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교리 자료 2007. 9. 1일분입니다. 『천수경』이란 어떤 경전인가
『천수경』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경전의 하나로, 절에서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경전일 뿐 아니라 각종의식(儀式)에서 빠질 수 없는 경전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외워야 하는 독송집(讀誦集)입니다. 이처럼 『천수경』은 대중화되고 통용화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이나 성립 연원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불자들이 늘 독송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은 그것이 종교 의식과 신비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고 일반적인 간경(看經)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지금부터 『천수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천수경』과 관음신앙
『천수경』의 원래 명칭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陀羅尼經)’인데, 여기서 천수는 千手千眼관세음보살을 뜻합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지난 무량겁(無量劫) 전에 천광왕정주여래(天光王精住如來)로부터 받으신 대비신주(大悲神呪)를 다시 중생을 위하여 세상에 선설하신 것이므로 『천수경』이라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범어 ‘아바로기데스바라(Avalokitesvara)'로서 관자재(觀自在), 光世音, 觀世自在, 觀世音自在라 번역합니다. 줄여서 ’觀音‘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간략히 부르는 약칭입니다. 觀世音菩薩은 32응신(應身) 14무외력(無畏力) 4불사의덕(不思議德)을 갖추어 현세에는 신통력(神通力)과 위신력(威神力)으로 중생들을 자비롭게 보살피십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보살이십니다.
이와 같이 관세음보살께서는 6도(六道: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도,천도) 중생을 다 구제하시기 위하여 6관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①성관음(정관음.정관음.A-rya) ②천수관음(千手觀音.Sahasrabhuja) ③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Ekabasamukha) ④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Cinta-manicakra) ⑤마두관음(馬頭觀音.Hayagriva) ⑥준제관음(准提觀音.Candi)등으로 출현하고 계십니다. 『천수경』에서는 이 같은 6관음 중에서 천수관음이 중심이 됩니다. 천수천안의 신비한 위신력과 자비력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천수경』의 다라니(多羅尼)를 외우도록 한 것입니다.
현재의 『천수경』
지금 우리나라에서 봉독되고 있는 『천수경』은 천수다라니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앞과 뒤에 여러 청원문(請願文)과 게송문(偈頌文이 안배되어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행본(現行本) 『천수경』은 언제 편집되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의상 대사 당시 신라에 전래된 천수다라니가 신라시대에 많이 독송되면서 어떠한 의식의 법칙〔儀範〕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나 참고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지금 확실한 문헌으로는 송(宋)나라의 사명산(四明山) 知禮法師(960-1028)가 편집한‘천수대비심주행법(千手大悲心呪行法)’이 있습니다.(대정신수대장경 제46책 p973~978) 이것은 밀교의 의식에 근거한 천수다라니 독송법으로서 비교적 상세하게 짜여졌습니다. 고려에서도 천수다라니의 독송에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무튼『천수경』의 유통에 있어서 상세한 고찰은 할 수 없으나 현행 독송본 『천수경』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이상을 소급하지 못하는 근대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수경』 본문 강의
1. 경초의 진언
『천수경』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시작됩니다. 진언은 범어의 다라니(dharani) 또는 만다라(mantra)를 번역한 말입니다. 진언은 주사(呪詞). 주문(呪文)과도 같은 뜻입니다. 이는 호법신의 노래, 부처님의 참다운 말씀, 보살님들의 기원하는 말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구업진언이란 천수다라니를 독송하기 전에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입을 청결히 해야 하기 때문에 정구업진언을 외우는 것입니다.
이 진언에는 옴(唵. om)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옴 자가 있는 예도 있습니다. 진언에서 ‘옴’과 ‘사바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옴은 매우 신성한 뜻을 간직한 음이라 하여, 인도에서는 종교 의식에 꼭 제창하는 음이며 귀의(歸依), 공양(供養)의 뜻이 있습니다. 사바하(sva-ha)는 ‘圓滿. 成就’등의 뜻입니다. 진언은 옴으로 시작해서 사바하로 끝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것은 ‘비옵니다. ........ 들이 속히 성취되기를 비옵나이다. 원만히 성취되기를 비옵나이다’ 하는 격식입니다. 옴 자가 없는 진언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언의 본문에서는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고, 진언의 신비성과 불가사의성을 감안하여 해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천수경』강의에서도 진언 자체에 대해서는 해설을 피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진언으로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입니다. 『천수경』을 봉독하기 전에 온 주위에 있는 신들을 편안히 안심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 진언을 외웁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말은 천신. 지신 등 중생과 동격의 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진언이 끝나면 ‘개경게’ (開經揭)가 나옵니다. 이것은 경전을 펴면서 찬탄과 원력(願力)을 일으키는 偈頌입니다.
偈頌이란 범어의 가타(Ga-tha)를 ‘揭로 음역했으며, 뜻으로는 ’가요‘ ’성가‘ ’시구‘의 내용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시경(詩經)에 나오는 ’풍(風‘.’아(雅)‘.’송(頌)을 붙여 게송이라 합니다. 어원을 분석하면 ‘게’는 범어이고 ‘송’은 한문입니다. 이 둘이 합해져서 하나의 시구를 표현하는 말로 ‘게송’이라 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부처님의 높고 깊은 가르침은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이 자나도록 만나기가 어렵도다.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내가 지금 듣고 보아 받아 간직했으니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여래의 참된 뜻을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리하여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으로 이어집니다. 법장(法藏)은 진리가 소장된 창고란 뜻이며, 경전을 가리킵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한없는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법장이라 합니다. 이 개법장진언은 경전을 펴면서 발원하는 진언입니다.
2.계청문(啓請文)
개법장 진언에 이어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의 경의 제목이 나오고 바로 계청문으로 연결됩니다. 일반적인 경의 체제는 경의 제목이 나오면 역자를 소개하고 곧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천수다라니에서는 그렇지 않고 중간에 긴 계청문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수다라니를 읽기 전에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청하는 의식문입니다. 이 계청문의 게송은 『대장경』의 『천수경』에도 기술되었으나, 본래 경의 본문은 아니고 관세음보살을 청하는 문장입니다 계청문은 다음주에 계속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상 이 병 설
七佛-19 제2회 포교사 문제(7~8번) 해설입니다. (일부 잘못된 해설은 질문 바랍니다.)
7. 사성제에 대한 설명과 관계 없는 것은?
①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준다.
② 고, 집, 멸, 도를 말한다.
③ 사성제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대비하고 있다.
④ 사성제에서 집(集)성제가 팔정도와 관계가 깊다.
팔정도는 苦에서 벗어나는 수행방법이기에 멸성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다음의 8번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한꺼번에 해설문 붙입니다.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상,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번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먼저 이 팔정도의 각 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 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이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 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8. 다음 중 팔정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정명(正命) - 바른 생활 ② 정정(正定) - 바른 사유
③ 정견(正見) - 바른 견해 ④ 정정진(正精進) - 깨달음을 향한 바른 노력
정정은 바른 수행을 의미하며 바른 사유는 정사유입니다.
2007. 9. 1. 難 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