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게는 벽화(壁畵)나 벽에 거는 탱화(幀畵) 등을 포함한 불교회화(佛敎繪畵) 전반뿐 아니라 설화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고대 인도의 부조(浮彫)까지도 의미한다. 좁게는 경전의 첫머리 혹은 권(卷) 머리를 도해(圖解)하는 사경화(寫經畵)와 판경화(版經畵)만을 통상 변상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진리의 내용[眞相]을 변화하여 나타낸 것이라 하여 변상(變相)이라고도 한다. 그 기원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담은 불전도(佛傳圖), 전생(前生)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대 인도의 여러 불탑(佛塔)과 탑문(塔門) 및 난순(欄楯) 등에 새겨진 부조상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처음에는 석가모니와 관계된 설화내용을 바탕으로 부조 또는 그림으로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양한 경전이 성립되면서 그 내용과 심오한 교리를 함축하여 한 폭의 그림으로 설명한 변상도가 유행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법화경(法華經)》 계통의 변상도로 〈묘법연화경변상도(妙法蓮華經變相圖)〉, 《화엄경(華嚴經)》 계통으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 《정토3부경(淨土三部經)》 계통으로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 이외에도 〈범망보살계경변상도(梵網菩薩戒經變相圖)〉 〈금강경변상도(金剛經變相圖)〉 〈현우경변상도(賢愚經變相圖)〉 등이 있다.
한편, 그 경전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경(經)이 잘 보호될 것을 기원하는 뜻에서 신장상(神將像)을 그린 〈불공견색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 제13권 변상도〉(1275)나 〈문수사리문경변상도(文殊師利門經變相圖)〉(1276) 등도 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수록한 경전과는 달리 불교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거나 새롭게 위경(僞經)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부모은중경변상도(父母恩重經變相圖)〉 등이 있다. 대체로 초기에는 필사(筆寫)를 위주로 하는 사경(寫經)이 경전의 형태를 이루면서 권(卷) 머리에 또는 경(經) 머리에 한 폭의 그림으로 장식한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유행하였고, 점차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목판이나 활판으로 찍은 판경변상도(版經變相圖)가 많이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판경의 첫머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본문과 함께 삽도 형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경전과 거기에 수반되었던 변상도는 승려계급이나 특수계층에 한정되어 유통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교단이 발달하고 불교신앙이 대중화되면서 큰 규모의 변상도가 나타나게 된다. 즉 벽화나 탱화의 형태를 빌려 경변상의 내용이 확대되었는데, 이른바 관경변상도, 화엄변상도, 미륵하생경변상도 등이다. 탱화의 형태를 빌린 변상도는 비단이나 종이 위에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지며 회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경변상도는 백지(白紙)나 감지(紺紙), 비단 등에 먹이나 금·은을 사용하여 선(線) 위주로 도상을 창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한국에 현존하는 최초의 변상도는 신라 때 만들어진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8세기 중엽)가 있고, 고려시대 사경변상도로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발원으로 제작된 〈감지금니대보적경변상도(紺紙金泥大寶積經變相圖)〉(1006, 일본 文化廳 소장)와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제31권 변상도〉(1337, 호암미술관 소장) 등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목판인쇄술의 보급과 함께 경판변상도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정조(正祖)가 발원한 용주사판(龍珠寺版) 〈불설부모은중경변상도〉(1796)가 유명하다.
감로도라는 이름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시킨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감로왕도(甘露王圖)·감로탱(甘露幀)·감로탱화라고도 한다. 영가단에 봉안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영가단 탱화'라고도 하고, 내용상 《우란분경(于蘭盆經)》을 근본 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우란분탱화·우란분경변상도라고도 한다.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묻고 해답을 듣는 내용이다. 감로왕은 서방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이다.
그림은 상단·중단·하단으로 구분된다. 상단에는 아미타삼존을 포함한 칠여래(七如來)의 모습과 지옥 중생을 맞이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단에는 중앙에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를 그린 반승(飯僧) 장면과 천도의 대상인 아귀가 공양을 받들어 먹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의식을 주재한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성현(聖賢)·뇌신(雷神) 등이 그려졌다.
하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희로애락상이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지옥과 현실의 표현하는 하단의 그림은 그림이 그려진 당시 풍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중생 교화를 위해 그려진 불화였지만 조선시대에 유교 덕목인 효(孝)가 강조되면서, 조상 숭배 신앙이나 영혼 숭배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널리 그려졌다. 또 《우란분경》의 내용을 배경으로, 백중날에 행하는 의식을 '우란분재(于蘭盆齋)'라 한다.
영산회상도·지장회상도·명부시왕도·관음보살도·용왕대신도·산왕대신도 등이 있다. 괘불은 자수를 놓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천에 불상을 그리고 이것을 베에 배접한다. 다른 불화와 달리 크기가 매우 큰데, 큰 것은 높이 15m, 너비 10m에 이른다. 아래에는 원형 축을 달고, 위에는 삼각형이나 반원형 축을 달아 두루마리로 감을 때 부피를 줄이고 사용하기 편하게 한다.
괘불을 내걸기 위해 법당 앞에 세운 돌기둥을 괘불석주라 하고, 괘불을 높이 걸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대를 괘불대라 한다. 보관할 때는 괘불함에 넣어 법당 안에 두고, 내다 걸 때는 법당 옆의 괘불문을 통해 나가는데, 이때 괘불이운(掛佛移運)이라는 의식을 치른다.
한국에서 괘불이 언제부터 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기이(紀異)〉의 문무왕 법민조에 명랑(明郞) 법사가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사용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채백이 괘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7∼18세기에 들어서 괘불의 제작이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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