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泰山)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는 뜻으로, 예고(豫告)만 떠들썩하고, 실제(實際)의 그 결과(結果)는 보잘것없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로 소문난 잔치 먹을것 없다는 격언과도 유사합니다.
연말의 이런저런 행사를 보면서 이 말을 실감합니다.
정말, 요즘 세상에 군계일학의 뛰어난 인물은 없는 것인지....
진서 혜소전에 나오는 군계일학의 유래
중국의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시대에 竹林七賢(죽림칠현)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종종 지금의 하남성 북동부에 있는 죽림에 모여 노자와 장자의 허무 사상을 바탕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죽림칠현 중 위나라 때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있던 혜강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다. 그때 혜강에게는 나이 열 살 밖에 안 되는 아들 紹(혜소:?∼304)가 있었다. 혜소가 성장하자 중신(重臣) 산도가 그를 무제(武帝/256∼290=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염)에게 천거했다.
"폐하,서경(書經)의 강고편(康誥篇)에는 부자간의 죄는 서로 연좌(連坐/같이얽어맴)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나이다. 혜소가 비록 혜강의 자식이긴 하오나 총명함이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제후) 극결(缺)에게 결코 뒤지지 않사오니 그를 비서랑으로 기용하시오소서."
"경이 천거하는 사람이라면 승(丞/랑 위의 벼슬)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 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혜소가 입궐하던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자못 감격하여 왕융에게 말했다.
"어제 구름처럼 많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입궐하는 혜소를 보았습니다만, 그 늠름한 모습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우뚝 선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혜소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그는 혜소보다 훨씬 더 늠름했다네." 라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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