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금강경 강의(4) - 2.善現起請分

難勝 2008. 6. 9. 04:29

                      금강경 강의(4)-2.善現起請分


2.善現起請分

時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言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世尊願樂欲聞


해석(解釋):수보리의 질문(善現起請分)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걷어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을 표시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상에서 참으로 위대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護念)해주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잘 일러(부촉)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어진 남자(善男子)와 어진 여인(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행동(安住-머무르게)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실천(항복)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護念)하고 여러 보살들을 잘 일러(付囑)준다는 것이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善男子(어진 남자)와 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머물고(행동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실천)시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강설(講說):善現起請分-선현(善現)은 수보리를 의역한 것입니다. 또 善現이라고 한 것은 소명태자가 32분을 나누면서 4자의 제약 때문에 수보리의 3글자 이름 쓸 수 없음으로 줄여 표현했습니다.

수보리와 사리자는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전에서는 수보리를 구수(具壽)라고 번역을 했는데 장로(長老)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이 불교용어를 빌어 "Elder- old의 비교급"에 해당되는 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의 제자입니다.

부처님 설법 가운데 제일 어려운 법문(法門)인 공(空)의 진리,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지나서 구공(俱空)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體得)하고 있기 때문에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라고 합니다.  아공(我空)은 우리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가 아니라 이것은 공하여 없는 것(空無)이란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하며, 법공(法空)은 물질적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한 상대적 정신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萬有)의 본체가 본래 공무(空無)한 것이란 진리를 말하며, 구공(俱空)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다 초월하여 공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本性)에 계합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공의 진리를 잘 깨달았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라고 합니다.

또 無諍第一로 외도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아도 결코 그들과 다투지 않고 쟁론을 벌리지 않았으며, 供養第一로 덕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항상 따라 그를 공양 대접하기를 좋아했으며, 色像第一로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고 변재에 뛰어 났습니다.

수보리는 범어의 원래 이름은 수부티(Subhuti)인데 한역(漢譯)으로 善現, 善吉, 때로는 妙生이라 합니다. 금강경에서 그는 부처님과 대화를 전개하는 주인공이 되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역할을 하며, 반야심경에서는 智慧第一-사리자, 금강경은 解空第一-수보리, 능엄경은 多聞第一-아난존자가 질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 외 10대제자는 神通第一-목건련, 頭陀第一-가섭존자, 天眼第一-아나율, 說法第一-부루나, 論議第一-가전연, 持戒第一-우바리존자, 密行第一-라후라입니다.

起請 - 자리에서 일어나 청한다는 뜻입니다.


본문:時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해석(解釋):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걷어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을 표시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강설(講說):시(時)-부처님께서 식사를 마치고 발을 씻고 앉을 자리를 정돈한 후 다리를 틀고 앉아 휴식을 취하여 하던 때를 말합니다.

장로(長老)-불교에서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는 뜻이며, 卽從座起질문은 손을 들어서 하는 지금 방식과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을 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에서 "偏袒右肩"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오른손을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비워둔다는 뜻과 부처와 함께 길을 걸을 때 오른손으로 나이 많은 사람을 부축하고 걷습니다. 오른손은 길한 손이요 왼손은 불길한 손이기 때문에 가사로 왼손을 가립니다. 또 다른 설명은 살인 등 나쁜 일은 모두 오른손으로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 향을 올릴 때는 왼손으로 하며, 오른손을 부처께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또 내 몸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기를 낮춤으로서 상대방을 존경하는 표시하는 것입니다.

합장(合掌)-인도의 예절이며, 법사(法師)는 출가한 스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합십(合十)은 손을 합친다는 의미이며, 화남(和南)-음역으로 땅에 엎드려 절한다. 즉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뜻합니다.

右膝着地合掌恭敬而白佛言-잠깐만 부처님! 조금 있다가 정진하시고 저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십시오.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而白佛言-白이란 말한다는 뜻입니다.

선종의 五祖 弘印대사가 말했듯이 도를 깨쳐 부처가 되려면 전심으로 金剛經을 읽으면 된다고 했고, 심지어 글을 몰라 읽을 수 없을 때에는 “마하반야바라밀다”만 외워도 된다고 했다. 六祖 慧能대사가 금강경으로 인해 깨달은 사람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중국 선종을 반야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오조 육조가 금강경으로부터 직접 전승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金剛經을 읽도록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다.


본문:希有世尊 如來善護 念諸菩薩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해석(解釋):"세상에서 참으로 위대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護念)해주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잘 일러(부촉)주십니다.


강설(講說):希有世尊-세상에 참으로 어렵게 만나볼 수 있는 세존이시여!

경전에 인도의 예법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즉 나이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전에 먼저 찬탄사를 늘어놓아야 하며, 그러면 부처님은 다 듣고 있다가 “어서 말해 보게!” 論講 토론식 강의는 전통 불교의 교수법입니다.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여래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해 주시고, 여러 보살에게 잘 일어주십니다. 부처님 명호에는 如來十號가 있습니다. 즉 如來, 應供, 正遍智,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 世尊입니다. 여래란 “무시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無始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오는 것도 없고 가는 곳도 없기에 여래라 하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해 있지도 않으며,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아, 일체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래란 영원히 당신 앞에 있어, 일념으로 믿기만 하면 바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옛 시에

佛在心中莫浪求 부처는 마음에 있으니 어지럽게 구하지 말라

靈山只在汝心頭 영산은 다만 그대의 마음속에 있다네

人人有個靈山塔 사람에게 모두 영산 탑이 있나니

只向靈山塔下修 오직 영산을 향해 수행할 뿐이라네   *.靈山은 靈鷲山을 말한다.

不向靈山塔下求-“영산탑을 향해 구하여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佛)이나 도(道)가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후세 선종의 표현은 心卽佛 佛卽心이라고 말하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은 모두 외도라고 했습니다.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를 번역한 것으로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인 말입니다.

보리(菩提)란 깨닫다는 뜻이요. 薩埵는 유정(有情)이란 뜻입니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각오유정(覺悟有情)이며, 산스크리트의 음을 빌려 간단하게 보살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불속즉선골(佛俗卽仙骨) -속되지 않은 것은 신선의 풍모요.

다정내불심(多情乃佛心) -정이 많은 것은 부처의 마음이다.

보살은 자신을 희생하여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정이 많은 사람이 바로 부처요 보살이며, 이것이 바로 각오유정(覺悟有情)입니다.

출가자는 옷차림이 단정합니다. 그런데 보살상은 귀걸이, 목걸이를 하거나 반지도 끼도 있다. 입술도 붉게 칠하고 화장도 했습니다. 이것은 보살들이 세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외형은 비록 세속적이나 내심은 세속을 떠나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의 경계를 대승이라 합니다.

능엄경(楞嚴經)에 自未得度, 先度人者 菩薩發心, 自覺已圓 能覺他者 如來應世-스스로 제도하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여래의 처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은 깨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먼저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이고, 이미 스스로 원만히 깨닫고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본문: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해석(解釋):세존이시여, 어진 남자(善男子)와 어진 여인(善女人)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까?


강설(講說):여기서는 발심(發心)의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마음을 발할까? '아뇩다라'는 산스크리트로 번역하면 무상(無上)입니다. 지고무상(至高無上)하다는 뜻입니다. ‘삼(三)’은 정(正)이며, ‘막(藐)’은 등(等), 평등의 의미입니다. 또, 먁(藐)은 두루하다(遍), 그리고 ‘보리(菩提)’는 깨달음입니다. 해석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無上正徧智)’의 마음입니다.-더없이 높이 바른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마음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내용을 전부 포함하지 못합니다. 의역하면 선종에서 말하는 확철대오(確徹大悟)라 말할 수 있는데 그래도 부족합니다. 행위측면으로 대자대비의 보살심이요, 이론의 측면으로 대철대오의 형이상의 본성입니다. 이처럼 삼먁삼보리심은 의미가 대단히 포괄적이서 음역으로 처리해 후세인들이 스스로 해석을 하도록 했습니다.

부처님이 보살들을 호념하고 부촉한다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여 성불해 주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도록 수행을 닦아 모든 중생들을 위하라고 부탁한다는 말입니다. 아뇩다라 삼막삼보리는 범어 Anuttra samyak sambodhi를 음사한 말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번역하고,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 곧 부처님을 부처님이 되게 한 깨달음 자체입니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불법을 배우고자 마음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일체의 중생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보는 점입니다. 기타 종교에서는 단지 ‘그’ 만 가능하며, 우리는 ‘그’의 도움을 기다려야 하고, 모든 것을 그를 따라야 하며, ‘그’ 외에는 모두 옳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부처라 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왜 성불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 마음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믿음이란 스스로 깨어나 스스로 깨쳐 성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바른 정신입니다. 복이란 스스로 구하는 것이니 “스스로 돕는자 하늘도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스스로 행해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하고 부처 앞에 용서를 빈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을 한다고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야 불법을 닦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다리를 꼬는 것은 다리를 닦는 것이지 불법을 닦는 것과 무관합니다. 좌선은 정(定)을 닦는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몸과 마음을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합니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나쁜 사람은 불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일체의 좋은 사람들이여!

좌선하여 마음을 찾고자하나 생각이 정지되지 않고 망상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앉기만 하면 온갖 잡상들이 더 떠오릅니다. 이것이 수행의 첫 단계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입니다. 이 몸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수보리는 담담하게 여러 사람을 대신해 아주 담담하게 묻습니다.

云何應住-어떻게 마음을 청정하고 지극히 선한 그 경계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있을까요?-내 마음을 어떻게 두어야 하나? 

云何降伏其心-어떻게 하면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어지러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항복시킬 수 있을까요?--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이 문제에 부딪히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머물러 있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외워도 마음을 ‘염불’에다 머물게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염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기도가 끝나면 누굴 만날 생각을 하고 관세음보살 한번하고 집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오늘의 스케즐이 아니라 내일의 일까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봐야 하나님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머물게 하는가?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문제입니다.

천하를 정복할 수 있어도 자신의 마음을 정복할 방법은 없습니다. 성인도 자기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은 어려워하는 것이니, 도(道)란 이처럼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법은 법이요. 번뇌는 번뇌일 뿐입니다.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할까요? 이 질문은 정말 훌륭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解脫이나 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있으면 마음을 항복 받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내 배가 고프면 내가 밥을 먹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도 하나님도 내 배를 대신 배불리 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佛言善哉善哉須菩提 如汝所說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當爲汝說

해석(解釋):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護念)하고 여러 보살들을 잘 일러(付囑)준다는 것이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강설(講說):부처님은 수보리의 질문을 듣고 문제제기가 너무 좋아서 그래 훌륭하도다. 훌륭해! 참으로 훌륭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부처님이 수보리를 칭찬을 하는 장면입니다.

“훌륭하도다, 훌륭해! 수보리! 여래는 여러 보살을 선호념(善護念)하고 선부촉(善付囑)한다는 질문이지, 그렇지 않는가?”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금체청(汝今諦聽)-이제 주의해서 잘 듣게. 체(諦)란 자세히 또는 주의해서란 뜻입니다.

당위여설(當爲汝說)-그대가 제기한 문제가 너무도 훌륭해. 응당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때까지 수보리는 여전히 무릎을 끊고 앉아 있습니다.

善護念 - 시시각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생각을 가만히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뜻으로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아니타불을 염불하면서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善護念”입니다. 좌선할 때도 자신을 살피고 쓸 때 없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중 사념처(四念處)가 있는데 바로 염신(念身), 염수(念受), 염심(念心), 염법(念法)입니다. 그중 염심(念心)은 특히 중요합니다. 수시로 이 마음을 염하면 그것을 알 수 있으며, 바로 선호념(善護念)입니다. 이 몸과 마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몸을 염(念)하면 그것이 무상함을 알고, 마음을 염(念)하면 생각이 생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염(念)’이라고 합니까? 호흡 한번 하는 사이를 일념(一念)이라 합니다. 일념 사이에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다고 합니다. 번뇌가 반드시 고통인 것은 아니지만 괴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金剛經)을 들고 호념(護念)을 하고 있지만 어떤 념(念)을 호(護)하고 있을까요. 바로 번뇌의 념(念)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번뇌 망상이니 즐거울 리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즐겁지 않은지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는데 어찌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경계입니다. 인생은 항시 번뇌 속에 있습니다. 무엇을 번뇌합니까? 번뇌란 “무고심수멱한(無故尋愁覓恨)”-아무런 원인도 없는데, 마음이 뭐라 말할 수 없이 근심스럽고 원망스럽다.”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번뇌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일념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수보리(須菩提)가 문제를 제기 했을 때 사실 답은 이미 문제 속에 있었습니다. 금강경은 다른 경전과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선종의 조사들이 금강경을 높이 받드는 이유도 이 경전의 정신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囑)이 두 구절로 이미 모든 설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님께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합니까? 기도를 어떻게 해야합니까? 좌선을 하는데 호흡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며 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법을 구할 수 없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망상이고, 번뇌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호념(善護念)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금강의 눈입니다.


본문:善男子善女人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해석(解釋):善男子(어진 남자)와 善女人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머물고(행동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실천)시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강설(講說):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남자 선여인들이여! 만약 무상대도(無上大道)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머물게 해야하며,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항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 수보리가 한참 기다리다가 머리를 들어 한번 쳐다보면서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唯然 世尊!하고 말한다. 경(經)에 ‘유(唯)’란 대답하는 말이며, ‘연(然)’이란 좋다는 뜻입니다.

願樂欲聞 - 세존이시여 저는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발심에 허회문지(虛懷聞之)란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텅비우고 법문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훌륭하도다 훌륭해! 수보리여! 여래는 모든 보살을 “선호념(善護念)”하고 “선부촉(善付囑)”한다는 질문이었지, 그렇지 않는가? 수보리가 대답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말해 주려고 하니 자세히 듣게. 그대에게 구도심이 있어 일념으로 도를 구할 때, 바로 그렇게 마음을 머물게 한다네. 그렇게 망념이 사라져 버릴 것이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네!”

그러나 수보리는 이해를 하지 못해 바보처럼 “부처님 듣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주(住)’란 머무는 것입니다. 한곳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번뇌와 망상을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바로 그렇게 머문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교 수행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마음속의 망상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 방법이든 모두 마음의 안정, 즉 마음을 그쳐 머무르게 하는(止住)다. 불교의 근본 수행은 즉 지(止)와 관(觀)입니다. 생각을 집중시켜 한곳에 그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정토종의 염불은 나무 아미타불만 외움으로써 바로 거기에 마음이 그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무’란 귀의란 뜻이요. ‘아미타’는 이름입니다. 아미타라는 부처님께 귀의하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설화를 한 토막을 예를 들겠습니다.

나이 많은 어머니와 어렵게 얻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온종일 아주 간절히 나무 아미타불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의 염불소리가 무척 귀찮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미타불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아들이 또 “어머니! 어머니!!” 소리쳐 부르니 다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다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불을 하는데 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소리쳐 부르니 어머니는 “내가 염불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부르냐”고 짜증을 내니 아들이 “제가 누굽니까 저는 어머니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아닙니까? 제가 어머니를 세 번 계속 불러도 화가 나지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아미타불을 불러대니 아미타불인들 어찌 귀찮지 않겠어요?”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분명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염불은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때, 그쳐 머무는(止住)경계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염불을 하면서 좌선을 하면서 한편으로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바위가 누르고 있어도 잡초가 자라는 나듯 번뇌 망상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쏟아 납니다. 염불로 통해 진정으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려면 신체도 잊고 자신도 잊고 주위 일체 상황도 잊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흐트러지지 않을 때가 바로 생각이 정지하는 소위 ‘그침(止)’의 단계요. 그 그침으로부터 정(定)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定)이란 아이들이 갖고 노는 팽이와 같습니다. 팽이를 힘껏 돌리면 꼿꼿이 서서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데 이런 상태가 곡 정(定)입니다. 불법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가장 곤란한 문제로, 바로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제기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대가 물었을 때, 마음은 이미 머무름의 상태에 있다. 바로 그렇게 물었을 때 번뇌와 망상은 이미 없어졌다. 예를 들면 한곳에 몰입하면 그곳에 머문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병을 알면 병을 고칠 수 있지만 병을 모르니까 고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번뇌를 항복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부처는, 바로 그렇게 머무르며, 바로 그렇게 마음을 항복시켜라(如是住, 如是降伏其心)고 대답했습니다. 말을 바꾸면 그가 문제를 제기 했을 때 이미 마음속의 번뇌는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 바로 그 생각 當下卽是 當念卽是)입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봄이 되면 잠이 많아집니다. 잠이 많으면 꿈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깨고 나면 꿈에 머물지 않습니다. 꿈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나이 먹으면 언제나 옛날 생각만 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일체의 것은 봄날의 꿈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진정으로 모든 일이 봄날 꿈처럼 흔적 없는 것임을 체득한다면 다시 金剛經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머물고, 그렇게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번뇌란 본래 공(空)입니다. 모든 희노애락과 번뇌는 바로 여기를 잡는 순간부터 모두 없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