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부처님의 십대제자(2) - 다문제일 아난존자

難勝 2008. 2. 9. 20:55

부처님의 십대제자 [아난존자]


절에 가면 큰스님의 시봉을 드는 스님들이 게십니다. 주로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승들이 시봉일을 도맡습니다. 큰스님의 수족이 돼 가르침을 곁에서 접하는 시간은 교리공부 이상으로더없이 귀한 시간이 되고 있는데요. 큰스님에 대한 존경으로 오래도록 스님 곁에서 스님이열반에 드실 때까지 충실한 사자노릇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비서관과매니져의 역활이 시봉드는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 한 분인 아난존자 역시 부처님에게 더없이 훌륭한 시자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난 존자는 마하가섭 존자를 따라서 부처님이 55세 되시던 해에 출가를 합니다. 그리곤 25년 세월을 모두 부처님 시봉드는 일로 바쳤습니다.


쿠시나가라의 사라 나무 아래에 부처님께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도록 자리를 깔았던 이도 아난 존자였고, 말라족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열반을 알렸던 이도 바로 아난 존자였습니다.


부처님 열반 당시에 그는 성자의 지위에 이르지 못해 슬픔이 더 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열반 모습을 담는 그림 가운데 아난을 찾는 일은 쉽습니다. 스님과 불자들 사이에서 가장 슬프게 애달퍼하는 이, 그가 바로 아난 존자이기 때문입니다.


범어로 아난다(ananda), 혹은 아난이라고 부릅니다.

아난 존자가 사자가 되는 데에도 곡절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서 역활을 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때가 부처님이 55세 되던 때라고 전하는데요 그 이전까지 부처님은 시자없이 생활하셨던 겁니다. 장로들이 차례로 그 역활을 맡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누구에게 일을 맡길 것인가를 생각하던 부처님께서 마침내 아난 존자에게 시자일을 맡기십니다. 명예롭긴 하지만 아난은 그 "엄청난" 시봉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약하기도 했거니와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켰기 때문이지요. 고심하던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 세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새것이고 헌것이고 부처님을 위해 만들어진 의복을 받지 않는다. 둘째, 부처님을 위한식사대접을 받지 않는다. 셋째, 비공식적으로 부처님과 만나지 않겠다. 등이 그것입니다.


설령 시봉을 들더라도 나머지 제자들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시자라는 특권을 남용하지 않겠다는 전제조건만 보더라도 아난 존자의성품이 얼마나 강직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담을 담은 <수행본가경>에 아주 재미있는 사연이 전합니다. 연등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부처님의 전생모습인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연꽃을 공양올리면서 머리를

풀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연등 부처님께서 선혜동자를 향해 이런 수기를 주시면서 찬탄하셨습니다.


"장하도다. 선혜동자여, 이 같은 공덕으로 그대는 백겁 후에 부처님이 되리니 명호는 석가모니요, 아버지 이름은 정반왕이며 어머니의 이름은 마야이니라.........아들의 이름은 라후라며, 시자의 이름은 아난이요........"


이미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시봉을 들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난다라는 이름보다 중국식의 번역인 아난(阿難)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아난다는 환희. 경희. 무염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단정하고 청정하고 그래서 밝은 거울과 같은 존재였던 아난다였기에 많은 여성들이 아난다를 흠모합니다. 그 이유로 부처님께선 아난 존자에게 특별히 어깨를 가리는 법의를 입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곤 사람들의 마음과 눈에 환희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아난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더러는 정반왕의 아우인 곡반왕이 아들을 낳자 정반왕이 크게 기뻐하며, "오늘이야말로 환희의 날이다"라면 이름을 아난으로 지었다고도 하죠.


그는 부처님 곁에서 결코 게으르거나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그림자처럼 충실하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런 아난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도 "과거 부처님의 제자는 말씀을 들은 다음 비로소 알았으나 아난 존자는 내가 눈을 들면 이내 내 뜻을 알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 입니다. 눈만 마주쳐도 그 뜻을 읽어내는 스승과 시자 사이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한 번은 아난 존자가 등창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대의 최고의 의사인 지바카에게 치료를 부탁합니다. 의사 지바카는 너무 아픈 수술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에 아난 존자가 설법에 열중해 있는 시간이 아니고는 수술이 곤란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튿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아난 존자의 등뒤에서 종기를 째는 대수술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에 부처님께서 고통이 없었느냐고 물어오시자, 아난존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당신의 설법을 들을 때에는 온몸이 부서진다 해도 조금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아난 존자가 해낸 많은 업적 중에 손꼽히는 점이라면 경전결집에 대한 공적과 여성(최초의비구니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도운 일일 겁니다.


그는 때를 알고 사물을 분명히 했으며, 가르침을 언제나 다 외웠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돼 "사람과 하늘들이 절을 하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로 마무리하는 경전, 여기서의 나란 아난 존자를 말합니다. 경전을 편집하는 대작불사 중에 대부

분의 경문은 모두 아난다의 기억에서 구전된 것들입니다. 부처님 곁에 그리자처럼 함께 생활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문(多聞)제일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경전결집에 참여하기 전에 아난 존자의 참여여부가 문제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결집에 참여하는 5백 분의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난 존자는 아직 아라한에는 도달하지 못한, 말하자면 자격미달인 셈이었지요. 아난 존자를 경전결집에참여시키는가의 여부를 놓고 주저하던 마하가섭 존자는 고심 끝에 아난 존자를 예외로 참석시키기로 합니다. "예외"라는 꼬리표를 달고 경전결집에 참여하는 아난 존자로서는 얼마나많은 책임감을 느껴야 했겠습니까. 그 날 이후로 아난 존자는 정진을 쉼없이 합니다. 그 결과 결집 하루 전날 몰록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지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전에 없는 맑은 마음으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되는 수많은 경전을 암송하기에 이릅니다.


경전에는 이 거룩한 대결집의 장면이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난이 청을 받아 법죄에 올라 부처님 말씀을 암송했는데 막힘이 없었으며, 참석한 5백 대중의 기억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때 5백 대중은 부처님이 다시 살아오신 것인지 다른세계의 부처님이 오신것인지 아난이 성불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부처님 설법 당시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었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 낼 때면 나이 많은 장로들이 그만 엎드려서 모두 울어 버렸다고 전합니다.


부처님을 스물다섯 해 동안 시봉든 그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시자로서의 무수한 임무에 분주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너무 많은 가르침을 접했기 때문에 아닐까요. 부처님을 아버님처럼 존경하고 있음이 경전 속에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인격에 의존하다 보니 가르침의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체계화하지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자는 "너무 잘 생긴 탓"이라고도 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기억한 다문제일아난 존자로 인하여 오늘 우리 곁에 2천 5백년 전 부처님 가르침이 "생생하게" 전하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요.


경전결집 당시 아난 존자의 이야기 가운데 "만약 교단이 바란다면 세세한 계율의 항목은 없애도 좋다"라고 한 대목은 아주 중요한 발언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항목의 문장에 얽매여 경직되게 운영하기보다 융통성있는 자발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아난 존자는 정반왕(부처님의 부친)의 아우인 감로반왕의 아들입니다. 부처님과는 사촌인

셈이지요. 그의 용모에 관해서는 "단정하고 얼굴은 둥근 달과 같았으며 눈은 청련화와 같고그 몸은 광정하여 명경과 같았다"고 전합니다.


흔히 용모가 수려하면 성품이 그에 못 미친다든가, 성품이 뛰어나면 용모가 부족한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아난 존자는 용모가 수려한데다가 성품 또한 온화하며 한치도 부족함이 없었다 합니다. 왠지 불평등한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아난 존자이다보니 여러번 여난(여난)을 겪어야 했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이 마탕가의 일화입니다. 어는 여름날 아난 존자가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랐습니다. 마침 우물 곁에서 한 아가씨가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천시받던 마탕가라는 종족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워낙 신분제가 강하던 당시로서는 천시받는 계급에게 물을 얻어마시는 일조차도 금기시되고 있었습니다.


아난 존자가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묻자 마탕가의 아가씨 푸라쿠리티는 깜짝 놀라며 천민이라 물을 줄 수 없다고 답합니다. 그때 아난은 "저는 부처님의 제자라서 신분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물 한잔 마시게 해주십시오."라고 정중하게 부탁해 물을 얻어 마시게 됩니다.


아난의 자애로운 모습에 이끌린 그 처년는 이내 그리움을 품게 되고 마침내 오늘날로 말하

면 상사병에 걸려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아난 존자가 멋지게 잘생긴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천대받던 계급으로서 난생 처음 낮모르는 이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들었던 것이 가슴 설레이는 요인이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마탕가의 아가씨는 주술을 하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아난존자를 곁으로 불러옵니다. 그러나 이내 부처님의 법력에 의해 아난은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움이 사무쳤기 때문일까요? 거리에서 탁발하는 부처님 제자 사이에서 아난 존자를 발견한 마탕가의 여인은 "이분이 제 남편입니다"를외치며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난을 통해 들으신 부처님께선 친히 여인을부르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부처님이 들려주신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러주고있습니다.


"그대는 아난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더냐?"

"부처님, 전 아난 존자의 눈 귀 코 입 목소리 그 모든 것을 다 사랑합니다."

"눈속에 눈물이, 콧속에 콧물이, 귀속에 귀지가 그리고 몸에는 오줌과 똥 등 더러운 것이 가득차 있다. 그런 것이 그렇게도 아름답더냐?"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처님 가르침에 푸라쿠리티는 참회를 하고 진실하 부처님 제자가 돼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천대받던 부족이 떠준 물을 정중히 받아 마신 아난 존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다시 인간평등의 가르침을 현실 속에 실현한 종교가 바로 불교임을 엿보게 됩니다. 아난은 사랑하던 천민출신의 그 여인이 아라한파를 얻은 사실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 가장 많은 세월을 보내신 기원정사 안에는 현재 "아난 존자의 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이 마실 물을 길었다고 전하는 곳입니다. 부처님이 마신 물터면 부처님의 우물이라고 해도 될 텐데 아난의 우물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부처님께 수시로 물공양을 올리던 시자 아난 존자를 기리기 위한 사람들의 갸륵한 마음이 모아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도반들이 세상을 뜬 뒤에도 120세까지 살아 쉼없이 가르침을 폅니다. 아난 존자가 열반에 들 때 행여 그의 사리 때문에 다툼이 있을 것을 예상해 갠지스강의 가운데 지역에 가입멸했습니다. 그리고 사리를 갠지스강 북쪽과 남쪽 사람들에게 똑같이 둘로 나누어 주도록했습니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 보면 마투라 지역에도 아난의 탑이 있다고 기록하고있는데요. 그의 유골은 왕사성 죽림정사 옆에 안치했다고 전합니다.


오늘날 인도에는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 있는 부처님의 열반당 뒤에 아난 존자의 탑이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을 기리는 후세 사람들의 마음이 열반당 뒤를 지키는 탑으로 모셔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밀교에서는 그를 태장계만다라의 나한 중에 열거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왼쪽 다섯번째 자리에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