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불(行佛)은 육조단경, 조사어록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의 행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성불은 행불로부터 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불입니다.
마지막 강연 - 월호스님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감동이 있는 법문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2008 빛고을 불교아카데미’가 지난 16일 월호스님의 ‘당신이 주인공입니다’라는 주제로 한 야단법석을 끝으로 회향했다.
불교신문과 광주불교방송 광주불교사암연합회가 공동주최한 이날 빛고을 마지막 행사에선 불교방송 간판프로그램인 ‘당신이 주인공입니다’의 DJ로 활약하고 있는 월호스님의 인기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1000여명의 불자들이 몰려들어 광주 동구KT정보문화센터 대강당은 계단과 통로까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 날 월호스님의 법문과 흥미진진한 노래이야기를 정리했다.
첫째 불교는 자력신앙입니까, 타력신앙입니까? 불교는 자각(自覺)신앙입니다.
깨우치는 것은 자기가 깨우치는 것이지 남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왼손을 들어보세요. 왼손은 자력이요 오른손은 타력입니다. 자력도 충실하고 타력도 충실할 때 서로 부딪히면 이렇게 ‘짝’하고 소리가 납니다. 다시 말해 결과가 충실해집니다. 자력이 충실해도 타력이 부실하면 결과가 부실하고, 타력이 충실해도 자력이 부실하면 결과가 부실합니다.
둘째 불교는 무신론인가요, 유신론인가요? 불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예불할 때 중단을 향해 예를 올리는데, 여기가 신중단으로 신들에게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비신론입니다.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신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도 역시 우리를 옹호하는 옹호성중일 뿐입니다. 신과 부처님의 관계는 사제관계입니다. 부처님의 또다른 이름 가운데 천인사(天人師)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스승일 뿐 아니라 신들의 스승입니다. 그러기에 신과 우리는 도반관계입니다. 도반관계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주인님으로 섬기며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불교는 성선설인가요, 성악설인가요?
불교는 성공설(性空說)입니다. 성품은 선(善)한 것도 아니요 악(惡)한 것도 아니라 공(空)한 것입니다. 텅 비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으며, 고정된 나가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나를 만드는가’는 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행불어록 10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불(行佛)은 육조단경, 조사어록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의 행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성불은 행불로부터 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불입니다. 성불은 ‘언젠가 이 다음에 성불하겠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 연소할 때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불은 행불하면서 이루어집니다.
행불어록의 첫 번째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불교의 연기설을 말합니다. 콩을 심어놓고 백일기도를 해보세요. ‘신이시여, 팥이 나게 해주세요’하면 팥이 날까요. 팥이 아니라 콩이 납니다. 팥을 심어놓고 ‘관세음보살님, 제발 콩이 나게 해주세요’해도 콩이 아니라 팥이 납니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명확합니다.
두 번째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하는 나의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잊어버리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미리 걱정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보살행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는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내 작품이다’는 공사상을 말합니다.
공하므로 누구든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하면 누구든 공해집니다. 텅 비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고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역동적인 종교입니다.
네 번째는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 완전연소하자’입니다. 항상 바로 지금 여기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확실한 공간은 여기뿐입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인(因)도 충실하고 연(緣)도 충실해야 과(果)가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인은 주관적 원인이고, 연은 객관적 원인입니다. 당연히 주관과 객관이 모두 충실해야 결과가 충실해집니다. 자력과 타력을 같이 써야 합니다.
여섯째,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입니다. 불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수행을 잘합니다. 108배는 기본이고 3000배도 한 달에 몇 번씩 하는데 집에서 남편한테는 삼배도 안합니다. 절에서 부처님에게 3000배하는 것보다 집에서 남편이나 부인에게 삼배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입니다.
일곱 번째, ‘웃자! 웃을 일이 생긴다’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을 한마디로 쉽게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은 꽃으로 장엄했다는 것인데, 꽃 중의 꽃은 웃음꽃이며, 사시사철 지지 않는 꽃이 웃음꽃입니다. 저도 <화엄경>을 배우기 전에는 웃을 일이 생겨야 웃었습니다. 그러나 경을 배운 후에는 먼저 웃어서 웃을 일이 생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행자이고 화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통도사 극락암에는 경봉스님이 주석했던 삼소굴이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이상 웃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몸을 받았으니 웃고, 둘째는 불법을 만나서 웃으며, 세 번째는 빛고을 아카데미에 와서 웃습니다. 이제는 하루에 최소한 세 번은 웃으세요. 미소가 아니라 폭소로 웃으세요. 가짜로 만들어내는 웃음도 진짜 웃음과 같은 엔돌핀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하루 세 번 폭소하는 것은 30분간 땀흘리고 운동하는 것보다 건강에 더 좋습니다. 박수까지 치면서 웃으면 심장이 튼튼해지기 때문에 혈액순환도 잘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덟 번째, ‘나도 방생하고 남도 방생하자.’ 방생사상은 자살이 늘어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에게 매우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은 체험학습의 교재입니다. 자기 스스로 교재를 없애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역 경계든 순 경계든 다 공부거리입니다. 그리고 상황은 돌일 뿐입니다. 걸려서 넘어지면 걸림돌이고 디디고 일어서면 디딤돌입니다. 디딤돌로 만들 것인지 걸림돌로 만들 것인지는 내가 하기 나름입니다.
꼭 돈만 있어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온화한 얼굴, 미소짓는 표정,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바로 보시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보시가 꼭 필요한 시기입니다.
아홉 번째, ‘부처님 덕 보려 말고 부처님이 내 덕 보게 하자.’ 절에 가서 불전함에 보시금을 넣고 ‘부처님 시험에 합격해주시고, 가족이 다 건강하게 해주시고,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주시고, 건강해서 쾌차하게 해주시고...’ 하는 것은 구걸형 기도입니다. 불전함에 보시금을 넣고 ‘부처님, 용돈 쓰세요’ 하고 돌아서면 기분이 뿌듯할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용돈 드리고 왔을 때 뿌듯하지 몇 푼 넣고 이것저것 구걸하고 돌아서면 비굴한 마음만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 덕 그만보고 내가 부처님에게 은혜를 갚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 은혜를 갚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법륜을 굴리는 것입니다. 법륜을 굴리는 것은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푸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행불어록 10선을 가지고 전도에 나서기 바랍니다.