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간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관포지교"니 "난향지교"와 같은 표현을 쓰지요. 난초의 향기와 같은 우정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롭게 향기로운 우정을 나눈 두 제자가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와목건련 존자가 그들입니다. 둘은 "죽마지우"사이였으며, 부처님의 양팔에 비유되는 인물들이지요.
아무리 가까운 벗이라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게 되면 원치 않아도 서로 권력문제로 다투게 마련이고 마침내 등 돌리는 모습을 흔하게 접할수 있습니다. 5,6공 시절의 권력자들이 그러한 대표적인 모습들이 잖습니까. 그러나 이 두 분 부처님 제자는 마지막까지 그 흔한 다툼없이 서로 화합하며 교단을 이끌어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세상인연을 마치는 일조차 둘은 나란히 함께했으니 예사로운 우정은 결코 아닌 듯 싶습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교단을 이끌어 가야 할 두 중요한 제자들이 연로하신 부처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일은 교단내에 크나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분들의 죽음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큰 나무에서 때로는 가지 몇 개가 먼저 시들어 떨어져 나가는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내 제자 사리불과 목건련은 나보다 먼저 떠났다. 세상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느리라....그러므로 잘 들어라. 그댇르은 언제나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그대들 자신에 의지하여라. 법에 의지하고 다른 것에는 의지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두 제자의 죽음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법의 무상함을 일러주셨으며 "자귀의 법귀의" 법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두 제자를 잃은 뒤에 어느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이런 말씀을 내비치신 적도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깊고 그윽한 사랑의 정이 깃든 말씀인데요.
"사리불과 목건련이 떠난 뒤에 모든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만 같구나. 두 제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임은 쓸쓸하다."
아무런 가식없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아픔과 고독이 읽어지는 대목이지요.
비슷한 가정환경과 교육수준, 그리고 아름다운 우정은 아들을 언제나 함께 있게 했습니다.성장한 뒤에도 둘은 학문과 종교 그리고 인생에 관해 함께 고뇌하며 탐구했지요.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는 출생지와 출가동기 그리고 교단 안에서의 역활과 비중 때문에대부분의 경전에서 늘 언제나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목건련 존자는 흔히들 목련(目蓮) 존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중인도 왕사성 부근 코리타(Kolita)라는 마을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용모가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총명했다고 합니다. 유족한 가정환경 속에서 당시 높은수준의 교육을 두루받으며 자랐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부터 목건련 존자는 열심히 법을 묻고 맹렬하게 수행에 들었습니다. 그 결과 오래지 않아 큰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여러 가지 훌륭한 덕을 갖추게 되지요.
출가 후에는 여러 곳을 만행하며 부처님의 교화를 도왔습니다.
사람들은 목건련 존자를 "신통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신통이란 불가사의하고 무애자재한 함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가 공중을 날기도 하고 땅밑으로 다니기도 했다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신통의 일화에서 붙여진 별칭입니다. 가벼운 걸음으로 어디든 날아가 남을 도왔습니다. 깊고 미묘한 수행을 쌓은 결과 초자연적인 능력에 있어서 교단 안에서 제일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초자연적인 신통력은 초기 교단유지와 전도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통력을 함부로 쓴 것만은 아닙니다. 법회장에 이교도들이 와서 못되게 굴 때에만 곧바로 신통력을 보여 그 장소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항복시키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말년에 숱하게 이교도의 박해를 받았야 했습니다.
한 번은 코살라국의 비두다바왕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목건련 존자가 신통력으로카필라성에 철로 된 제방을 쌓으려 했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석가족의 멸망은업의 과보라서 그 어떠한 물리적 수단을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잡아함경> 16권에는 목건련 존자가 하늘나라의 제석천에게 신통을 나타내 부처님의 참된가르침을 전해 주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존재의 무상함을 알아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해탈을 구하는 법문을 들은 제석천은 그 스스로 부처님의 법문을 이해했다고 여기며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를 지켜보던 목건련 존자는 과연 제석천이 부처님의 뜻을 이해한 것일까를 궁금히 여겼고, 그래서 제석천을 시험해 봅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여전히 자신의 영광과 공덕에 사로잡혀 있을 뿐 부처님의 본뜻을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건련 존자는 그의 발가락을 하나로 제석천의 호화로운 궁전을 눌러 진동시켜 버립니다. 그리하여 제석천의 교만과 헛된 집착을 뉘우치게 만들지요. 신통제일의 목건련 존자지만 그에 앞서 인품이 견실하고 용감한 것으로여러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현실성이 있는가의 여부보다는 그의 초인적인 신통력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일화로 접하는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목건련 존자는 기원정사의 대강당 건립 때엔 감독을 맡았고 데바닷타가 부처님에 대항했을때엔 이와 맞섰습니다.
연화라는 윤락 여성을 교화해 불자가 되게 했으며, 특히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효도로써 지성을 다했다는 미담은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일화기도 하지요. 효심하면 목건련 존자일 만큼 그의 효성은 오래 된 한국 영화 <지옥문>이니 <목련구모(目蓮救母)>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바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남의 험담을 잘해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이를 자신의 신통력으로 지옥에 간 어머니를 본 목건련 존자는 모든 고난을 겪어가면서 서둘러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를 천도하기에 이르지요. 이때 부처님의 도움이란 훌륭한 수행을 쌓은 스님들을 청해 여름안거를 마치는 7월 보름날 공양을 올리고 함께 모여 법문을 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7월 보름이면 수행자들를 공경하고 조상을 천도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을 일깨우는 큰 행사가 절마다 봉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우란분회(盂蘭盆會)"라고 하면 이 날을 우란분절이라고 부릅니다. 목건련 존자의 효심을 닮아 돌아가신 선조들을 천도하는날로 우리 삶 속에 정착한 것이죠. 말하자면 불교의 어버이날이라고나 할까요.
목건련 존자는 왕사성에서 외도들에 의해 몰매를 맞아 순교하고 맙니다. 그가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죽어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도반 사라불 존자가 단걸음에 달려옵니다.
"목건련 존자여, 신통제일이라 불릴 정도로 법력을 갖고 있는 그대가 왜 저들의 박해를 물리치지 않았는가?"
"사리불 존자여, 이것은 내 자신의 전생 과보일 뿐이네, 지금의 내 고통은 내가 전생에 부모를 해쳤던 악업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네."
그러면서 목건련 존자는 털끌만큼도 상대를 원망치 않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열반을 얻게 되었음을 기뻐했다고 한다.
뒤에 부처님께서는 목건련 존자가 전생에 아내에게 속아서 부모를 숲속에 버려 살해했던 과보가 있었다고 들러주셨습니다. 그 과보 때문에 오랜 세월 지옥에서 고통받은 뒤에 이 세상에 나와 깨달음을 얻는 아라한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던 악업 때문에 박해받고 최후를맞고 말았다는 것이죠. 신통력이 인간의 생사 일체를 지배하는 초능력은 결코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습니다. 더불어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의 경지도 인과관계에서만은 벗어날수 없음을 일러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저마다가 오늘도 얽혀 있을 저마다의 "니과관계"를 거울처럼 비춰 보았으면 합니다.
대목건련 존자의 참사는 교단에게 큰 손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죽림정사의 문 앞에 탑을 세우고 그의 교단을 위한 업적과 덕을 기념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의연하게 숨진 목건련 존자의 거룩한 순교의 의미는 오늘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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