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반야심경 강의(7) - 부증불감(不增不減)

難勝 2008. 5. 19. 20:59

부증불감(不增不減):허공의 본 바탕은 아득히 멀고 먼 이 세계 생기기 전의 몸이니 더 할래야 더할 수 없으며, 없앨래야 없앨 수 없고 부숴볼래야 부숴볼수 없으며 성인이라 하여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라 하여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한결같아 움직이지 않으니, 모자람도 없거니 남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조사스님의 게송에

‘칭찬도 할 수 없고 비방도 할 수 없네

본체는 허공처럼 끝도 갓도 없어라.

삼승의 보살들은 믿고서도 의심않고

어리석은 범부들은 듣고서도 의심하네’

알겠는가?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은 이름을 붙일 수도 늘어나는 것도 줄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 입니다.

제법의 실상은 항상 적적(寂寂)하고 여여(如如)할 뿐, 다른 모습이 있지 않습니다. 범부의 망집(妄執)과 편견이 그것을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멸(生滅)․구정(垢淨)․증감(增減)을 중생의 각위(各位)에 맞춰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도전(道前)의 凡位입니다. 이를테면 범부는 나고 죽고 하는 流轉을 오래도록 되풀이하는데, 이것은 生滅位입니다. 참된 공은 이것을 떠났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②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도중(道中)의 보살위(菩薩位)입니다. 보살은 장염(障染)을 다 없애지는 못하였어도, 정행(淨行)을 이미 다 닦았기 때문에 구정위(垢淨位)라 합니다. 참된 공은 이것을 떠났으므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③부증불감(不增不減)이란 도후(道後)의 불과위(佛果位)입니다. 생사혹장(生死惑障)을 옛날에는 다 없애지 못 하였으나, 지금은 이를 다 없앴고, 만덕(萬德)을 닦아서 나타나게 하는 일이 옛날에는 원만하지 못하더니 지금은 원만해졌음으로, 이것이 증(增)입니다. 참된 공은 이것도 또한 떠나는 것이니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부증불감(不增不減)은 육불법(六不法)이라고 하여 《반야심경》의 백미(百味)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현상이 본질에 있어서도 다만 변화하고 변천할 뿐,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있던 것이 어느 날 문득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현대과학에서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반야의 사상이 현상보다는 현상의 존재가치와 존재이유를 설명함에 있어서 공이라는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공이 현상에 소속된 공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현상에 속한 공, 온갖 법에 속한 공이야 물론 생멸하지도 않고 증감도 없으며 垢淨이 없겠지만 온갖 현상의 법 그 자체도 생멸과 垢淨과 증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놓고 흔히 추하다, 아름답다, 밉다, 곱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보는 이의 주관적인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비싼 보석일지라도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는 그저 쓸모 없는 돌맹이에 지나지 않듯이 가치 기준은 각각 다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육불법의 가르침은 중도를 표방하며, 어떤 것을 집착하게 되면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생에 집착을 하므로 생이 아니라고 했고, 멸에 집착하므로 멸도 아니라 했습니다. 더러움을 집착하므로 더러운게 아니라고 했고, 깨끗함에 집착을 하므로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꾸 불어나는 것에 집착을 하므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라 했고, 줄어드는 것에 집착을 하므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도란 극단적인 양쪽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린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정신적인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색․수․상․행․식에 집착하여 공을 보지 못해도 중도가 아니요, 공에만 집착해서 색․수․상․행․식을 보지 못해도 중도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집착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니 미움이니, 색이니 공이니 하는 생각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의 가르침이고 六不法의 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본질적인 모습을 논할 때 바닷물에 비유를 듭니다. 수 없는 강물과 바닷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거기에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바닷물은 강물이 흘러 들어가면 늘어 나는 것 같지만 그대로입니다. 들어가는 양만큼 증발하고, 증발한 수증기는 다시 비가 되어 강물이 되고, 강물은 흘러 다시 바다로 들어가고 부증불감입니다.

인도의 최고의 성전《리그 베다》에 “오직 하나인 것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부르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직 하나인 그 참 모습을 밝히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인 것, 한결같은 그 모습에 증감(增減)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단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이것이 검다고도 하고 희다고도 할뿐입니다.

이렇듯 일반적인 인식으로서 생멸에 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 면만을 확대 해석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태어남의 기쁨만을 강조한다든지, 헤어짐을 허무하다고만 강조를 한다든지 하는 부분입니다. 좀더 한 차원 높은 경지에서 생멸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단지 인연(因緣)의 화합과 소멸일 뿐입니다.

범부는 단지 새롭게 태어남을 기뻐할 뿐 그 소멸의 아픔을 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헤어짐의 아픔만 되씹을 뿐, 새로운 만남의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을 단견(斷見), 상견(常見)이라 합니다. 단견(斷見)이란 모든 것을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요, 상견(常見)은 모든 것은 언제나 있다고 보는 고집하는 것입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우리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한 것처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시구의 뜻이 이와 상통합니다. 보다 높은, 보다 깊은 관조(觀照)의 안목에서 볼 때 생멸(生滅)은 현상일 뿐입니다. 본질, 그것은 다만 공(空)일 뿐입니다.

강설(講說): '심경'의 가장 중요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입니다. 空이라 하여도 그 空은 ‘般若의 空’으로 有(存在)에 대한 無(非存在)라는, 그런 단순한 空의 의미가 아님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형상 있는 물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 없는 정신이 모여서 된 이 세계의 '실상' 즉,'공의 상'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의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상은' 했는데 '이 모든 법'이란, 물질 세계와 정신세계와 물질과 정신과의 인연 관계 즉, 세상의 모든 법칙을 통 털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상'이라 하신 여기의 '공'도 반야의 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색을 곧 공이라고 보면 대지를 이루고 공을 곧 색이라고 보면은 대혜를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지(大智)'는 '대자(大慈)'를 말함이요, '대혜(大慧)'는 '대비(大悲)'를 말함입니다. 즉 대자비를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 지혜도 자비도 함께 '공'이라고 하는 모태에서 생겨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상은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하느니라.'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와 부처님의 자비를 말씀함과 동시에, 그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영원불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새삼스럽게 생기는 것도 아니오, 멸하는 것도 아니오, 더럽혀지는 것도 아니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요, 늘어가는 것도 아니며, 줄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햇빛이 우주 만물을 비칠 때에 어느 곳이고 아니 비치는 곳이 없습니다. 땅위의 산천초목, 바다나 집이나 들이나, 더러운 곳이나 깨끗한 곳이나, 낮은 곳이나 높은 곳이나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비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곳이라고 해서 그 더러운 것이 햇빛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곳이라 해서 햇빛을 더 아름답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떠한 것이라도 이 햇빛에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햇빛은 언제나 오로지 한결 같아서, 높거나 얕거나,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차별 없이 평등적으로 우주 만물을 비쳐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불성도 평등합니다. 여기에 평등적 차별이 스스로 생하게 되니 즉, 같은 땅 위에 나는 초목에도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있으며, 큰 풀과 작은 풀이 있고, 가지가지의 이름으로 가지가지의 모습과 가지가지의 색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결 같은 땅이요, 똑 같은 비와 햇빛을 동시에 받아들이건만 여기에 차별이 자연으로 생기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중생의 세계에도 부처님과 우리 중생과 똑 같은 불성을 가지고, 똑 같은 진리 속에서 살고 있건만, 우리는 범부 중생이요, 세존은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같은 시절에 같은 선생에게 같은 것을 배우고도 능숙한 사람과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생기는 것은, 그 본질은 같건만 그것을 하는 사람의 노력과 전생 업보 인연 관계입니다. 해를 다시 예로 들어보면, 맑은 날과 흐린 날의 해는 변함이 없습니다. 구름이 끼면 흐리게 되듯이 구름은 마치 중생의 미혹된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 미혹된 마음이 햇빛과 같은 밝은 불성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야의 지혜를 닦아서 한 겹 한 겹 미혹의 구름을 벗겨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