拈華茶室

차 마실 때 향을 피우는 이유

難勝 2012. 1. 29. 04:50

 

 

 

모처럼 寂海스님과 향기로운 차 나눔을 하였습니다.

그윽한 침향을 태우며...

 

마침 차 마실 때 향을 피우는 이유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차 마실 때, 왜 향을 피우나

 

향기로운 것은 잠이 들어도 향기롭다.

그 잠들어 있는 향기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차생활이다.

 

마른 찻잎 속에 잠자는 향기를 깨워 한잔의 차를 따르면, 찻잔에는 대이슬을 머금은 찻잎에 담겼던 봄향기가 가득 피어난다. 그 차를 마시면 향기를 머금었던 청산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가 청산이고, 바라보는 청산이 바로 나이다.

그 자리에 향 한 자루가 피어오른다.

 

차를 마실 때, 왜 향을 피우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리를 청정하게 하고, 화로에서 나는 잡내를 제거하기 위한 배려이다.

 

우리나라의 향문화의 기원을 흔히 <삼국유사>에 실린 불교의 도입 시기인 묵호자에서 찾게 된다.

아직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기 전인 19대 눌지왕 때,

중국의 양나라에서 의복과 함께 향을 보내 왔는데, 이 향으로 묵호자가 공주의 병을 고침으로써 향이 단순히 방향제가 아닌 질병의 치료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묵호자는 '향을 태우면 그 정성이 신성한 곳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향이 질병 치료 뿐만 아니라 소망을 비는 매개체로 쓰였다는 것과, 불교의 유임을 통하여 향문화가 전래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사서인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보면 이 향은 우리의 고대사와 직결된다.

웅녀가 먹었다는 쑥과 마늘은 향신료의 대명사이고, 우리 할아버지 환웅은 신단수를 타고 내려오셨는데, 왜 하필이면 여기에 '단(檀)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을까?

 

여기서 신단수의 단은 이른바 백단, 자단, 흑단의 단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흔히 박달나무 단이라고 새기지만, 향기로운 나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뿐만아니라 <규원사화>에서는 단목을 향나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단수가 향기로운 나무였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향기롭다는 말이 우리말에서 '단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도, 신단수는 '단내가 신령스런 나무'의 한자식 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향나무와 쑥이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예로는,

장례 의식 절차의 하나인 염(殮)이라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향나무를 삶은 물로는 머리를 닦고 쑥을 삶은 물로는 몸을 닦는다.

이는 우리가 신화라고 하는 환웅의 신단수와 웅녀의 쑥이 그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되살아나는 부분이다.

신화라고 부정하는 우리의 역사 속으로 죽어서야 비로소 돌아간다.

향나무와 쑥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상징하는 향기이기 때문이다.

 

무속에서도 죽은 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을 씻김이라고 하는 이유도 강신한 넋을 향물, 쑥물 그리고 청정수로 닦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향은 신화가 아닌 역사와 생활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스스로 반문을 한다.

향을 왜 피우는가?

 

그것은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향이 제 스스로를 태워 둘레를 맑게 하듯, 근본을 밝혀 이웃을 밝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뿌리를 밝히는 의식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차례에서도 향을 피우고 차를 올리는 것을 보면, 차와 향은 아주 단단한 무형의 고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들어 있는 내 안의 향기를 찾는 일, 향기로운 향생활의 첫걸음이다.

 

향기로운 것은 또 다른 향기로운 것을 만나는 길을 열어준다.

고요한 향을 피우고 정갈한 차를 마시는 자리에 향기로운 벗이 있다.

 

그 벗의 또 다른 이름은 고요하고 정갈한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참다운 차인이 아닐까?

 

 

박희준(향기를 찾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