尋劍堂

금강경(金剛經) 강의(12) - 10. 莊嚴淨土分

難勝 2008. 6. 29. 05:03

                    금강경(金剛經) 강의(12)


10. 莊嚴淨土分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有所得不 不也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해석(解釋)10. 정토의 장엄(장엄정토분)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옛날에 여래가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얻은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불토(佛土)를 장엄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형태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 맛과 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은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第十 莊嚴淨土分


강설(講說): 제 10분은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인데 이것은 대반야의 정토이자 부처의 정토로서 단지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장엄정토란 일념도 일지 않는 상태에서 전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마음이 청정하고 공(空)에 이르렀을 때가 진정한 정토입니다. 또 장엄은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입니다. 정토(淨土)는 부처님 세계 곧 불토(佛土)를 가리키는데, 우리 본심 자리가 점령하고 있는 전체 우주를 흙 토(土)자 하나로 말한 것입니다. 현상계는 흙이 대표적이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불토(佛土)는 부처님의 세계를 가리키고 정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불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장엄이 안 되어 있어서 모두 오줌, 똥, 고름, 썩은 거름, 송장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썩은 더러운 것을 먹고 험악하게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승불교에 초과(初果), 이과(二果), 삼과(三果), 사과(四果)를 증득해 올라가면 차차 이 세계가 정화됩니다. 더럽고 험한 것이 없어지고 차차 우리가 먹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까 대 소변도 필요 없어지고 그러므로 해서 몸이 점점 환화공신(幻化空身)으로 되어 갑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이니 다섯가지 욕심을 탐내서 죄만 짓고 서로 살육(殺戮)을 안 하면 안될 이런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남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마음 한 번만 돌이켜서 정화를 해 놓으면 그때는 세계가 또 달라져 가고 산천초목(山川草木)까지 전부 달라져 갑니다. 거기는 일체 중생의 마음도 정화(淨化)가 되어 거룩하게 삽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의 장엄은 뭐니뭐니해도 극락세계에 비하면 냄새가 나고 사람 자체부터 추하고 못생겨서 극락세계의 변소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세계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장엄(莊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심(無心)에서 이루어진 장엄 아닌 장엄이며, 하는 것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이끌어 제도한다는 뜻으로 장엄정토(莊嚴淨土)라 했습니다.


정토는 불교의 이상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 곧 불국토를 말합니다. 보살들이 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고 물은 것은 사과성인들이 자기 수행의 지위를 얻어도 얻었다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살들도 정토가 장엄해도 장엄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장엄하다는 것은 모양을 갖추어 되도록 애쓴다는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말하면 꾸며서 보기 좋도록 한다는 뜻인데 보살들이 이 세상을 불국토화하기 위하여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부처님이 과거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하는 것)를 받았는데 받은 바가 없다고 합니다. 무소득의 법문이 설해지는 것은 꿈에 있던 것이 깨어나면 없는 것처럼 깨달음의 세계는 모든 현상이 공하여 없는 절대무(絶對無)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생각을 굳혀 고집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른 바 선(禪)에서 말하는 무심도리입니다. 유심(有心)은 항상 객관 대상에 집착하여 시비와 분별을 일으킵니다. 곧 번뇌의 세계에 들어가 나쁜 업을 유발하기 쉽습니다. 하염없는 의식이 정화된 세계는 명상(名相)에 머물지 않으므로 이름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실체를 모두 부정하여 현실의 집착을 벗어나게 합니다. 금강경은 시종일관 부정의 논리를 통하여 사물의 객체를 공화(空化)시켜 인식의 기준을 빼앗아 버립니다. 사실 인연에 의하여 나타나 있는 현상은 임시적인 거짓모습에 불과하므로 표현의 방편으로 쓰는 명상(名相)에 따라 개념이 형성되나 그 실체는 파악될 수 없으며 어떤 성격 규정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진상은 묘사될 수도 없습니다. 비록 밖으로 드러나는 피상적인 모습을 감각적으로 판단한다 하여도 연(緣)이란 전제된 조건에 따라 임시적으로 식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이 파랗다'고 서술하지만 이는 날씨가 쾌청할 때의 경우이고 구름이 끼었거나 비가 올 때의 하늘은 파랗지 않습니다. 또 밤에 보는 하늘은 어두워 캄캄하기만 할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이 무엇이 아니라 이름이 무엇이다. ' 라는 비(非)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연(緣)에 구속된 상황으로써 사물을 판단하면 실상을 어기는 미혹과 잘못된 집착이 생기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공(空)의 원리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단정(斷定)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문: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實無所得

해석(解釋):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옛날에 여래가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얻은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연등부처님 계신 곳에서 실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또 같은 뜻을 물으십니다. “여래가 아득한 과거세(過去世)에 연등부처님 앞에서 교화를 받고 보리심을 일으켰는데 그때에 내가 어떤 법을 얻은 바가 있었느냐,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은 법이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는 부처님께 여쭙니다. “아니옵니다. 부처님,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었다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로 아무 것도 얻으신 법이 없습니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사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범부가 보기에는 석가여래께서 모든 것을 새로 깨달았으니 그것은 얻은 법입니다. 인생이란 밥 먹고 똥싸다 죽는 것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부처님을 만나서 ‘확실히 내가 죽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우주의 본 바탕이요 절대자유(絶對自由)의 존재로구나, 완전하고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존재로구나’하는 것을 부처님 설법(說法) 듣고 믿게 되었고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도리를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연등불(燃燈佛) 처소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후부터 열심히 수도를 하고 난행고행(亂行苦行)을 하고 보살행(菩薩行)을 닦아서 오늘날 성불(成佛)했노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뒤 사십구년동안 항상 이렇게 설법하셨는데, 사십구년이 지난 지금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설하시면서 시침을 떼고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음이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연등부처님께서 설사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셨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자신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이 닦아서 깨달았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어떤 법을 가지고 와서 닦은 것은 아니며 애당초부터 없던 것을 연등부처님한테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불(成佛)을 다 마치기 전 까지는 연등부처님의 가르침을 버려서도 안되고 마음에 기억을 해서 잘 간직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데도 마음에 의지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세워 가지고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도 과거에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고 성불을 하신 것은 아니므로 얻은 것이 전혀 없다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가 연등불한테 아무것도 얻은 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겉으로 봐서는 거짓말한 것과 한가지입니다. 확실히 연등부처님을 의지해서 발심했고 그 지도에 의지해서 성불하신 것인데 「얻은 것이 없다(無所得)」고 하심은 마치 제자가 스승을 배신(背信)하여 전부 「나 혼자 배웠지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것처럼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께서 「안될 말씀이십니다. 연등부처님 앞에서 깊은 것이나 얕은 것이나 참된 법이나 거짓된 법이나 얻은 바가 조금도 없습니다.」하셨고 부처님께서도 「너의 말이 옳다」고 긍정(肯定)하셨습니다.  체와 용이 둘이 아닌(體用不二) 본체 자리의 본래청정(本來淸淨)한 본바탕인 마음자리를 강조(强調)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자리임을 알고 이제부터는 술이니 고기니 재산이니 가정, 국가, 민족이니 하는 일체의 집착, 분별, 망상을 초월하여 공부를 완전하게 마치기까지는 달리 한 번 해 봐야 할 것입니다. 마치 장래를 위해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조국과 가정을 버리고 먼 외국으로 유학(留學)가는 것과 같이 불교가 본래는 구세(救世)의 종교지만 내가 먼저 도(道)를 구하여 알 때까지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산중수도(山中修道)하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본체로 봐서는 영원상주(永遠常住)의 존재니까 닦는다고 해도 안되고 닦으려는 마음을 내면 벌써 때 묻히는 것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았다 해도 안되는데 더군다나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이걸 닦는다면 그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깨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범부로서 모순(矛盾)된 방법에 의해서 깨치는 길이 묘하게 있기 때문에 귀신도 모르게 지도하는 길이 있는 것을 나중에는 필경 알게 됩니다. 깨친다는 것도 기묘(奇妙)한 일이고 깨쳐 놓고 봐도 참 기묘한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실상자리(實相) 마음자리를 봐서는 이렇다 저렇다가 다 끊어져서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줄 것도 없지만, 범부로서 학문이니 과학이니 철학이니 유물(唯物)이니 유심(唯心)이니 하고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 사상을 만들고 개념을 지어서 미혹(迷惑)되어 있다가 불법에 들어와서 상대세계(相對世界)의 생사법(生死法)을 초월해서 차차 도가 높아지면 마음의 터울이 단계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일학년 이학년 구별이 있듯이 초지보살(初地菩薩), 이지보살(二地菩薩)하여 처음 깨달아서 부처가 되기까지 크게 나누어도 무려 52위(位)의 계층(階層)이 있는데 그것이 다 무엇에 의지해서 하긴 합니다. 깨달은 본체 자리에서 보면 계급이 있을 수 없고 닦을 것이 없지만 다겁(多劫)으로 오면서 지어 온 업습(業習)을 닦아 없애는 데 따라서 그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따라 점점 아는 것도 더 많아지고 신통(神通)이 늘어납니다.  이렇게 차츰차츰 닦아 가는 과정에 있어서 모두 다 무엇에 의지해서 배우고 닦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얻은 법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와 같은 보살인위(菩薩因位)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꿈속에서 거짓으로 있었던 일이고 실제로 실상으로는 없는 것이란 말씀이신 것입니다.  내가 본래 얻은 것이고 연등부처님 만나 뵙기 전부터 내게 본래 있던 것이므로 그것은 연등불한테 얻은 법이 아니니 그래서 소득(所得)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본문: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해석(解釋):"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불토(佛土)를 장엄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 “수보리야, 그러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거룩하게 교화하여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이 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교화하여 불토룰 장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장엄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는 장엄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수보리존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천당이나 불토의 궁극적 형상은 과연 어떤 모양일까요? 서양인이 말하는 천당은 배치가 모두가 서양식이자 모두 유럽식입니다. 신이라든지 공중의 천사들 역시 유럽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도인들이 말하는 것은 인도식입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것은 입은 옷까지도 중국식입니다. 각자 생각하는 천당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가보지 못한 곳이니까 불국세계나 장엄불토란 각기 좋아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바로 능엄경에서 말하는 “중생의 마음에 따라, 자신이 아는 바에 응해 업에 따라 발현될 것이니,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隨衆生心 應所知量 循業發現 寧有方所)입니다.

  세상 일체 지식의 범위, 종교철학의 경계는 모두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마음의 폭에 따라 천당이니 불토니 하는 것들도 크기가 달라질 것이고, 지식의 범위나 양에 따라서도 불국의 크기는 달라질 겁니다.

  업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똑같이 불법을 배우고 좌선을 행하면서도 각자가 본 부처는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의 심경에 나타나는 업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찌 일정함이 있겠습니까? 어떤 고정된 방향도 없고, 어떤 고정된 마음의 작용도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 유심이요, 오직 순수한 유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묻습니다. 보살에게 장엄한 불토가 있겠는냐? 수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장엄한 불토의 세계를 부인합니다.

  장엄불토(莊嚴佛土)란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함으로 해서 무심한 것이 가장 큰 복을 짓는 것을 뜻하니, 복의 근본이 무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은 우주를 자유 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곧 무심입니다. 중생들은 이와 반대로 유심(有心)하기 때문에 범부중생이니, 유심이라는 말은 소유욕이고 점령이고 욕심입니다.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자꾸 없어져 가고 욕심을 부리면 망해 가고 욕심을 덜면 부자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욕심만 초월해 보십시오. 먹을 것도 넉넉해집니다.

  금강경 주제(主題)로 되어 있는 운하주(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에 대해서 「마음을 어디다 두며 마음을 어떻게 먹으며」,「번뇌와 망상을 어떻게 항복 받으며」하는 말씀인데, 마음을 어디다 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어떻게 먹는다 해도 틀린 말이고 마음을 가진다 해도 틀린 말입니다.  마음은 마음이지 그걸 두려고 하며 가지려고 하며 먹으려고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하라 「아무데도 주하지 말라」 주한다는 생각조차 내지 마라.  아무데도 주하지 않는 그게 본래 주이고 또 본래의 그 자리에 주하라 그런 말입니다. 내 본심자리는 생각을 내면 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은 망상이 죽 끓듯이 끊으니까 일체 만상(萬像)에 색신(色身)이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전부 주하고 의지해 가지고 집에 주하고 남편한테 주하고 아들 딸한테 의지하여 모두 거기에 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망상을 다 항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意)입니다.

  이 망상을 항복받는게 불교공부인데 산중(山中)의 절에 있으면 요 근래까지도 그런 실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부하다가 흔히 노루나 토끼가 와서 도망가지 않고 옆에 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정이 들어 안 가려고 합니다. 얼마 있다 다른 절로 가려고 하면 자꾸 따라옵니다. 그러면 사람들한테 붙들릴거고 그래 돌맹이질을 하고 막 야단을 치고 이러면 또 눈을 꿈벅꿈벅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올라갔다가 자꾸 내려다보다가 그만 또 뛰어 내려옵니다. 그래 그놈 잡아서 온갖 설교를 해서 타이르고 「네가 여기 내려가면 잡혀서 죽으니까 너희 동무하고 놓아라」 그래도 잘 가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몽둥이로 때려 주고 돌맹이로 엉덩이를 한번 되게 때려 주면 그때는 안 옵니다. 옛말에 “불탐 야식 금은기(不貪 夜識金銀氣)”라고 하여 탐심이 없으면 그믐밤에 금과 은의 서기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해 조간 미록유(遠害 朝看蘪鹿遊)”라고 하여 아무 해물지샘(害物之心)이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나가도 사슴과 노루가 뜰 앞에서 자고 사람이 나와도 안 달아납니다.

  이런 마음 공부하는 것이 보살장엄(菩薩莊嚴)입니다. 국토를 이렇게 장엄하여 악한 짐승도 악한 사람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그렇게 청정해지면 다른 것은 다 모두 내마음의 그림자니까 따라서 다 청정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니 그 마음에 한 점의 티도 없이 청정하므로 그 거룩한 마음의 광명이 장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사바세계에서 법당(法堂)에 단청(丹靑) 하고 남대문에 단청하듯이 울긋불긋 오색칠하는 게 아니고 궁전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하는 게 아니며 오직 무심만 하면 그게 곧 장엄이고 장엄 안 하는 걸로 장엄하는 것을 장엄이라 이름하여 부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늘 이런 변론방법을 사용합니다. 소위 장엄불토란 단지 하나의 형용어에 불과한 것으로 “장엄이 아니라는(卽非莊嚴)”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장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장엄은 반드시 청정한 곳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상상하는 아무것도 없는 그 어떤 것, 텅 비어버린 경계, 반드시 이런 것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경계에 대한 상(相)은 이미 장엄이 아닙니다.


본문: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 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 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해석(解釋):"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형태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 맛과 느낌, 마음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강설(講說): 부처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다.” 하셨는데 무심한 것, 곧 청정심이 드러나도록 수도를 하고 그래서 견성(見性)하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전생의 과거업(過去業)이 있어서 처음 견성한 사람으로서는 아무래도 업이 들락거립니다. 그러니 아주 본성(本性)에 깊이 들어서면 모르지만 이제 처음으로 초견성(初見性)쯤 해서는 고운 여자는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행동만 안 하지 그런 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또 당부하시느라고 「이렇게 청정심을 내라」고 하신 것이니 이런 것은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선호념제보살(善護念諸菩薩), 곧 「모든 보살들을 잘 당부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수행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행방법은 차선의 방법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차선의 방법은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머무는 바가 없는(應無所住) 겁니다.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은 바로 수시로 청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로 청정심은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불응주색(不應住色)하고 생심(生心)”하라 하셨는데, 색에 주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네 소유 재산 있거든 내 재산이라 생각하지 말고 있는 사람에게 주지말고 없는 사람에게 주라” 그 말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도 “마땅히 주한 바 없이 어디고 마음이 걸린 바 없이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서 보살행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고 청정한 마음을 내어 쓰는 것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행(菩薩行)은 천당 지옥으로 중생을 쫓아다니며 제도(濟度)해 주고 아무 보수(報酬)도 생각 없이 하면 그것은 안 한거나 한가지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하지 말고 중생을 위해서 보시하고 제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이 없다고 보는 그것이 마음을 항복 받는 법(降伏其心)이라고 하신 것이고 금강경이 전부 보살행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아무런 일도 없이 마치 거울처럼 맑아, 경계가 다가오면 비추고 사라지면 없어집니다.


본문: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해석(解釋):수보리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은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에서 수미산은 바로 법신(法身)을 말합니다. 법신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혀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으며,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법신은 큰 몸(大身)이자, 한량없는 몸(無邊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기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부처의 법신과 장엄정토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 부처의 세계와 부처의 정토는 바로 이런 것이다. 내 다시 그대에게 묻노니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처럼 크다고 한다면 마치 희말라야산처럼 그렇게 크고 곤륜산보다도 더 우람하다면 그대는 이것을 크다고 하겠는가? 크지 않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법신은 무량무변하게 크고, 또 영원히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몸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한다(”佛說非身 是名大身)는 최후의 결론입니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몸의 크기가 백두산만 하다든지 지구덩이만 하다면 이 사람의 몸이 큰 것이냐 안 큰 것이냐?” 하고 엉뚱한 말씀을 물으십니다. 여기서 수미산은 지구를 말합니다. 왕은 제일 큰 것을 뜻하니 산왕(山王)이라 함은 왕산(王山)입니다. 가령 한국은 백두산(白頭山)이 왕산이고 세계에서는 히말라야산이 왕산이 될 것입니다. 「왕산만한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몸이 큰 것이냐」하고 물으심에 대해 수보리는 “아주 큽니다. 왜냐 하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몸 아닌 것을 큰 몸뚱이라 하셨기 때문이옵니다.”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의문되는 것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씀 다음에 수미산만한 몸뚱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논리(論理)의 연결입니다.  앞의 말과 뒤의 말의 뜻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 까닭은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라. 아무 조건 없이 중생구제해 주고 보살행 하라.  소승 모양으로 적멸만 지키지 말고 중생을 제도해 복을 닦으라. 아무 생각 없이 해야 공덕이 크니라.」이렇게 말씀하시고도 크다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또 기묘(奇妙)한 턱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수보리야, 비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저 수미산왕만 하다면 그 몸뚱이가 크냐 안 크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 또 수보리 존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참 굉장히 큰 몸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오면 부처님이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셨기 때문에 크다고 합니다.」 소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놓은 것 같은 말씀이지만 앞에 한 말씀과 앞으로 나오는 말씀과 자세히 보면 엉뚱한 말씀도 아니고 동문서답(東問西答)도 아니고 앞뒤 조리(條理)가 딱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말씀한 내용을 여기서 종결짓는 구절(句節)인데 보통 책 소설 보듯이 「여시 아문 보살 마하살」하고 읽어 넘어 가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정도로 하고도 법문 들었다고 참배하고 가기는 갑니다마는 그것은 남의 잔치 구경한 것밖에 안 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나오기 전에부터 지금까지 「큰 것이 큰 게 아니고 있는 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게 없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 중생이 이니고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삼십이상 아니라」고 전부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  현상계가 현상계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확실한 존재가 아니라 그지 없이 허망한 존재라고 할 수도 없이 덧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현상이 현상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한 이 말씀을 대표적으로 들어서 「금강경 사구게」(金剛經四句偈)라 그럽니다.  이미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삼십이상도 아니고 몸뚱이가 몸뚱이 아니라고 그랬으니 사실 그대로입니다.  부처님이 수미산이 아니라 우주덩어리만 하다고 하셨더라도 그것은 없는 것이며 비신(非身)이고 비상(非相)이라는 말입니다.  수미산만 하다고 거기에 걸려서 그러는데 「부처님 삼십이상이 아니고 또 중생이 중생 아니고 현상계가 현상계도 아니고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이다」라는 것을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런 사람들을 봤다면 「오늘 큰 산만한 사람 봤다」고 모두 밥만 먹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하고 야단인데 그러면 벌써 거기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는 신도거나 선남 선녀거나 비구 비구니거나 그렇게 큰 걸 봐도 크다고 생각 안 합니다.  그게 다 모두 꿈 속이고 그게 실지 있는 게 아니고 환(幻)의 존재여서 물질적으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현재 파멸(破滅)되는 과정에 있는 비상(非相)으로 봐 버립니다.  「아까 그 사람 굉장히 크네」하고 큰 것 작은 것 분별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떨어져 거기에 주한 사람이니 번뇌망상에 쌓여서 칠전팔도(七顚八倒)로 일어섰다 자빠졌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한술 더 떠서 「참 큽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것을 속아서 대단히 크다고 한 것 같으면서도 곧 「부처님께서 그 몸뚱이가 몸뚱이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걸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엉터리로 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대답입니다.  우리가 이론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큰 사람 하나 만났을떄 그 생각 놓치기 쉽습니다.  크다는데 그만 다 잊어버리고 주해 버립니다. 산을 보면 큰 데 넘어가고 꿀을 먹으면 달콤한 맛에 빠져서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견성(見性)한 이도 혹 어쩌다 이십사시간 제대로 가다가도 속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속지 않도록 도가 아주 높아져서 잠도 없어지고 번뇌 망상도 없고 열반(涅槃)도 아니고 생사(生死)도 아닌 신비한 지경에 합치(合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논리상(論理上)으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이 모순(矛盾)됩니다.  응무소주면 응무소주고 이생기심이면 이생기심이지 어떻게 「내는 게 안 내는 거고 안 내는 게 내는 거」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수보리 존자가 크다고 한 말씀은 바람소리나 물소리같이 아무 뜻이 없는 대답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이것은 크니 작으니 말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은 다음에도 많이 나옵니다.  앞에서도 이미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삼십이상이 아니므로 그래서 삼십이상이라 했고, 일체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중생이라 한다」 그랬으니 여기서는 직접 사실적(事實的)인 실례(實例)를 들어가지고 도가 칠전팔도(七顚八倒)로 움직이지 않는가 하고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 보면 선지식(善知識)이나 도인들끼리는 별 짓을 다 해서 흥청거리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야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점잖게 말씀하셔서 어디까지나 범부중생이 알아듣도록 고구정녕(苦口叮寧)으로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하시느라고 이렇게 순수하게 말씀하신 것이고 수보리 존자와 부처님 사이에는 그런 정도라도 척척 넘어갑니다. 도인들끼리 법담(法談)할 때에도 그야말로 석화광음(石火光陰)으로 찰나에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