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중국의 산수화 - 왕몽, 심주, 곤잔

難勝 2012. 3. 17. 04:23

구구임옥도(왕몽), 여산고도(심주), 산고수장도(곤잔)

 

원(元) 말기에 활동했던 왕몽(王蒙:1308-1385)은 조맹부의 외손자로 외조부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중국 역사에서 원대와 청대는 한족(漢族)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을 다스린 시기다.

원은 몽골족인 칭기즈칸이 세웠고 청은 만주족인 누르하치가 건국했다.

이 때 한족 출신 문인들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야인으로 지냈는데 왕몽도 그런 사람이었다.

 

왕몽은 황공망(黃公望:1269-1354), 오진(吳鎭:1280-1354), 예찬(倪瓚:1301-1374) 등과 더불어 원 말기에 야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한 ‘원사대가(元末四大家)’의 막내였다.

물론 한 때 벼슬길에 나가 낮은 직책을 맡았는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관직생활을 마감했다.

그 후 항주 북쪽에 있는 황학산(黃鶴山)에 은거하면서 ‘황학산의 나무꾼’이란 뜻의 ‘황학산초(黃鶴山樵)’라는 호를 썼다.

황학산초는 소주와 항주에 모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제법 이름을 얻었다.

 

1368년에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인 주원장이 세운 명 왕조가 들어서자 그는 산동성의 태안지주에 임명된다.

그러나 홍건적 출신으로 하층민이었던 태조 주원장은 지식인들을 믿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형시켰는데 왕몽도 그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하고 옥사(獄死)했다.

 

왕몽, <구구임옥도>, 원대, 1368년, 종이에 채색, 68.7×42.5cm, 대북고궁박물원

 

이런 혼란스런 시대를 살면서 왕몽이 겪었던 불안과 초조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구구임옥도(具區林屋圖)>다.

‘구구(具區)’는 천하 제일의 명승지로 일컬어지는 호수 ‘태호(太湖)’의 옛 이름이고, ‘임옥(林屋)’은 태호 서쪽에 있는 동굴 이름이다.

 

화면 전체를 구불구불한 우모준(牛毛濬:소털처럼 짧고 가느다란 필선으로 바위나 산을 그리는 기법)과 해삭준(解索濬:새끼줄을 푼 것같이 선이 비틀어진 주름)으로 된 경물들로 꽉 채우듯 그린 이 작품은 승려인 친구 일장(日章)을 위해 그려 주었다.

 

답답하리만치 화면 윗부분을 빈틈없이 채운 구도와 꿈틀거리는 듯한 필선, 붉은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이 그림은 질서정연한 자연을 재현하던 기존 산수화와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

역동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는 어떤 안정감도 거부하는 듯하며 현실 정치에서 제외된 채 살아가야 했던 작가의 불안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듯하다.

 

중국의 ‘반 고호’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표현적인 작품세계는 후대의 문인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명대의 문징명(文徵明:1470-1559)과 동기창(董其昌:1555-1636)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왕몽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

 

청나라 때 편찬된 화보집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의하면.

그는 ‘옛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의 필법을 끌어다가 준 속에 섞어 넣었으나 금송곳으로 돌을 조각하고 학의 부리로 모래에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조금도 그 흔적이 엿보이지 않는다’고 평가받았다.

 

 

심주, <여산고도>.명, 1467년, 종이에 채색, 193.8×98.1cm, 대북고궁박물원

 

소주(蘇州) 근방의 오현(吳縣)에서 활동한 심주(沈周:1427-1509)는 원말사대가의 화풍을 바탕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가 그린 <여산고도(廬山高圖)>를 보면 복잡한 구도와 짧은 필선, 불안정하게 배치된 산봉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꿈틀거리는 듯한 에너지의 표현 등에서 왕몽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심주는 왕몽보다 백 년도 훨씬 지난 후에 태어났지만 작품이 남아 있는 한 스승의 생존여부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위패스승이라도 상관없었다.

 

심주는 예찬만큼 왕몽의 화풍을 좋아해서 옛 대가의 작품을 ‘방(倣)’하는 그림들을 계속 그렸다.

그러나 그는 왕몽처럼 격렬하고 뜨거운 기질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스승의 화풍을 따라 그려도 그의 그림 속에는 왕몽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온화함과 서정성이 배여 있었다.

 

그에게 그림은 자신의 생각과 인생관을 그려 넣는 도구에 불과했다.

강서성 북쪽에 있는 여산 봉우리의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을 그린 <여산고도> 또한 그의 스승이었던 진관(陳寬)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여산이라는 이미지를 활용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한 번도 여산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린 여산은 실경 산수가 아니라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이상적인 산의 모습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심주가 탄생시킨 화파(畵派)는 그가 태어난 지역 오현(吳縣)의 이름을 따서 ‘오파(吳派)라고 부르는데, ‘오파’는 왕몽 이후 침체된 문인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세력이 되었다.

 

오파는 심주에 의해 창시되었으나 화단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제자 문징명에 의해서였다.

조용히 은둔하며 살았던 심주와 달리 사교적이며 활동적이었던 문징명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아들인 문가와 조카 문백인을 비롯해 진순, 육치, 거절 등 걸출한 인물들이 오파의 맥을 이어가며 참신하면서도 근대적인 채색의 문인화를 남겼다.

 

오파의 구성원 대부분은 양반 계급으로 안정된 집안에서 풍부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원말사대가의 화풍은 수용하면서도 선배들이 품고 있던 반사회적인 경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심주는 변화된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곤잔, <산고수장도>, 청대, 약 1660년, 종이에 채색, 330×127.5cm, 대북고궁박물원

 

 

왕몽을 스승으로, 심주를 사형(師兄)으로 그림을 그린 작가 중에 곤잔(髡殘:1612-1673)이 있다.

 

한족이 세운 명(明)이 망하고 만주족이 청(淸)을 세우자 명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한 곤잔은 저항군에 입대했다.

결국 저항군은 섬멸되었고 곤잔은 승려가 되어 은거를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린 ‘유민(遺民) 화가’가 되었다.

 

청대 초기에는 곤잔처럼 몰락한 명의 유민으로 승려가 되어 청의 지배에 저항하는 4명의 화가들이 있었다.

곤잔과 홍인(弘仁:1610-1664),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 석도(石濤:1642-1718) 등인데 이들 네 명의 ‘사승화가(四僧畵家)’는 그림으로 저항감을 표시하였다.

 

선비들이 불교나 도교 등의 종교 교단에 들어가는 것은 종교적인 목적과 하등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창칼을 세워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기는 마뜩찮은 상황에서 공인으로써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승려화가였지만 수행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승려로써 자유스럽게 돌아다니며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석계(石谿)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곤잔은 왕몽과는 304년, 심주와는 185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황산을 여행하고 그린 <산고수장도(山高水長圖)>를 보면 그의 스승이 누구인 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어 몇 백 년의 시간차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미터가 넘는 큰 화폭을 나무와 폭포와 안개로 가득 채운 이 작품은 불안정한 구도와 짧은 필선, 환상적인 분위기가 왕몽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특정 화파에 구속되지 않고 여러 대가들의 기법을 두루 섭렵한 자유스러움과 힘이 더해져 곤잔만의 독특한 산수화가 완성되었다.

 

곤잔에 와서 산수화는, 표현주의적인 왕몽식 화법과 의식의 투영이라는 심주의 관념화된 산수화법을 벗어나, 예술가의 내면 세계와 자연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소산이라는 전통적인 산수화론을 재발견하게 된다.

스승을 능가한 제자의 청출어람인 셈이다.

 

물론 곤잔이 있기까지는 왕몽이라는 출발점이 있었고 심주나 문징명 같은 정거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분방하면서도 중후한 산수화라는 자신만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