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한국불교의 신앙 전통 - 신라, 고려, 조선의 신앙의례

難勝 2007. 11. 9. 05:10
 

현행의 통합성 화엄의례는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삼국유사』권2, 「문호왕법민」조에 “인문(仁問)이 옥에 있을 때에 신라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을 개설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자 미타도량이라 고쳤다.”는 기록이 있고, 권3의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조에는 “부득(夫得)은 미륵불을 성심으로 구했으며(勤求彌勒), 박박(朴朴)은 아미타불을 예념했다(禮念彌陀).” 는 말과 관세음보살의 영험내력을 설명하였다(我是觀音菩薩 來助大師 成大菩提矣). 또한 권3의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서는 관음신앙, 미륵신앙, 정토신앙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감산사의 「미륵보살조상기」와 「아미타여래조상기」에 의하면 성덕왕 18년(719)과 이듬해에 미륵보살상과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여 감산사에 안치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이 밖에도 석가여래신앙, 약사여래신앙, 오백나한신앙 등을 기술하였다. 「대산오만진신」조에는 “동대 만월산에는 일만 관음진신이 있고, 남대 기린산에는 팔대 보살을 수위(首位)로 하여 일만 지장이 있고, 서대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수위로 하여 일만 대세지가 있고, 북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수위로 하여 오백 아라한이 있고, 중대 풍로산은 또한 이름이 지로산이니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일만 문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대 관음방(房)은 관은예참, 남대 지장방은 점찰예참, 서대 미타방은 미타예참, 북대 나한당은 열반예참, 중대 진여원은 문수예참을 각각 하며, 해마다 백일 동안 화엄회를 개설하라는 글이 보인다.

이상의 신앙의범은 여러 도량에서 통합성이 보이며, 오대산 신앙에서는 통합성의 화엄의례가 확연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조계종의 현행 통합성의 화엄의례는 신라시대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 이루어진 통합성의 화엄의례는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의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신앙의범은 고려시대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고려의 사찰은 불전(佛殿)‧법당(法堂)‧선실(禪室)‧경루(經樓)‧문랑(門廊) 등의 사격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며,『화엄경』의 유통이 성행하였다. 고려불교의 신앙의례도 통합성의 화엄의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세종 32년(1450)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사리영응기』에 “찬(贊):법신‧보신‧화신‧약사‧미타‧삼승‧팔부” 등의 글을 실어서 통합성의 화엄의례의 의범을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간행한 여러 종류의『의식집』에도 통합성의 화엄의례가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의식집』의 신앙의례는 근대를 거쳐 오늘에 계승되었다.


조계종의 신앙의례는 통합성의 의례이다. 대승불교의 기반에서 성립된 많은 교의체계를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교의체계의 의례뿐 아니라 달마선종의 조사예참의례까지 포함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체계성도 없이 여러 요소가 혼합된 통불교적이며 종합불교적인 의례는 아니다.

조계종의 신앙의례는 동아시아 북방불교권에서 성립된 교의와 종지를 통합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나, 화엄교의와 화엄종지가 중심을 이루는 의례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전통신앙의례는 ‘통합성의 화엄의례’ 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례의 의범은 조선시대 및 근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찍이 신라시대에 수립된 역사적 전통이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신라시대에 수립된 통합성의 화엄의례를 신앙전통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한국불교의 독특한 정체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