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9)-걸림 없는 삶
본문: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해석(解釋):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마음에 거리낄 것 없고, 거리낄 것 없는 까닭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으며, 전도된 몽상을 멀리 벗어나 마침내 열반에 도달하느니라.
강설(講說): 지금까지 '무소득' 즉, 소득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무소득의 경지는 다시 말하자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돈시켜 놓는 것입니다. '순진무구'한 마음의 상태가 즉 무소득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무소득의 마음이라야 비로소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커다란 소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허왕실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음식 초대를 받아 갈 때, 만약 뱃속이 가득하면 아무리 맛난 음식일지라도 맛있는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빈속으로 갔을 때는 그리 대단치 않은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맛없는 음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소득으로서 비로써 소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 우리들의 뱃속을 텅 비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체는 공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머리 속과 뱃속을 깨끗이 비게 한 것입니다. '있는 듯 없는 물 속의 달'입니다. 인연으로 해서 생겨난 것은 모두가 물 속의 달과 같습니다. 있는 듯 보이면서도 실상은 없는 것이라고 지금까지는 일체를 부정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무소득의 세계'까지 우리들은 서로 이끌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배고픈 사람 앞에 놓인 맛난 음식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맛난 음식이 하나 하나가 다 맛있고 자양분이 되어서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드릴 것은 '보리살타' 즉,'보살'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대승불교'라 함은 이 '보살의 종교'이므로, 이 보살의 뜻을 잘 모르게 되면 대승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살이라는 것을 이 심경에는 보리살타라고 했는데 이것은 보살이라는 이름을 더 세밀하게 부른 것으로, 예로부터 이것을 번역해서 각유정(覺有情)이라고 합니다. 각유정이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눈뜬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이 눈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눈떠 주게 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보살이란 '자각'하려고 하는 사람이며, 자각하도록 하려는 사람입니다.
'사람 많은 사람 속에 사람이 없도다. 사람은 사람이 되라. 사람은 사람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인간은 많다. 그러나 참으로 눈떠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실로 '사람이 없구나'하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옛날 희랍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 십자가로에 서서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옆을 지나가던 제자 한 사람이 '선생께서는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무엇을 떨어뜨렸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제자에게 말하기를 '사람을 찾고 있다네' '사람이라니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 사람이 아니라네'
이와 같은 얘기가 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아뭏든 소크라테스쯤 되면 그만한 말은 했을 법도 합니다. 참으로 '사람 많은 속에 사람이 없도다'하듯이 우리들은 스스로가 그 구하는 바의 사람이 되어야 겠으며, 동시에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 구하는 바의 사람으로 만들어야합니다.
교육의 목적하는 바 이상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불교의 목적 역시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그러한 사람은 아닙니다. 월급을 많이 받고, 지위를 얻는 그러한 현실적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스스로 용감히 참다운 인간의 길을 걷는 것과 동시에, 남에게도 또한 그 길을 걷도록 하고 싶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이 되라''사람은 사람이 되게 하라'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대승적입니다. 자기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니고 '함께 가지 않으려나'하고, 손을 서로 잡고 가는 것이니, 소승의 입장과는 대단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이란 마음이 큰사람입니다. 도량이 큰 사람입니다.
작은 이기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언제나 커다란 사회를 돌이켜 보며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보살입니다. '중생의 병은 번뇌에서 생기고,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다'고 경문에 씌어 있습니다. 그러한 '대비의 병'을 가지는 것이 즉 보살입니다. 이기적인 번뇌의 병과 이타적인 대비의 병, 거기에 보통 사람과 보살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범부와 보살과의 구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에 못 박힌 기독(크리스트)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의 죄 값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렸다하면, 그 기독의 마음이야말로 곧 보살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그가, 그 십자가를 걸머지게 한 그 사람들의 죄를 구해 주려고 오히려 신에게 기도 올리는 그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거룩하고도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들은 타종교라고 해서 쓸데없이 이것을 못 본체 하거나, 배격시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의 이름으로나, 보살의 이름으로나 그를 찬양하고 우러러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보살의 생활, 즉 참다운 인간생활의 이상을 네 가지 형식에 의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4섭법'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섭(攝)이란 '섭수'란 뜻으로,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보살의 대도에 들도록 오묘한 네 가지의 방편을 쓰는 것이 '사섭법'입니다.
네 가지 방편이란, '보시'와 '애어'와 '이행'과 '동사'입니다. 보시란, 말할 것도 없이 일체의 공덕을 아낌없이 주어서 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애어란, 자애가 깃든 말을 가지고 남에게 대하는 것입니다. 이행이란, 묘한 방편을 써서, 남의 생명의 존엄을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동사란,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일을 이해하고 그것을 협조해 주는 것입니다. 화복을 나누고 고락을 같이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경(經)에서 이와 같이 보살도로서 이 네 가지 방법을 설해 놓으셨는데, 이 네 가지 방법의 근본은 결국 보시바라밀입니다. 즉 탐욕의 마음을 떠난 자비의 마음을 행한다면 보살의 길입니다.
또 경에 '불쌍히 여기고 끼쳐 주는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처님의 마음이 또한 곧 보살의 마음인 것입니다. 보살행이라고 해서 6도 즉, 6바라밀이라는 것이 설해 있습니다. 이 6바라밀의 처음 행이 보시입니다. 이 보시의 행위가 모태가 되어서 다른 다섯 가지의 승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다의 그 바라밀로서, 이미 설한 바와 같이 그것은 '피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데, 여섯 가지의 행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 6바라밀 즉, 6도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그것입니다.
보시란 탐욕의 마음을 깨뜨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보시는 크게 물질적인 보시, 진리의 보시, 편안하게 해주는 보시가 있습니다. 보시는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포용하는 것도 일종의 보시입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두루 포용하는 덕행을 말합니다. 진정한 보시는 나눔을 말합니다. 보시에 대한 공덕은 이렇습니다.
“조금을 베풀 때
조금 얻고
모두를 베풀 때
모두를 얻는다.”
지계란, 올바른 규칙생활을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지계바라밀은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바라밀입니다. 오계, 십계, 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가 있고, 출가계에 250계와 348계가 있습니다.
인욕은, 참고 견디는 마음, 즉 겸손한 마음씨입니다. 교만한 마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그렇다고 비굴한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겸양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은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아 내는 것이 진정한 인욕 바라밀입니다.
정진은, 열심히 힘쓰는 것으로 온 생명을 바쳐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진바라밀은 노력이란 뜻입니다. 身精進은 육체적으로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닦아 가는 것을 말하고, 心精進은 정신적으로 인욕과 선정과 지혜를 닦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선정과 지혜의 다섯가지 보살행을 실천하여 생사의 차안에서 해탈의 열반의 평화로운 피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선정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고요히 하는 것입니다. 명경지수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선정바라밀은 세간 선정은 慈悲喜捨의 마음입니다. 자애로운 마음, 연민의 마음, 기뻐하는 마음, 평등의 마음입니다. 출세간의 선정은 삼매의 기쁨입니다. 선(禪)에는 조사선과 간화선, 묵조선이니 염불선의 수행 방법은 다르지만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선정이라는 수행법입니다.
지혜란, 즉 반야의 지혜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앞의 다섯가지는 복덕바라밀이고, 반야바라밀은 지혜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 수행에 의해 무여열반(無余涅槃)에 들어가는 지혜가 있습니다. 禪家에 不立文字는 문자와 언어의 세계를 통해 완전한 지식을 습득하고, 마침내 그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즉, 보살행은 이 6도의 행위를 떠나서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려 두어야 할 것은, 처음에 반야의 지혜야말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유일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또 보시가 육도(六度)의 모태가 됩니다. 보시야말로 6바라밀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느 쪽이 진실한 것인가 하고 의심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설명하면 그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불교에 있어서의 지혜와 자비는 하나의 안과 밖인 것뿐이니, 곧 둘이면서 또한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에 대해서 두 가지로 보는 견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보시라고 하는 것은 즉 자비심입니다. 자비가 또한 보시입니다. 참다운 보시는 지혜의 눈이 뜨이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비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닌 반드시 올바른 비판과, 엄숙한 판단과, 틀림없는 인식, 즉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육도(六度)의 근본, 즉 피안으로 건너가는 근본 방법이 보시이며, 반야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드러운 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야말로 참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마음의 모양은, 과연 저 법당에 모셔 놓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보살상과 꼭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종교적 반성을 할 수 있을 때,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구애됨도, 또한 걸림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보살의 길이란, 무애(無碍)의 길입니다. 아무런 걸림이 없는 길입니다.
'마음에 가에(罣碍)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말함입니다. '가(罣)'라고 하는 글자는, 그물 망자와 같은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그물을 말함이요, '애(碍)'라 함은 장애물이라는 그 애자니, 걸리는 것 즉, 방해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범어의 원전에는 '가애(罣碍)가 없다'고 하는 것을 '걸림이 없이 움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것에도 구속당함이 없이, 잡히지도 않고,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즉, '가애가 없음' 입니다.
금전을 탐하고, 명예를 구하고, 권세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가애(罣碍)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금전이라고 하는 그물, 명예라고 하는 그물, 권력이라고 하는 그물에 걸려서, 아무래도 무애(無碍)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무애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걸림이 없이,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구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 또 '심경'에 '가애가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포란 무엇을 겁내는 것입니다. 무섭다 하는 마음입니다. 즉 불안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근심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아무런 무서움도, 근심 걱정도 없는 것이 곧,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경(經)에 '무외시(無畏施)'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무외를 보시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부처님을 두고 이름이니, '畏'라는 것은 겁난다는 뜻입니다. 자비 그 자체이신 부처님께서는 한없는 자애의 손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니, 우리들은 아무런 불안도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시무외(施無畏)'라 함은 즉, '무외를 끼쳐 주신다' 즉, '두려움 없이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끼쳐주신다 함은, 먼저 말씀드린 '보시'를 말함입니다. 범어로 하자면 '다-나'라 합니다. 여기서 신자들은 재물을 절에 바쳐 재물 보시를 하게끔 되어 있고, 이에 대해 절에서는 신도들에게 '법시(法施)'라 해서 법을 설해서 끼쳐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도된 몽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이 되느니라'고 한 말씀인데, 일반으로 여기에 '일체'라는 것이 들어갑니다. '일체가 전도됨'이라고 하는 데 이 '전도(顚倒)'란 '모든 사물을 거꾸로 본다'는 뜻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은 전도입니다. 가령 물은 이런 것입니다. 공기는 이런 것입니다 하고 규정하는 것은 즉 전도입니다.
물에 온도를 보태면 공기가 됩니다. 공기를 차게 식히거나 또는 강한 압력을 주게 되면 물이 됩니다. 공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공기가 아닐 수도 있고 물이라고 본 것이 물이 아닐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사실이, 우리들의 복잡한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난시니 색맹이니 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잘 일으키게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모두 '전도의 중생'인 것입니다.
다음에 '몽상'이란, 꿈 같은 생각을 말함입니다. 즉 망상을 일으킴입니다. 말하자면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요즈음 말로 환각 또는 착각입니다. '도깨비의 정체가 홑이불이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일종의 환각입니다.
사물을 명확하게 보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지레짐작하고 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전도나 몽상이 다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의 망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된 몽상을 멀리한다'는 것은 그러한 망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침내 열반에 든다'하는 말씀인데, 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앞에서도 잠시 말씀드렸지마는, 불교에 있어서의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것을 번역해서 '적멸(寂滅)', '원적(圓寂)', '적정(寂靜)'이라고 합니다. 요컨데 우리들의 미혹된 마음, 망상을 깨뜨린 '대안락(大安樂)의 경지'를 말함입니다. '적멸(寂滅)'을 가지고 낙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하면, 조용히 죽어 간다는 것, 곧 '왕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결코 죽어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왕생한다 하면 죽는 것과 혼동해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왕생은 결코 죽는 것은 아닙니다. 옛 성현께서는 '왕생이란, 가서 다시 나는 것이니, 불법은 죽는 것을 가르침이 아니라, 죽지 않는 법을 가르침이니라. 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법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즉 영원한 불사의 생명을 말한 것입니다.
'심경'에 있는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함은 곧 '무주(無住處) 열반'이라고 하는 열반입니다. '무주처'란 즉 있을 곳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으로, 다른 말로 바꾸어 본다면 '생사에 주하지 않고,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구경열반'입니다.
'보살은 지혜를 가진 고로, 생(生)에 주(住)하지 않으며, 자비심을 가진고로 열반에도 주하지 않도다'
'보살은 항상 중생의 이로움을 생각하는 고로, 열반으로 향하지 않느니라'고 경에 말했습니다.
그것이 보살의 서원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극락정토로 가자, 하는 것이 보살의 참 목적이나, 가령 나는 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만이라도 극락정토로 보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보살의 참다운 서원이며 이상인 것입니다.
저 지장보살은 모든 지옥 중생을 건져서 먼저 극락으로 보내고 나는 뒤에 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합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도 다 건진 뒤에 성불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 문전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합니다. 얼마나 거룩한 서원입니까?
석가모니께서는 이 사바세계를 극락정토로 하여, 우리 범부중생을 건져, 성불시키고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법화경에 설해 있습니다.
보살은 극락에 나고 정토에 가더라도 자기 혼자만이 연화대 위에 편히 앉아, 좋은 음악을 듣고 백미의 음식을 먹고 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중생의 번뇌가 곧 보살의 번뇌'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운 괴로운 번뇌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사랑도 이별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별의 슬픔은 또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이별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도 이별도 없는 것이 불타의 세계요, 깨침의 세계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번뇌라 함은 괴로움에 가득 찬 미혹된 이 세계입니다. 보리는 정각을 이루어 깨친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불교는 번뇌와 보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번뇌를 인(因)이라 하며, 보리를 과(果)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기 전, 싵달태자로 계실때 인생관에 회의를 느끼시고, 왕궁의 부귀를 버리고, 홀로 입산수도의 길로 드신 것은 이것이 번뇌인 것입니다. 이 번뇌가 인이 되어 마침내 보리(정각)을 이루어 성불하신 것은 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은 미혹된 범부이지만 이 미혹이 인이 되어 마침내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대자대비심을 일으키신 것은 인이 되고, 중생을 제도하신 것은 과가 되는 것입니다. 미혹으로부터 깨침의 길, 깨침에서 미혹된 중생을 제도하시는 길이 불교입니다. 이것이 불타의 길이며 보살의 길입니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오는 길이며, 내려오는 길이 올라가는 길인 것입니다.
범부중생(凡夫衆生)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고, 부처님을 떠나서 범부중생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석 김원각의 <마음>이란 시를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마음>-
마음이 괴로운 자 있거든
절에 가 보아라
되도록 혼자면 더욱 분명하리라.
가는 도중에 줄곧
따라오고 있는 괴로운 자기 마음을
절에 가서
괴로운 보따리 끌러 놓고 기도해 보아라
금부처가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 주리라
굳게 굳게 믿으면서
절실하면 눈물까지 흐르리라
이윽고
그대는 하산할 것이고
절을 등지고 멀리 내려올수록
분명해지는 것 있으리라
잠시 흩어졌던 괴로움들이
하나 둘 모여
다시 괴로운 마음 이루어
따라오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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