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부처님의 십대제자(7) - 논의제일 가전연 존자

難勝 2008. 2. 16. 09:47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이름이 가장 낯선 인물이 아마 가전연 존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의 이름을 쉽게 마주할 수가 있습니다. 팔리어로는 카타야나(Katyayana)라고 합니다.


마하가전연 존자를 "논리제일"이라고 합니다. 논쟁을 피하라고 하신 부처님이신데 논리에 가장 뛰어난 제자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는 아반타국의 수도였던 웃제니 출신입니다. 아반타국은 중인도 서쪽에 변방에 위치한 나라로, 걸어 걸어 인도땅을 돌며 포교하시 부처님께서도 생전에 찾아가 본 일 없는 그런 오지였던 듯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취타학의 논사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 장차 전륜성왕이 되지 않으면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아시타 선인이 바로 마하가전연의 외삼촌이라고 하죠.


그 역시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서는 논리제일이란 칭호를 듣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아시타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부처님께 귀의하기에 이릅니다.


웃제니의 왕은 부처님을 초청하길 원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떠한 것인지를 직접 알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일곱 명의 가신들을 기원정사에 파견합니다. 그때 파견된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가전연 존자였습니다. 가전연은 부처님을 뵙자마자 그대로 출가해 불제자가 됩니다. 그곳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가전연은 곧바로 귀국해 자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에 전력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유학가서 불교를 배워와 자기 나라에서 펼쳤던 것입니다.


그의 눈부신 교화활동에 관해서는 많은 사연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밋디라는 스님에게 하루는 천인 찾아와 "한밤 현자의 게송"을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전혀 모른다고 하자 천인은 부처님께 여쭈라면서 떠나가 버립니다. 사밋디스님은 부처님을 찾아가 그 게송에 관해서 여쭙니다.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 게송을 일러주셨습니다.


과거를 쫓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진 것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만 현재의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관찰하고

흔들림없이 움직이는 일 없이

잘 간파하여 실천하라

다만 오늘에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라

누가 내일 죽음이 있는 줄 알랴.

참으로 그 사신의 대군과 만나지 않아도 될 리가 없다.

이와 같이 간파하여 열심히

밤낮을 게으리지 않고 노력하는 자

이를 일러 한밤의 현자라고 하는 것이다.


사맛디스님은 듣고 싶었던 게송을 듣는 것에 도취해 부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와 보니 그 문구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궁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맛디스님은 숫기가 없었던지 부끄러움이 많았던가 봅니다. 또다시 의문나는 것을 부처님께 여쭈러 가기가 영 민망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식할수록 용감하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모를 때엔 물어 보는게 최고입니다. 날 어떻게 볼까, 이런 걸 물어 보아도 좋을까. 망설일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 보는 것은 결코 잊혀지지 않습니다. 특히 불자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스님들을 괴롭히지(?)않는다는 점입니다. 궁금한 걸 귀찮도록 묻고 물어야 우리 불교가 발전할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사맛디스님은 가전연 존자를 찾아갑니다. 가전연 존자는 그 스님에게 참으로 자상하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맛디스님이 감격하며 경청했다고 전하는데요. 후일 부처님께서 "가전연 존자의 해석을 다시 접하실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해설했더라도 가전연 존자와 분명 한가지로 말했을 것이다."라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더러 논리제일이니 광설제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해박함으로 해맑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득력있게 이웃들에게 정리해 주는 역활 말입니다.


특히 변방 외진 고향땅에서 포교의 일선에 섰던 그로선 더더욱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는 일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논리제일, 광설제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도 소외된 땅을 일부러 찾아가 포교에 임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낙도를 돌며 포교에 임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미군기지 부근 윤락여성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법을 펴시는 분, 광산촌 광부들에게 마지막 꿈을 심는 스님도 계시지 않던가요 다들 살아 있는 가전연 존자라 할 것입니다.


가전연 존자의 문하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던 소나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승처럼 출강해 사문이 되길 원했지요. 그러나 출가를 하려면 수계의식이 필요하고 수계의식 때에는 열 분의 스님이 입회하는 것이 당시에 기본이었습니다. 계를 주는 계화상과 계받는 취지를 설명하고 알리는 갈마사, 계받는 이의 태도를 지도하는 교수사와 증인으로서의 일곱 명이 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외진 지역에서 열분의 스님을 모시고 수계식을 봉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3년 여의 세월이 흘러서야 소나는 겨우 열 분을 모시고 수계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나는 어느 날 문득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다는 발원을 했습니다. 부처님께 떠나보내며 가전연 존자는 몇 가지를 소나에게 부처님께 여쭤보라고 당부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반타국에 스님의 수는 너무 적습니다. 수계의식을 위해 3년씩 걸려야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변방에서는 완전한 계율을 줄 수 있도록 계사스님의 수를 줄여 주십시오.


아반타국의 토양은 거칠고 소발굽으로 도로가 딱딱해서 한 겹의 신발로는 생활하기가 어럽습니다. 여러 겹의 신발을 신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이지방에서는 목욕을 자주하는 풍습이 있으며 짐승가죽을 깔개로 쓰는 풍습도 있습니다. 이 풍습대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소나는 부처님을 친견한 뒤에 가전연 존자가 일러준대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변방지역에서는 다섯 명의 스님이 계율을 줄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밖의 풍습에 대해서도 그 지역 풍습대로 하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제사를 지내면 우상숭배라고 거부하는 타종교의 실상을 보더라도 2천5백 전에 부처님께서는 얼마나 유연하게 포교에 임하셨는가를 엿보게 됩니다. 그릇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물처럼 그렇게 현실을 끌어안고 운용되는 불교지요. 그 때문에 풍속과 습관이 다른 온갖 것들을 품어 안으면서 불교가 흘러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각기 다른 성격 때문에 교단이 분열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