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환단고기(桓檀古記)

難勝 2012. 3. 16. 03:11

 

 

 

 

 

환단고기(桓檀古記)

 

1. 「환단고기」란 어떤 책인가?

 

○ 「환단고기」의 내용

환단고기는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하권으로 나누어 합친 것으로, 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시대의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역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 책으로, 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이보다 120년 내지는 180년이 앞선 것으로, 몇 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권. 하권. 가섭원 부여기로 구성되는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떼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책으로, 이 한단고기의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니, 한국(桓國). 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본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삼한 관경본기엔 마한세기 상.하와 번한세기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근거로 한다면, 우리 민족의 시작은 고조선부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약 일 만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가 아닌 아시아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보다 알기 쉽게 각 시대를 나열해보자.

환국시대 - 신시 배달국 시대 -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 대진국 - 고려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시대의 특징과 각 시대를 시작하였던 대표적인 이들 곧, 환인, 환웅, 단군들의 대해서 살펴보겠다.

 

환국시대의 환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의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 파내류국이라고도 하였다.

환국을 통치한 분은 안파견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만인이 아버지'란 뜻의 안파견 환인은 초대 환인으로서 환국을 다스렸다.

여기서 환인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환국은 12환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환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환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

 

 

다음은 배달국 시대이다.

 

환국의 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환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 (서자부)'의 수장이었던 환웅으로, 환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환인께서 중국의 감숙성에 있는 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려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환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환인천제께서는 제세 핵랑군이라 불린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인 3개를 주고 개천입교,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만세 자손의 흥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환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였다.

 

당시 환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 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 융합되었다.

웅의 음은 검이며 검은 신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는 불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래서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환웅께서 수도를 신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환웅은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이라 하는데 이는 거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환웅이란 당시 광명 민족을 이끌어 주던 거룩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배달국의 말기 단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다.

단군 성조는 신묘년(BC 2370) 5월 2일에 탄생하였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군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환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이다.

 

단군 성조께서는 환인과 환웅 천황의 정통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 신교정신을 부흥시키고, 동방 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황하/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전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부단군 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관할하던 진한은 단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 동부는 변한,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이 통치하였다.

 

'환단고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 지식을 완전히 뒤엎는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를 통한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과거에 우리가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까지 다스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그곳에는 새롭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놀라우면서, 믿기 어려운 몇 가지 기록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환단고기에는 우리의 역사 시작을 일 만년 전으로 잡고 있다.

우리가 단군 조선을 기점으로 반만년이라 이야기를 하는데, 환단고기에서는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시대가 7대 3301년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9천년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토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환단고기-삼성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이 문구를 근거로 그 당시 우리민족의 영토를 짐작해 본다면,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을 넘어 지금의 러시아에까지 미치고 있다. 말 그대로 남북 5만리와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환국은 열 두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수밀이국을 일부에서는 고대 수메르로 해석을 하는데, 수메르족은 세계의 4대 문명 중에 하나인 메소포다미아 문명을 일으켰던 민족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서쪽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바로 우리라는 소리다.

 

다음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중국에게 문명의 대부분을 받아 왔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그 중국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대 환웅의 막내아들은 태호복희라고 한다.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 첫 번째 인물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진으로 갔다."

 

태호복희는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바로 그 사람이 환웅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환단고기'에는 놀라운 기록들이 많다.

 

 

○ 「환단고기」의 작자에 관하여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을 단행본으로 묶이어 전하고 있다.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각 4권의 저자 이름은 다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르다.

그리고 이들 저자 중에는 이암,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도 그 행적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가에 대한 기록은 다른 사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또한,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사람의 행적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다른 사료에 이들의 확실한 행적이나 환단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면 환단고기를 다루는 정도가 훨씬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1911년 네 권의 책이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이 내용을 살펴본다면, 1911년 네 권의 책을 묶은 사람은 계연수이고,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전하고 있지 않고 있다.

계연수의 행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다만 짐작하는 것은 대종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후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낸 재야사학자였다.

1979년 발표된 환단고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서 새로이 번역되면서, 그것이 역수입되어 관심을 받게 되었다.

환단고기에 대해 나름대로 속시원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이 책의 공개자인 이유립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2. 「환단고기」에서의 상고사와 기존의 단군신화의 비교

 

환단고기에서 가장 논거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단군신화와는 완전히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과연, 단군에 대한 내용을 신화로써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실제 역사로써 인정을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몇몇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실제 역사로써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인 비교를 하기 이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존의 단군신화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다.

 

단군신화는 크게 3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게 된 연원을 밝힌 내용이고,

둘째는 환웅이 곰과 결혼함으로써 단군왕검을 낳게 되는 과정을 밝힌 내용이다.

셋째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존의 단군신화에서 '환인과 환웅'을 인간이 아닌 단지 그 이상으로 보고 있다.

바로 신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써 상징성과 설화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 단어들의 명칭을 보다 구체적으로 관직이나 제사장의 명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단군'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는, 환웅이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나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당시 토착종족인 웅족으로 환웅이 그 웅족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환단고기에서는 보고 있다.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실려 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환단고기에서는 2천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보다는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이 훨씬 자연스럽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시간을 통치한다는 것과 더구나 천년이 넘게 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단군에 대한 기록을 신화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환단고기가 정확한 사료로서 인정이 된다면, 단군신화는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로 남게된다.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다.

'환단고기'란 책이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3.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쟁

 

○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무가치하다는 주장

사료로서 무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대부분 학계이다.

그들은 먼저 환단고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을 들고 있다.

환단고기 저자들의 행적이 확실치 않으며, 그들에 대한 기록이 다른 사료에 자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어느 곳에도 그들이 환단고기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타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단행본으로 만든 계연수의 행적도 알 수 없으며, 70년 후에 이유립이 책을 발간하였는지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에 학계에서는 사료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이 가장 큰 부정이유인 듯하다.

 

다음은 환단고기의 책에서 발견되는 근거들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문장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산업, 문화'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단어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어 '국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환단고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단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단고기는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는 또 있다.

그것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는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 구로써, 인구로는 9억이 넘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구통계표가 천만을 넘지 못하는데, 너무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환단고기는 학계에서는 찬밥신세다.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

사료로서 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재야사학계이다.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조선의 영역에 나타나는 비파형 동검의 출토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들이 과학적으로 사실로 판명이 된 것이다.

 

먼저, 환단고기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청동무기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로써 중앙에서 만들어 지방에 공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청동기가 사용된 지역은 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비파형 동검이 지금의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고조선의 영토는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환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고조선의 영토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수서령'이란 부분이다.

수서령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팔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이 수서령이 내려진 책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삼성기'이다.

수서령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환단고기의 제목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연수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참고하였다는 근거를 낳게 된다.

 

 

■ 결론을 내려 본다면,

우리의 상고사는 너무도 빈약하다.

가깝게는 백제의 문화적 기록도 부족하다.

 

물론, 일제시대 일본의 상고사 말살정책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단군조선은 그저 하나의 신화로서 동화책 <북한의 단군릉> 같은 이야기만을 놓아둔 채 손을 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억지스럽게 자기네들의 상고사를 찾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은 그것을 소재로 만화영화까지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1994년부터 평양 동쪽 강동군에 단군릉을 복원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을 단군 조선시대 5번째 통치자인 구을 단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토록 메말라 있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책들이 나왔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과 같은 책이 아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기록을 중국에 맞추어 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싶다.

 

○ 참고 문헌  

『환단고기』, 계연수. 코리아북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23가지 실증사례

 

[출처: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 

 

(여기서 [아!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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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교수는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는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셋째는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