 한번도 없거니와, 요컨대 알음알이란 뜻[情]에 속한 것으로서 뜻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게 되느니라."
"여기에 있어서 뜻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뜻을 내지 않는다면 누가 옳다고 말하겠느냐?"
9, 말에 떨어지다
"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찌해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話墮]고 하십니까?"
"네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10, 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허다한 언설들이 모두 방편으로 대꾸한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이신 실다운 법이란 아주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실다운 법이란 전도됨이 없거늘, 네 지금 묻는 곳에서 스스로 전도되고 있느니라. 그러면서 무슨 실다운 법을 찾는다는 말이냐?"
"묻는 곳에서 이미 스스로 전도된 것이라면, 스님께서 대답하신 곳은 어떠하십니까?"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지언정 남의 일에는 상관할 것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뭐 별다를 게 있겠느냐."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이 선종은 위로부터 이제껏 이어 내려오면서 알음알이[知解]를 구하게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도를 닦으라고만 했을 뿐인데, 사실 이것도 교화하는 방편설이니라. 그러니 도 또한 배울 수 없는 것으로서, 뜻을 두고 알음알이를 배우게 되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게 된다. 도에는 일정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의 마음[大乘心]이라고 하느니라.
이 마음은 안팎·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실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이니, 첫째로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너에게 말한 것은 뜻으로 헤아림이 다해 버린 바로 그 자리가 도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뜻으로 헤아림이 다하면 마음에는 방위도 처소도 없느니라.
이 도라는 것은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뜻으로 헤아리는데 미혹되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어 이 일을 자상히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으니,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으버려라!'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연히 도에 통하고 마음을 알아 본래의 근원에 통달한 이를 사문(沙門)이라 부른다. 사문이라는 자리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런데도 너희들은 남의 집에 세 살이 하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면서 배워서 얻으려하니, 될 까닭이 있겠느냐?
옛 사람들은 영민하여 한 말씀 들으면 당장에 배움을 끊었다. 그래서 그들을 '배울 것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라고 했다. 반면 지금 사람들은 하 많은 알음알이를 구하고, 널리 글의 뜻의 캐면서 그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만, 넓은 지식과 견해 때문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매 것이므로 각각 말씀이 다르다. 다만 요달하여 알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느니라.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한 근기를 대상으로 말씀에 있어서 글자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실로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종은 이런 일을 따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마음을 그칠 줄 알면 곧 쉬는 것이요, 다시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느니라."
11, 마음이 부처
배휴가 물었다.
"예로부터 마음이 부처라고들 하는데, 어느 마음이 부처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몇 개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범부에 즉(卽)한 마음이 부처입니까, 아니면 성인(聖人)에 즉(卽) 마음이 부처입니까?"
"어느 곳에 범성(凡聖)의 마음이 있느냐?"
"지금 3승 가운데서 범·성을 말씀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3승을 말하는 가운데 분명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범·성의 마음이 허망하다'고 하셨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아직 '있다'고 집착하여 공허한 것을 무언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허망되지 않겠느냐? 허망하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되는 것이니, 네 만약 범부의 뜻과 성인의 경계를 없애기만 한다면,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느니라.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범·성을 집착하고 마음을 밖으로 내달리며 도리어 스스로 마음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고 하였으니, 한 생각 뜻이 생기면 그 즉시 6도의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된다. 비롯없는 옛날로부터 오늘날과 한결같이 다르지 않아 어떠한 다른 법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했다고 하느니라."
"스님께서 말씀하신 '곧 그대로『卽』'라 함은 무슨 도리입니까?"
"너는 무슨 도리를 찾는 것이냐? 어떤 도리라도 있기만 하면 바로 곧 본래의 마음과는 달라지느니라."
"앞서 말씀하신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 이치는 무엇입니까?"
"찾기 때문에 네 스스로 그것과 달라지는 것이니라. 네 만약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를 것이 있겠느냐?"
"이미 다르지 않다면, 굳이 '곧 그대로'라고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만약 범·성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에게 굳이 '곧 그대로'라는 말을 하겠느냐? '곧 그대로'가 '곧 그대로'가 아니라면,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닌 것이니, 이런 가운데 마음과 '곧 그대로'라는 것을 다 잊으면, 네가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느냐?"
12,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 以心傳心 』
"망념(妄念)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는데 무엇으로써 망념을 없애야 합니까?"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네 다만 범·성의 두 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니, 다시 그것을 어떻게 떨쳐버리겠느냐? 떨 끝만큼도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이른바 '내가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고 한 것이 되느니라."
"이미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다면 어떻게 역대 조사들께서는 서로 이어 받았습니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면 어찌 마음 또한 없다고 하십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전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깨치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느니라."
"마음도 법도 없다면 어찌하여 전한다고 하십니까?"
"너는 마음에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얻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조사께서는, '마음의 성품[心性]을 깨달았을 때에야 불가사의하리라. 요연히 사무쳐 얻을 바가 없나니, 얻었을 때라도 알았다 하지 못하노라'고 하셨느니라. 만약 이것을 너더러 알도록 한다 하여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13, 마음과 경계
"눈앞의 허공을 경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가리켜 마음을 보는 것이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을 너더러 경계 위에서 보게 하느냐? 설혹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니라. 사람이 거울로 얼굴을 비출 때처럼 눈썹과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림자일 뿐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거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의지함'에 빠진다면 항상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야 언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너는 '손을 털고 그대에게 내보일 아무 것도 없구나. 수천 가지로 말한들 모두 헛수고로다.'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
"마음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출 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면 어찌 더 비출 필요가 있겠느냐? 눈을 뻔히 뜨고 잠꼬대 같은 말을 하지 말라."
14, 구함이 없음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백 가지로 많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음'만 훨씬 못하니라. 도인(道人)이란 일 없는 사람이어서 실로 허다한 마음도 없고 나아가 말할 만한 도리도 없다. 더 이상 일이 없으니, 헤어져들 돌아가거라."
15, 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
"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 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 있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하고 눈깜짝이는 것 모두가 번뇌 없는 지혜와 같으니라.
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마음이 허공 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 가며, 또한 타고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네가 다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에 떠있는 햇살 같아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자연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 풀 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 정작 천마(天魔)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 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삼현(三賢)·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 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 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드는 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우신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 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 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 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 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 '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 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약 이 뜻을 알아낸다면, 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둥긂도 없고, 크고 작음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 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 모든 성현들은 스치는 번갯불 같도다'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 어디 떨 끝만큼이라도 모자람이 있겠느냐. 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 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16, 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
배휴가 물었다.
"혜능(慧能) 스님께서는 경전을 모르셨는데 어떻게 법의(法衣)를 전수 받고 육조가 되셨으며, 반면 신수(神秀) 스님은 500대중의 수좌(首坐)로서 교수사(敎授師)의 임무를 받아 32본(本)의 경론(經論)을 강의 할 수 있었는데 왜 법의를 전수 받지 못하였습니까?"
"신수스님에게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유위(有爲)의 법으로서 닦고 깨닫는 것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조께서는 6조에게 부촉하셨느니라. 한편 6조는 당시에 다만 묵묵히 계합하여 여래께서 은밀히 주신 매우 깊은 뜻을 얻으셨으므로 그에게 법을 부촉하셨느니라.
너는 듣지 못했느냐? '법(法)이란 본래 법은 법이랄 것 없나니 법 없는 법을 또한 법이라 하느니라. 이제 법 없음을 부촉할 때에 법이다 법이다 하는 것이 일찍이 무슨 법이었던고?' 라고 하셨다. 이 뜻을 알면 바야흐로 출가자라고 부르게 되느니라.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하여 도명(道明) 상좌(上座)가 대유령 꼭대기까지 달려와서 6조를 찾았겠느냐. 그때 6조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옷을 구하는가, 아니면 법인가?' 하니, 도명상좌가 '옷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왔습니다'고 하였다.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잠시 마음을 거두고 선도 악도 전혀 생각하지 말라' 하시자 도명상좌가 말씀을 받드니, 6조께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 부모가 낳기 이전 명상좌의 본래 면목을 나에게 가져와 보아라' 하셨다.
도명상좌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묵연히 계합하고 문득 절하며 말하기를 '마치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사옵니다. 제가 5조 문하에서 30년 동안 잘못 공부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하자,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 고 하셨다.
이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이 언설에 있지 않음을 바야흐로 알 것이로다. 어찌 듣지 못했느냐? 아난이 가섭에게 묻기를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까?' 하니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대답하자 가섭이 말하기를 '문 앞의 깃대『刹竿』를 거꾸려뜨려 버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사의 표방(標榜)이니라. 몹시 총명한 아난이 30년 동안 시자(侍者)로 있으면서 많이 들어 얻은 지혜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천일 동안 닦은 너의 지혜는 하루 동안 도(道)를 닦느니만 못하다'고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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