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상에 대하여 -선오스님-
Ⅰ. 序論
1.問題提起
本考는 新羅, 統一新羅期에 中國으로부터 流入되어 旺盛한 信仰과 思想展開를 펼쳤던 四天王思想을 考察의 爭點으로 삼았다. 思想은 藝術造形을 함께 수반한다. 역시 사천왕사상에 걸맞는 一群의 四天王 浮彫像들이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현존해 오고 있다. 佛舍利裝嚴具,佛塔,僧塔등에 護法,護國의 상징으로 사천왕상이 부조되어 있다. 몇 몇의 선배학자들에 의해서 持物과 方位, 名稱등이 彫像과 佛畵를 통하여 照明되어지고 도상특징이 정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다.1) 그러한 가운데 불명확하게 규정되어진 몇가지 문제점을 提起하여 考察하고자 하였다..
1)첫째, 사천왕상의 起源을 인도 재래종교인 리그-베다의 神의 일종인 야크사상(약샤,약차) 에서 發展되어 習合되었다는 점까지는 언급되어졌으나 명확한 始源을 밝히지 못하고 있 다. 그리하여 몇가지 근거자료를 제시하여 필자의 주장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2)둘째, 사천왕상이 중앙아시아 서역루트를 통하여 중국,한반도에 조성되면서 점차 武將形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服飾에 있어서 특히 肩胛과 腹甲에 나타나는 獸頭2)의 형태가 분명 龍에서 형상화 되었음을 밝히고3), 용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3)셋째, 사천왕상이 밟고 있는 臺座의 한 형식인 生靈座의 경우 거의 대부분 惡鬼像이라고칭하고 있다. 惡鬼라고 하면 보통 사악하고 인간생활에 해를 끼치는 惡의 대명사처럼 느끼고 있다. 그런데 생령좌의 경우 사천왕상이 발로 짓밟고 있는 듯한 생령좌가 있는가 하면, 한편, 그 악귀가 두 팔 내지 어깨에 태우고 어디론가 떼매고 가는듯한 인상을 주는 생령좌가 있다. 그렇다면 이 두 팔 내지 어깨에 사천왕을 모시고 있는 生靈座를 함께 악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필자는 이 점에 着眼하여 生靈座의 대좌형식을 더 세분하여 악귀가 아닌 사천왕을 모시고 四天下를 돌아 다니는 사천왕의 眷屬으로 보고자 하였다. 즉 생령좌와 眷屬座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經說을 통해서 주장하고자 하며 또한, 雲座 및 天衣座에 있어서 운좌라고 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雲座를 香雲座로 명칭하고자 하며, 그 準據를 經說에 통해서 주장하고자 한다. 아울러 牛座도 함께 대좌의 한 형태로 구분짓고자 한다.
4)넷째, 이 권속좌를 통해서 일반적으로 악귀라고 보아왔던 생령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흔히 우리가 사찰의 사천왕문을 들어섰을 때 일반대중들에게 설명하고 인식되어져 왔던 통상적인 설명, 즉 악한 업을 지으면 저와 같은 사천왕들한테 벌의 받는다. 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악귀들과 같은 벌을 받는다라고 막연히 말해오고 있다.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천왕상 밑에 깔려 있는 악귀상들에 변화가 있어왔다. 그 변화의 이유들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점이라는 것, 이것에 대하여 생령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보았다.
2 . 硏究方向
本考의 論究의 範圍와 限界를 三國, 統一新羅期로 限定하고자 한다. 사천왕상의 起源을 밝히기 위해서는 印度관련 文獻을 인용하여 問題提起를 結論으로 도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중국 관련자료와 신라, 통일신라기의 사천왕 浮彫像과 佛畵를 함께 참고 하였다. 또한 한반도에 전래된 사천왕사상의 배경과 그 신앙적 의미,도상적 특징, 양식을 三國, 통일신라기의 조형물로 한정지어 論究하고자 하였다.
사천왕상의 대좌형식을 四天王品의 經說을 통하여 생령좌, 권속좌,향운좌,천의좌,우좌 형식으로 구분짓고자 하였으며, 생령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Ⅱ. 四天王 信仰의 起源 및 意義
1.四天王像의 起源
불교의 宇宙觀 가운데 佛菩薩의 세계를 守護하고 佛法을 받드는 天部世界에 사천왕천이 있다. 이 사천왕천은 欲界,色界,無色界 가운데 욕계6천에 포함된 첫 하늘세계 수미산 중복에 위치해 있다. 이 사천왕의 역할이 불국토를 수호하는 護法神으로 그 신앙의 源流를 印度古代 民間信仰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에 “야크샤”라는 말이 등장한다.4) 인도에서는 다양한 성격으로 구분되는 야크샤가 있는데, 그 실체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인간을 넘어선 神聖한 영적 존재인 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기원전 3세기에 제작된 거대한 야크샤, 야크쉬니상이 마투라의 파르캄이나 퍼트나에서 출토되고 있다. 같은 사기에 다다르간지에서 출토된 깃털 달린 야크쉬니상은(삽도1) 불교도 사이에서 이 같은 조상이 만들어져야 되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시사해주고 있다. 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경의 바르후트나 산치,마투라에서는 난간의 기둥이나 탑문의 까치발 부분에 풍만한 야크쉬니상이 많이 볼 수 있다.(삽도2,삽도3,삽도4) 원시경전에서는 佛陀마저도 때로는 “야크샤”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었다. 원시 쟈이나경전도 야크샤를 가리켜 덕을 행한 빛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이 “ 야크샤”는 단순한 영적 존재라기 보다는 구체적인 기능을 가진 민간신앙의 신격이기도 했던 것이다. “쟈타카”나 그 밖의 佛傳에서는 야크샤가 때때로 “데바타(神)”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녀들은 나무의 신, 산의 신, 토지의 신이며, 동시에 가정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이는 어느정도 주술적인 관념하에서 성역이나 건물의 수호 내지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야크샤는 풍요함과 결부된 地母의 神이라고도 한다. 야크쉬니가 地母神으로서 집이나 토지의 수호신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들과 불교와의 관련성도 납득이 될 것이다. 이처럼 토지의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地母神이었던 야크샤와 야크쉬니는 鬼靈으로서 불교에 유입되어 守護神으로서 점차 변모해 갔다는 점이다.5)(삽도5) 특히 야크샤의 성격이나 기능이 변모를 겪게 된다. 후대에 이르면 이들의 주재자로 쿠베라가 등장하게 되는데 쿠베라는 배가 볼록한 財寶의 神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쿠베라의 별명이 毘沙門이기도 하다. 사천왕중 東方의 지국천왕을 다른말로 毘沙門天王이라고 하며 재보를 관장하는데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6)(삽도6,삽도7)
또한 석존의 만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大涅槃經에서는 토지신과 토지 수호신인 야크샤들의 도움이 없으면 훌륭한 집과 거리를 건설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후대의 「아타나타 파릿타」등을 보면 힌두 판테온이 확립됨에 따라서 야크샤들은 쿠베라의 시중꾼이 되는데, 쿠베라를 비롯한 사천왕이 불타에 귀의하게 되자 야크샤들도 인간에게 해를 기쳐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게 된다. 한편 야크샤는 석존의 길을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하는 경우도 있다. 근본설일체유부의 「毘奈耶」에는 석존이 캐시미르 지방에 순행했을 때 야크샤가 그 안내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보인다.7) 이처럼 야크샤가 불교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인 수투파나 주위를 둘러싼 난간에 조각되는 것은 이들이 불교도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는 점을 반증하여 주고 있다.
오늘날 경주 일원에서 보이는 있는 佛舍利가 출토된 塔이나, 舍利장치에 사천왕상이나 인왕상 같은 수호신이 부조되어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수 있다. 이 깨달음과 윤리성을 그 본래의 뜻으로 삼고 있는 불교는 이같은 인도 민간신앙을 흡수함으로써 생생한 활력을 얻어 민중사에 정착했던 것이다. 이 야크샤와 야크쉬니상이 불교 사천왕상의 始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용신앙의 수용
1)인도의 나가(Naga)신앙
필자가 龍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천왕 浮彫像이나 사천왕을 그린 불화의 圖像 가운데 腹甲과 肩胛에 수두장식이 보인다. 흔히 獸頭 내지 龍頭장식이라고 불리워 진다. 막연히 獸頭라고 볼것이 아니라 분명 용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은 조물주의 단독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함으로 태어난 환상적인 또 하나의 창조물로서 어느 특수한 종교의 독점물도 아니었으며 모든 종교적 신앙행위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 같이 받아들인 영물이므로 위대한 존재라는점을 부인할 수 없다. 용에 대한 수많은 신화,설화,전설들은 용에 대한 신앙,학설,문학 또는 미술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문화적 소산물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용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실질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용에 관련된 미술이다.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에서는 불타가 때때로 나가(Naga)라고 불려 졌다. 자타카에서 前生의 불타는 국왕, 상인, 바라문,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평민, 원숭이, 악어같은 동물, 혹은 樹神, 용 등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利他의 善業을 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오던 전설, 민화등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불타의 위대한 인격을 흠모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가라고 하는 것은 용을 가리키는 말로서 코브라를 신격화한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경전에서는 불교를 보호해 주는 각양 각색의 나가가 있는데 이것이 중국과 일본에서는 용신이 되어 있으며8)(삽도8,삽도9) 스리랑카에서는 지금까지도 정사나 불탑의 입구에 한 쌍의 용왕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일찍부터 바르후트 지방의 난간기둥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불탑을 수호하는 용왕 차크라바카이다.(삽도10)
이상을 통하여 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용 신앙이 전래되어 왔음을 볼 수 있고 그 용이 불교의 불탑을 수호해 주는 수호 호법신으로서 발전하여 나가 완전히 불교의 호법신으로 또는 권속으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소승 경전에 보이는 용에 대한 것들은 무수히 찾아 볼 수 있는데 사천왕상의 조상의 소의경전에 된 금광명경 사천왕품에 보더라도
“우리4왕 및 천룡귀신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들은 이 법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며 제악귀가 정기를 삼키는 것을 막으리라.”9)
“아뇩달용왕,사갈라용왕,이와같은 무리들이 스스로 궁전에 각각 득문하여 이 미묘향기 및 향이 덮여 광명이 두루 비추고 이 향기가 덮인 광명이 일체제천궁전에 비춤을 보았나이다.”10)
라는 구절에서도 용왕들이 등장한다.
“이 삼천대천세계와 백억삼십삼천세계 일체용귀,건달바, 아수라, 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궁전 허공에 갖가지 향의 연기가 뒤덮여 가득하여 그 금빛광명이 또한 궁전에 비춰 덮이리라.11)
라는 구절에도 용왕들이 등장한다.
또한 서방 광목천왕은 무수한 용과 비사자를 권속으로 거느리며 남방 증장펀왕도 여러 용왕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보이는 용에 관련된 부조상을 보면 바루후트에 부처님께 예배하는 용왕,(삽도11)석존의 탄생시 두 용왕이 태자의 머리에 관정하는 모습,(삽도12)두상인의 공양과 무칠란다 용왕이 부처님을 수호하는 모습(삽도13), 석존에게 두 상인 메밀 과 꿀로 만든 떡을 공양할 때 사천왕은 그것을 담을 그릇을 바치는 정경(삽도 14), 나가 엘라파트라가 붓다에게 경배하는 모습(삽도15), 코브라를 머리에 인 나가가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모습(삽도16)등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인도의 나가신앙이 당시의 불교신자들이 누리고 있었던 생활문화속에서 나가의 위치를 확인할 에 용신앙이 정립되었고 용은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의 외호성중으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천왕상 갑옷의 견갑 및 복갑에 용두장식이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중국 용신앙의 수용
중국에서의 용은 우리인간의 마음과 정신생활에 5천여동안이나 지배해 왔고, 조형적으로 표현된지도 4천여년이나 되므로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용은 엄연한 실존물로 여겨진다. 중국의 은나라때 뇌운문에서 용미술사가 실절적으로 출발하여 용이 동물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음단계에 이르러서는 용의 탄생에서부터 비룡에 이르기까지의 성정과정에 대한 이론이 태어났고 이에 병행하여 용의 조형사가 뒤따르게 되었다. 용은 여러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고루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하다. 특히 중국에서는 물과 깊은 관계를 가진 水神으로 신앙되어 왔다.그래서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12)
중국에서의 용은 각종 水族(주로 揚子鰐,뱀,거북등)을 주체로하며 새와 짐승을 복합하여 토템으로 삼는 씨족부족의 徽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용에 대한 기원은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용은 곧 악타류라는 설이다. 이것은 원시시대부터 흔히 용이라 일컫어 졌던 동물은 결코 뱀이 아니며 또한 뱀을 주체로 연화해 온것도 아니다라고 보고 있다.13)
즉 商周․청동기와 석조에 나타난 용은 가시가 있다.이러한 가시는 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룡만이 갖고 있다.대계문화,용산문화에서 발견된 용과 이<이>는 각기 서로 다른 조형을 유지하면서 줄곧 전국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甲金文의 용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한 사실대로의 묘사이며 결코 허구로 꾸며낸 것이 아니다. 자손이 조상에게 복을 구하는 토템의식의 표현으로 용을 묘사했거나 鰐과 천둥 및 비와의 관계, 鱓의 울음과 물위에 떠오를 때의 자연현상을 그들은 同類相感의 관계로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용을 경외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灣鰐,揚子鰐으로 水神,雨神,우뢰신,농업신등을 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의 용은 확연히 인도의 나가신앙의 유래와는 다르다. 중국은 용과 뱀을 구분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원시자연토템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天人同一觀>이다. 인간과 우주만물이 모두 대자연에서 나왔고, 인간과 자연은 동등한 위치며, 심지어는 자연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중국문명의 면모와 예술구성의 기본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과 우주의 합일, 만물이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 등은 중국 예술의 외형상의 특징으로 표현되었고, 우주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인간 정신세계의 결합, 자연과 情景과의 융합등은 중국예술의 내면적 정신세계의 특징으로 함유된다. 중국의 용은 시종 대자연속의 구름, 물, 산, 새, 짐승등과 같이 하나의 全景式 총체를 다 포함할뿐 아니라,심지어 산수, 화조(짐승포함), 인물화 등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점점 善惡, 美醜등의 관념이 생겨났다. 이렇게 진, 선, 미 통일관념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일종의 중국인 의식구조의 특징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토템예술에서 이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물고기하면 漁父之利,백로하면 一鷺平安, 용하면 비(雨水), 鳳하면<악을 쫓는 것>, <상서로운 징조>, <天下安寧>을 연상하게 하는 것 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의 상서로운 짐승, 새등의 <祥瑞>관념은 바로 이러한 것에 기초를 두고 생겨난 것이다.14) 용은 조화, 상서로움, 수호, 길상과 같은 관념이 의식저변에 자리잡아 가면서 중앙아시아로부터 전래된 불교조형양식에 영향을 받아 사천왕상의 부조상이나 불화등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사천왕 신앙의 의의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복에 있는 사왕천에 살며 4方4州를 수호하는 불교의 호법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四大天王, 護世四天王, 護世主, 四王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신화시대부터 있었던 호법신으로 고대 인도의 바르후트 탑에 증장천이15) 묘사된 것으로보아 서기전 2섹경부터 불교에 수용된 듯 하다.
사천왕 신앙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되어 일찍이 「장아함경」「증일아함경」등을 비롯하여 많은 경론에서 사천왕상의 공덕을 설명하고 있지만 널리 믿어지고 도상화된 것은 「금광명경」16)이 유행된 다음부터라고 보고 있다. 금광명경이 4세기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사천왕 신앙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東晋 永嘉 연간(307~312)으로 짐작되지만 본격적으로 유해하게 된 것은 6세기 말경 4권본 또는 8권본의 「金光明經」의 전래에 기인한다고 추측된다. 417년경에 曇無讖(414~426년)에 의해 처음 한역되어 진제삼장이 증보하여 5권이 되고 隋나라때에 寶貴가 이 두종류를 합하여 8권으로 만들었다.그 뒤 中唐에 와서는 703년 義淨이 새로 梵本을 구하여 「金光明最勝王經」10권을 완역하기에 이르렀다. 이 경전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사천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국가적 위기가 있을때마다 널리 유행하였다. “사천왕호국품”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사천왕과 모든 귀신들이 국왕과 인민을 수호하고 모든 재앙을 물리치며 적국을 항복시켜 지상의 모든 국가를 태평하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호국경전으로 널리 유행하였다.17)
불교적 호국사상이 대승경전에 이르러 종교화되면서 지배계층의 이념으로 정착되어져 갔으며 국민들에게도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서 경을 읽거나 널리 유포하는 나라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보호해 준다고 강조한다.18) 따라서 외적의 침략이나 기근, 질병등의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고 국민을 편안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국토를 수호하는 사천왕을 신앙하고 이 경을 널리 받드는 것이 필요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사천왕에 대하여 언급한 불경은 약30종류가 넘는데 사천왕은 이들 각 경전마다 많은 설법장면에 등장하여 다양한 역할을 거치면서 불교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수미산 수호신으로서 나라를 지켜주는 鎭護國家神으로 정착되어갔다. 사천왕의 진호국가신으로서의 변화는 사천왕이 정법을 호지하며 諸經을 傳持하는 국왕을 수호하고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역할이 설해 지면서 사람들에게 호국경전을 받들도록 권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19)
그리하여 신라땅에서는 국가의 위기상황에 이 경은 크게 유행하였으며 아울러 사천왕상도 도상화되어 다수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 19년에(679년)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당병을 물리쳤다하였으니 이는 금광명경 사천왕품에서 설하는 사천왕에 의한 호국사상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입당사 김사양이 704년 3월 귀국하여 당대 번역본들 가운데 최신본인 금광명최승왕경을 성덕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경은 당의 의정이 선복사에서역출(700-703년)한 것으로 신라 유학승 승장이 그 번역에 두 번 참가하였다.20)이렇게 국가의식이 명확하게 천명되어 있는 불경이 중국에서 역출되자마자 직수입되어 신라의 왕실이나 불교계에 전해진 것은 그 만큼 금광명경이나 사천왕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경덕왕 12년 (753) 사문 대현으로 하여금 금광명경을 강의하여 비를 내리도록 하였다는 기록 역시 금광명경을 수지,독송,강경,유포하는 나라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각종의 재난으로부터 보호받고 국태민안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렇듯 사천왕 신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아울러 사천왕상에 대한 조상이 활발하여 졌고 그 제작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은 신라통일기 이후로 보고 있다.21) 특히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사천왕상들이 인왕상을 대신하여 조성되면서 가장 대표적인 수호신으로 등장했던 것이다.22)그러나 사천왕상의 제작전통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작품이 전해오고 있고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불교미술 교류의 역사를 통해 보아도 우리나라 사천왕 신앙은 통일신라시대 휠씬 이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
Ⅲ. 신라사천왕상의 도상
1. 간다라와 서역의 도상비교와 전래
사천왕상은 인도신화시대부터 존재했던 방위신으로 고대인도의 바르후트 탑에 묘사된 증장천의 예에서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불교에 흡수되었음을 앞서 살펴 보았다. 마르단 수집품 가운데 사천왕봉발도(삽도 17,삽도18)의 일군에서 보이는 부조상을 살펴 보더라도 사천왕중 유독 비사문천인 다문천왕이 두상의 장식이라든가 의복이 다르게 표현됨을 볼 수 있다.24) 이러한 비사문천은 늦어도 5-6세기 경에는 사천왕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단독상으로 신앙되어지고 그 자취도 돈황 및 중국 사천성,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사문천이 사천왕중에서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전 비사문천은 분명 사천왕중의 북방천왕이며 아울러 사천왕중 가장 힘이 센 나머지 천왕들을 이끄는 사천왕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25) 여기에서 사천왕봉발이라는 부조상에서 보면 합장을 한 천왕은 비사문천(다문천)이고 다른 3천왕과는 장식이랑 의복이 다르다. 즉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왕후상 및 이란계의 풍요,재보신인 파로신의 특징26)이 들어 있고 사천왕의 속에서 비사문천이 독립하는 제 일보를 딛고 있다.
간다라의 사천왕의 복장유형을 3가지로27) 말하기도 하는데 육감적인 야크쉬니상으로 표현되기도 했던 초기의 사천왕상이 간다라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형으로 조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했던 불서보요경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간다라에서의 사천왕상은 제석천과 같은 천계의 신의 모습으로도 복덕을 관장하는 재보신의 모습으로도 또 전사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다양한 성격신이다.
간다라의 사천왕은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무인전사의 이미지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간다라의 사천왕은 재보신, 전사의 이미지 보다는 貴人形으로 묘사되는 천계신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훨씬 강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간다라에서는 항마장면이나 사리수호장면등에 등장하는 무인들의 갑옷과 대차가 없었을 것이다.28) 서역 호탄 라왁사원지 비사문천 복장과 단단월릭사원지의 비사문천 복장은 모두 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갑옷을 입고 긴 장화를 신고 칼을 차고 발 밑에는 악귀 혹은 지천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 이미 보이고 있다.(삽도19) 이것으로 보아 간다라의 사천왕상이 귀인과 전사의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간다라의 사천왕상과 서역사원의 무인상의 갑옷 및 생령좌양식에서 어느정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의 조형이 이처럼 인도에서는 귀인형의 모습으로 또는 재보신의 수호신으로 표현되었다가 서역을 통하여 북방불교권에서는 장군과 같은 무인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분명한 것은 간다라의 사천왕은 조각을 통해서나 경전을 보더라도 “국가의 위호자로써 호숫신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귀인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며 천계의 신으로써의 역할이 훨씬 강하게 풍겼다는 점 , 다만 염두에 두어냐 할 것은 재보신으로써 전사로써 모습을 드러낸 경우 그 역할은 주로 사천왕중 가장 힘이 센 비사문천이 맡았다는 사실이다.
간다라의 사천왕은 서역으로 전달 되었고 그 서역의 사천왕은 처음부터 호국,수호의 이미지가 강조되어갑옷을 입고 긴 장화를 신고 발아래에는 지천녀(혹은 악귀를밟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그러나 서역의 사천왕은 간다라와는 역할도 도상도 다르다) 따라서 서역의 경우, 간다라로부터 사천왕이 전달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갑옷을 포함한 도상의 전달에 관해서는 희의적이다. 결국 무장형의 사천왕상이 처음 시작된 것은 간다라일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가 아는 호국신 수호자로서의 갑옷을 입거나 용두장식을 하고 바아래 악귀를 밟는 생령좌를 한 분노에 찬 모습은 서역 사천왕상도 분명 서역에서 정형화 되었다.
중국에 전해져 온 사천왕상의 도상에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장식에 견갑 및 복갑에에 용두장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점차 보살형(돈황석굴,법문사 사리기 보살좌상형 사천왕)에서 무사형으로 바끤다. 돈황석굴의 견갑에 분명 용의 장식이 보이고, 대리국의 사경탑,용문석굴,빈양동 석굴등지에서 확실하게 견갑,복갑에 용두장식이 표현되기 시작함을 본다.
이러한 중국화한 도상양식이 당나라를 통하여 신라에 사천왕신앙의 왕성한 때를 같이하여 그대로 유입되어 조성되었다고 본다.
2.대좌의 5가지 형식
여러 논문에서 선배학자들이 4천왕상에 대한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생령좌의 형식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특히 용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규정이 되어 있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대좌 형식을 생령좌를 악귀좌와 권속좌로 구분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경전에 근거하여 구름모양의 운좌를 향운좌로 불러져야 하고 천의자락을 밟고 있는 것은 천의좌로 봐야 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보이고 있는 감은사 동,서탑의 사리기에서 보이는 소를 밟고 있는 승물의 경우 우좌로 한 형식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권속좌
사천왕이 두 발로 짓밟고 있거나 엉덩이로 깔고 앉은 모양이나 두 어깨로 떠 받치고 있거나 두 손으로 떠 받치고 있는 모든 생령을 악귀상이라고 대동소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악귀상을 통칭해서 무조건 악귀라고 한다면 그 형태만을 보고 단순하게 규정한 것이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악귀좌에서 악귀좌와 별도로 권속좌라고 해야하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권속들에 대해서알아보자.경전마다약간
方位 |
권 속 | ||
法華經戒環解 권제1 |
長阿含經 권12 (大正藏 권1, no.1 pp.79-80) |
도상,방위,기능 설명 및 출전경전 | |
동방-지국천왕 |
乾闥婆,富單那 |
건달바,비사자,91명의아들 |
華嚴經疏 제5, 金光明經 권6. 藥師如來觀行儀軌法(大正藏 密敎部,제19권 no.923 p.29 上.) 藥師七佛本願功德經(大正藏 권19 no926, p.47上.) 長阿含經 流行品(大正藏 1권), 增一阿含經 제9, 仁王經,陀羅尼集經, 起世經제64, 天王品, 立世阿毘曇論 제4 提頭賴吒城品,金光明最勝王經 4권본 6장 四天王品.大方等大集經 권52提頭賴吒城天王護持品 또는 동 21 no2145 毘沙門天王經(217-219) 長阿含經 제12 大會經, 起世經, 立世阿毘曇論,阿育王經(大正藏 50,no.2043 권6 p.150 中, 佛說陀羅尼集經 권11(大正藏18, no901) 法華經疏, 長阿含經 제24 四天王品, |
남반-증장천왕 |
폐려다,鳩槃茶 |
구반다,폐려다,91명의 아들 | |
서방-광목천왕 |
毒龍,毘舍奢 |
제용왕,부다나,91명의 아들 | |
북방-다문천왕 |
羅刹,夜叉 |
나찰,야차,91명의아들, 28의사자 |
'尋劍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용어집(94) - 종(범종), 종문지일관 (0) | 2008.06.27 |
---|---|
불교용어(5) - 스님의 소임과 별칭 (0) | 2008.06.25 |
불교 용어집(93) - 조사, 조사서래의 (0) | 2008.06.25 |
숫타니파타 - 밭을 가는 바아라드바아자(3) (0) | 2008.06.24 |
금강경(金剛經) 강의(10) - 8. 依法出生分 (0) | 2008.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