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찾아 가는 길

문무대왕 수중릉 이야기

難勝 2008. 6. 19.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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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명 대왕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군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수중릉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는 자연 바위이다. 그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그 둘레로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이고 있다. 대왕암에 올라 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나오고 들어가는 수로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혀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아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내부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돌이 놓여 있는데,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장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판석처럼 생긴 돌 밑에는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무대왕릉은 전대의 왕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무왕릉은 조선후기부터 외동읍의 괘릉을 문무왕릉이라고 칭하여 전승되어 왔다. 그후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은 인접한 곳에 숭복사가 있음에 비추어 괘릉이 원성왕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설은 부정되고 1967년도 5월 17일 한국일보가 주관한 삼산오악조사단의 문무왕릉 발견보도가 있은 연후에야 김씨문중에서는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설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1973년경에 조선전기까지 전해오던 이곳의 대왕암을 다시 문무왕릉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왕릉의 실체가 '장골(藏骨)이냐 아니면 산골(散骨)이냐'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