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때 철수와 영자, 순이라는 이름이 흔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영자라는 이름은 70년대 말에는 영화 주인공으로 유명했군요. 80년대 중반에는 큰손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만 했습니다.
아마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도 "가섭"이란 이름이 그처럼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루벨라 가섭, 니디 가섭, 가야 가섭 등의 가섭 삼형제와 구별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10대제자인 가섭은 마하가섭이라고 구분지어 부릅니다. "마하란 크다(大), 많다(多), 뛰어나다(勝)의 의미를 지닌 범어입니다. 그 때문에 "대가섭"이라고도 부르지요. 훌륭한 가섭, 뛰어난가섭 등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범어 이름은 마하카샤파 입니다.
출가 전 그는 인도 왕사성 부근의 마하바라촌에 살았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핍팔리, 그의 부모는 오랜 세월 자녀가 없자 나무신(木神)에게 기원해 그를 얻게 됩니다. 핍팔리는 나면서부터 행동 하나하나가 어느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성장하면서 독신을 고수한 것부터 그렇습니다. 나이 많은 부모는 집안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해 결혼을 권했지만 막무가내였지요.
그러나 효심이 깊었던 그는 부모의 간청을 쉽게 물리지 못했습니다. 고심 끝에 아름다운 금빛 여인상을 만들어 보이며 이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있으면 결혼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조각품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부모는 그 조각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마침내 찾아옵니다. 그런 부모의 노력 끝에 결혼식을 올리긴 했지만, 핍팔리 부부는 마치 <삼국유사>속에 등장하는 광덕과 광덕의 처마냥 서로 순결한 채로 12년을 살았습니다. 가정생활이 고스란히수행생활이었던 것이죠.
양친이 세상을 뜨자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자른 채 발우 하나만 들고 만류하는 이웃의 손을 뿌리치며 출가의 길을 떠납니다. 네 거리에 이르자 두 사람은 각각 오른쪽 왼쪽으로 헤어졌다고 하지요. 사사로운 정이 수행에 방해될 것을 이미 예견했던가 봅니다. 핍팔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섭이란 법명의 스님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죠. 그의 아내 역시 비구니교단의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녀 역시 불제자로서의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어머니에게 열명의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열명 모두에게 한결같기 마련입니다. 아마 그와 같은 사랑은 부처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부처님에게 열명의 제자들은 더도 덜도 아니게 똑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이었을 테지요.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조금 더 생각한 제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추측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마하가섭존자는 영순위에 속할 정도로 부처님의 두터운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부처님의 제자 사랑에 관한 한두 가지 일화로 우열을 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하가섭 존자에게는 부처님의 사랑에 얽힌 세 가지 일화가 전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이 일화를 두고 흔히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하지요.
그 첫째가 자리의 나눔(多子塔前分半座)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만연한 일이긴 하지만 왜 허름한 옷차림을 하면 관공서 입구에서부터몇 차레씩 검문받기 일쑤잖습니까? 고급스런 옷을 걸치면 경비실을 통과할 때 경비의 인사각도가 달라지는 풍토 말입니다. 걸친 옷으로 평가되는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걸친 사람의내면을 꿰둟어 볼 줄 아는 눈이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주위의 수행자들이 먼지투성이의 누더기 옷을 걸친 가섭 존자를 가리키며 비웃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 설법 도중에 가섭 존자를 부릅니다.그러고는 "나는 그대의 스승이고 그대는 나의 제자이니 여기 함께 앉자"며 자리의 절반을 내주십니다.
부처님과 나란히 설법의 자리에 앉은 마하가섭 존자, 어떻습니까. 누더기 옷차림과 같은 겉모습으로 인물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과 가섭 존자가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른 성자임을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일화입니다.
두번째 사랑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심전심 일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다가 문득 하늘에서 내리는 꽃 한 송이를 집어 대중들에게 보이시지요. 모두 영문을 몰라할 때 가섭 존자만이 빙그레 미솔르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그것 입니다.
그 순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바른 법을 깊이 간직해 둔 바 있으니 이는 곧 열반 묘심이라. 이 미묘한 법문은 문자를 세울 바가 아니요, 교의 테두리 밖에서 따로 전할 바이니 이를 특히 마하가섭 존자에게부촉하노라."
마지막 일화는 부처님 열반 당시의 이야기 입니다.
가섭 존자는 다른 지역에서 포교하던 중에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접합니다. 뒤늦게 제자 5백 명을 이끌고 부처님의 유해 곁으로 달려와 비통해하지요. 그때 부처님께서 관 밖으로 다리를 내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입멸의 순간까지도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신 부처님의 사랑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음직하지 않습니까. 이 일화를 "관 밖에 다리를 보임(槨示雙趺)"이라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이 같은 삼처진심을 깨달음을 얻는 출발점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마하가섭 존자는 불법의 수호와 전수를 위임받은 제자라는 점에서 불교교단사상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가섭은 한평생을 누더기로 살았습니다. 어는 날 부처님이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나무 아래에서 쉬셨습니다. 이때 가섭 존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가사를 접어 부처님의 앉을 자리를 마련해 드립니다. 부처님께서 가사를 어루만져 보시곤 천이 부드럽다고 하시자그는 부처님보다 좋은 옷을 걸치고 있음을 몹시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하가
섭 존자는 자신의 가사를 부처님께 바치고, 부처님의 낡아빠진 누더기 가사를 바꿔입었습니다. 그 뒤로 마하가섭 존자는 누더기 하나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중국불교 이후로 선종에서는 "가사와 발우"인 의발을 부처님 법을 전수받는 상징물로 활용합니다. 후일 부처님 열반 뒤에 마하가섭 존자가 교단을 이끌어 통솔한 것을 보면 말 그대로 부처님의 의발을 물러받은 제자가 된 셈입니다.
일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의 깨끗한 가사를 걸치신 뒤로 교단의 수행자들도 분소
의(분소의 : 더러운 누더기 조각을 꿰맞춰 만든 가사) 대신 깨끗한 옷을 착용하게 됐다고 합니다.
누더기로 한평생을 난 마하가섭 존자, 그를 가리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합니다. 두타행이란 욕심이 적고 의식주 세 가지의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며 항상 엄격한 규율을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더러 행법(行法)제일로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하가섭 존자는 더러운 누더기 조각의 가사를 걸치고, 차별없이 집집마다 탁발해서 하루 한 끼의 식사를 일정하게 하면삼림이나 나무 아래 혹은 묘지 등에만 머무르고 앉을 뿐 결코 눕지 않는 등의 고행을 잘 견디며 전도했다고 전합니다.
이를 두고 불교학자는 욕망을 버리고 금욕한 성자로서, 검소하게 살아간 성자로서 마하가섭존자와 마하트마 간디는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흥미로운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인도다운전통이 그렇게 이어져 흘렀을지 몰르 일입니다.
어느 때던가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벗이여, 이젠 그대도 나이가 들었거늘 언제까지 괴로운 두타행을 할 것인가? 그대는 어떤의미에서 두타행을 하고 있는가?"
그때 마하가섭 존자는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첫째 이 같은 생활방식을 즐겁습니다......,둘째 저의 이 행동은 훗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있을 겁니다."
이때 여러분이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이야기 했을까요?
거룩하신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아끼시는 제자 마하가섭 존자의 대답을 들으시곤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리곤 다음과 같은 긍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 그렇군 벗이여, 그대의 생각대로 사는 게 좋겠군."
부처님께서는 왜 두타행을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일까요? 아마도 고행하는 제자에 대한 염려와 함께 중도의 정신을 잃지 말라는 당부로써 되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자상산 질문에 남들이 고행처럼 여기는 두타행이 즐겁다고 단언하는 가섭의 당당한 대답은 참으로 부럽도록 멋지기만 합니다.
<법화경> 약초품을 보면 부처님께서 마하가섭과 사리불, 가전연, 목건련 존자 등의 네 제자들 앞에서 마하초의 비유를 들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수가품에서 제일 먼저 마하가섭 존자에게 수기를 주십니다.
"나의 제자 마하가섭은 미래세에 바로 3백만 억의 모든 부처님께 봉사하고 공양 존경, 존중찬탄하고 최후신에서 부처가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수기를 받을 수 있던 이유는 그의 근기가 가장 무르익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가 부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부처님 눈에 먼저 띄었기 때문일까요...... .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마하가섭은 교단을 책임지고 관리했습니다. 부처님 열반 이후 교단을 이끌어 가는 최고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것이지요. 부처님이 열반하신 그 해, 여름안거를 마친 뒤 마하가섭은 5백 분의 부처님 제자들을 모아 왕사성 칠엽굴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경전으로 엮었습니다.
서둘러 부처님 가르침을 결집한 것은 순전히 발난타석자라는 스님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부처님의 열반을 애도하고 있을 때 발난타석자만이 빈정거리면서 "이젠 잔소리꾼이 사라졌으니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고 하지요. 이를 본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 법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결집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것인데요. 이 결집은 오늘날 "경전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값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단의 기강확립과 남기신 가르침을 보존하고 널리 전하기 위해서 아난존자가 경을 외고 우바리 존자가 율을 결집한 대불사를 "대결집" 혹은 "제 1 결집"이라고 합니다. 5백 분의 스님이 모였다고 해서 "5백 결집"이라고도 하고, 최고의 상좌들만 모였다고 해서 "상좌 결집"이라고도 하지요.
한 번은 아난 존자가 마하가섭 존자에게 "부처님이 전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하가섭 존자가 "어서 가서 깃대를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 설법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에는 언제나 깃대를 세워서 설법 현장임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깃대를 내리라는 의미는 말로써 가능한 게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선종에서는 이때문에 마하가섭 존자를 선종의 제 1조로 삼고 있습니다. 문자나 언설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정통 조상이라는 것이죠.
"법이라는 법의 본래법은 법도 없고 법이 아닌 것도 없음이니 어찌 한 법 가운데 법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이는 마하가섭 존자가 아난 존자에게 전한 전법게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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